잃은 자의 고백
"정말로 다른 무녀에게 모든 걸 빼앗긴 것이 사실이라면..."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흩날리듯 낮고 조용했다. 장작을 더하던 아로스의 시선이 타닥거리는 불꽃 너머의 시즈에게 옮겨졌다.
"무녀님께서는... 그 말을 믿으십니까?"
시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남자의 옆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본 잿빛 하늘은 숨죽인 듯 적막했고, 협곡의 암벽은 그런 침묵을 지키는 거대한 심판자처럼 우뚝 서 있었다.
말없이 무릎을 꿇은 시즈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남자의 투구를 벗겼다. 투구를 벗기자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눈 밑으로 짙게 내려앉은 그늘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는 남자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가 아주 깊이 스며 있었다. 그토록 맹렬한 분노로 날을 세웠던 자가 지금은 거센 파도에 휩쓸린 조각배처럼 의식을 잃고 무력하게 누워 있었다.
시즈가 조심스럽게 남자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살며시 얹자, 사라져야 할 환영처럼 희미한 그림자가 그녀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잃은 것에 대한 슬픔, 되찾고자 한 갈망, 그리고 끝내 원망으로 뒤바뀐 감정. 그것은 시즈 자신도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 순간, 남자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탁한 시야가 천장을 더듬더니 이내 자신이 결박되어 있음을 인지한 눈동자가 날카롭게 흔들렸다. 온몸의 힘줄이 긴장으로 부풀어 오르면서 팔과 어깨가 뒤틀렸지만 그는 목소리 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떴군."
낮게 중얼거린 아로스의 손은 검의 자루에 얹힌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곁눈질로 아로스를 스치듯 노려본 남자는 이내 시선을 시즈에게로 돌렸다. 눈은 불붙은 장작처럼 분노로 이글거렸다.
"무녀......!"
그 단어는 입에서 튀어나오기보다는 무너진 마음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저주처럼 터져 나왔다. 곧이어 남자는 몸을 들썩이며 소리쳤다.
"포박을 풀어라! 지금 당장이라도 이년의 목을 꺾어버리겠어!"
시즈는 미동도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고함은 절규였고, 절규는 억누른 분노와 뒤섞이면서 마치 지진 전의 대지처럼 불안정했다.
"무녀의 말에 사람들은 의심 하나 없이 따라갔다! 그 눈빛 하나에 웃으며,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는 말을 잇지 못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붙잡지 못했어. 아무리 불러도... 내 아내와 딸은 홀린 듯이 무녀를 따라 협곡의 저편으로 사라졌어. 나 혼자 남았다고......"
흐느끼던 남자의 낮은 목소리에, 갑자기 점점 더 깊은 분노가 실렸다.
"...아우로라의 무녀는 잘못된 길로 향하는 이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사명을 지닌 존재들이 아니었나? 그런데 도대체 왜...! 네년들의 신은 피난민들의 길을 끊어버리고! 살아남은 이들마저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냐!"
남자의 말에 아로스의 눈이 흔들렸다. 아우로라의 기사로부터 들은 아텐시아의 최선의 선택. 그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절망이 되었으리란 것쯤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마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우로라의 지배자의 선택은 이 남자에게 있어서 단지 모든 것을 빼앗아간 폭력일 뿐이었다.
'이 남자는... 바로 그 길의 끄트머리에서 살아남아버린 자였구나.'
아로스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마치 마음을 숙이듯 시선을 낮추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침묵엔 분명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해한다는 말보다 먼저, 지금껏 남자의 고통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자각이었다. 그것만이 지금 이 순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시즈는 고개를 숙이고 남자의 시선을 받아냈다. 불처럼 번지는 분노는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끝자락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이글거리는 눈빛을 향해 비명을 누르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 역시 무녀이지만, 사람의 뜻을 꺾거나 마음을 속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시즈의 대답에 남자의 얼굴은 조소로 번졌다.
"아니, 다를 것 없어. 그 눈과 힘으로 똑같이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겠지. 저 기사도 네년이 조종하고 있는 거잖아!"
"아닙니다. 저는 무녀의 사명을 가볍게 여기지도 않고, 지고의 존재의 힘 또한 경외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조심합니다."
시즈가 망설임 없이 가면을 벗자, 마력으로 가득한 왼쪽 눈이 푸르게 빛났다. 그 빛은 불빛보다도 조용히, 그러나 깊게 주변의 어둠을 밀어냈다. 하지만 남자는 말없이 그저 냉소적인 눈빛으로 그녀의 시선을 받아쳤다. 그날 본 광경은 이미 진실로 굳어 있었기에 어떤 의심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시즈는 그런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무녀는 사람을 조종하거나 의지를 꺾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아요. 저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권유이지 강제가 아닙니다. 억지로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 아닌,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곁에 서는 것이죠. 하지만 그 무녀는... 마치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하셨지요?"
"그래.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미소와 손짓 하나로 모든 걸 바꿨어.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따라가도록 만들었지."
남자의 말에 시즈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방식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의 의지를 꺾는 것은 저희가 절대로 넘지 않는 선이에요."
시즈의 말에 남자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날 겪으신 일은 분명히 진실이겠지요. 하지만 그 여인이 정말 무녀였다면, 어째서 여명의 가르침에 어긋난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끌었을까요?"
그 말에 남자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하지만 이내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빛은 다시 증오에 잠겼다.
"저는 그 여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실된 무녀였다면, 당신이 이렇게 절규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거예요."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시즈는 조용히 숨을 내쉰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풀어드리겠습니다."
"무녀님!"
아로스가 외치듯 나섰다. 목소리에는 당황과 반대가 한데 얽혀 있었다.
"그는 아직 무녀님을 위협할 수 있는 자입니다. 지금 풀어준다면—"
"저분을 풀어주세요."
시즈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굳은 의지가 담긴 감정은 조용했으며, 그 모습에 아로스는 잠시 주춤했다. 납득하지 못한 기색이 분명했지만, 그는 결국 입술을 깨물고 조심스럽게 남자의 포박을 풀었다.
포박이 풀린 순간, 남자는 맹수처럼 몸을 일으키더니 곧바로 옆에 놓여 있던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눈동자에는 번개처럼 서늘한 분노가 번뜩였고, 남자는 단숨에 검을 뽑아 들어 시즈에게 칼끝을 겨눴다. 날카로운 칼날이 어둠을 가르며 그녀의 목전으로 파고들자 아로스의 검도 번개처럼 빛을 그었다. 그는 남자의 목 뒤에 칼끝을 겨눈 채,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녀님의 털 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그대로 네놈의 목을 잘라버릴 것이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것 같나?"
낮고도 깊은 남자의 목소리 안에는 피에 젖은 고요함과 함께, 아직 꺼지지 않은 분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즈는 그 순간에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때 모든 것을 잃고, 절망의 밑바닥에 주저앉았던 기억을 가진 입장의 눈빛으로.
그 시선 앞에서 남자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국 갈라진 호흡과 함께 칼끝을 거두었다. 금속이 땅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그대로 뒤를 돌아 모닥불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모닥불 앞에 자리 잡은 그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도 살아남은 기사의 잔영 같았다. 말은 없었지만 그 안에 깃든 감정의 변화는 누구보다도 뚜렷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파트로곤이다. 멸망한 카노라스의 제2기사단장이었지."
파트로곤은 검은 흙먼지에 절은 손으로 자신의 흉장을 만지작거렸다. 첨탑 문양은 닳고 벗겨졌지만, 그 위에 남은 청록빛 잔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시즈의 시선이 그 흉장에 머물렀다.
"그 문양을 지닌 분을 이전에도 뵌 적이 있습니다. 혹시... 다이크라는 분을 아시나요?"
"다이크...? 다이크라고??"
시즈의 질문에 파트로곤의 눈빛이 놀라움과 당황으로 흔들렸다. 무언가 마음 깊은 곳에서 건드려진 듯, 떨림과 동요가 그의 얼굴을 스쳤다.
"카노라스의 제1기사단장 다이크를 말하는 건가? 내 오랜 친구이자 전우다. 그를 만났던 적이 있는 건가? 지금 어디에 있지?"
"시스테나 전선에서... 마지막까지 파도의 악마들과 싸우다 전사하셨습니다."
시즈의 대답에 또 한 번 긴 침묵이 흘렀다. 파트로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릎 위에 놓인 그의 손이 느릿하게 떨렸다.
"...그 친구 답군. 언제나 맡은 바의 책임을 다하던 친구였는데......"
파트로곤은 고개를 떨구었다. 불빛이 깃든 흉장을 연거푸 만지작거리며 낮게 말했다.
"난 다이크와 함께 남은 병력들을 이끌어야 했지만... 병약한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어."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마침내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병사도, 전우도, 가족도 모두 지키지 못했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모닥불만이 조용히 타오를 뿐이었다. 시즈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그 불빛을 함께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키지 못했다는 말... 저도 잘 알아요. 마음 깊은 곳까지 새겨지는 감정이죠.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상처처럼 남아있으니까요."
시즈의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아주 조용한 공감이었다. 감정을 어루만지기보다는 상처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진심이 깃든 음성이었다. 파트로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고,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주먹을 쥔 채 다시금 굳어졌다. 시즈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여쭤볼게요. 가족 분들이... 언제, 어디서 사라졌나요?"
조용한 질문에 파트로곤은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모닥불의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일렁였다. 오래 억눌러 왔던 말이 목 안에서 엉켜 있다가, 마침내 낮게 흘러나왔다.
"...반년 전이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협곡에서 아주 가까운 장소였지."
그는 기억을 더듬듯 눈을 가늘게 떴다.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하나하나의 단어는 또렷했다.
"당시, 난 아내와 딸을 비롯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불가피하게 이곳 에리스 협곡으로 들어왔어.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족한 식량을 찾으러 다니던 와중이었는데, 이 협곡은 오래전부터 비룡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함부로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지. 그래서 어느 작은 동굴에 임시 거처를 만든 뒤 동료 둘과 함께 정찰을 나갔었다."
파트로곤은 검은 흙이 말라붙은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손가락이 조용히 떨렸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동굴에는 아무도 없었어. 주변에 남아 있던 자취를 따라가니 수십 명의 발자국 나있었고, 한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지. 마치 누군가의 인도 아래 줄을 지어 이동한 것 같았어.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무녀가 있었다."
시즈가 고개를 떨구자, 파트로곤은 쓴웃음을 지었다.
"소리를 지르면서 뒤를 쫓았지만 가족과 사람들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 그들이 사라져 가는 길에서 용의 형상을 닮은 짐승들을 맞닥뜨렸다. 그때부터 더는 따라갈 수 없었어. 함께 있던 동료 둘은 놈들에게 사지를 찢겼고... 나 혼자 살아남았다."
파트로곤의 말은 마치 쇠붙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모든 걸 잃은 자의 회한, 스스로에게조차 설명할 길 없는 죄책감이 묻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매일 밤 이 협곡이 선명히 떠올랐고... 기억 속에서 무녀의 모습만이 계속 반복됐지. 웃으면서, 신의 뜻이라 말하면서 말이야."
말을 마친 파트로곤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불빛이 잦아들고, 불똥 하나가 튀어 오르다 금세 식어 꺼졌다. 잠시 후 무릎을 짚고 천천히 일어선 그의 모습에는 이전의 광기 대신, 오래된 습관처럼 몸에 밴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당신들이 오기 전까지, 나는 이곳에서 그 짐승들을 잡기 위해 덫을 만들고 있었어."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협곡의 절벽은 여전히 침묵 속에 잠겨 있었고, 어둠은 말없이 이들의 대화를 감싸고 있었다.
"가족과 일행들이 사라진 직후 놈들을 마주쳤을 때는... 그저 우연히 나타난 비룡인 줄 알았지. 당신들도 봤겠지만 놈들은 비룡이 아니야. 피부에는 깃털이 아닌 비늘이 돋아나 있었고, 심지어 지성까지 가지고 있어 말도 했어. 그 무녀가 사람들을 이끌고 사라진 동시에 놈들이 나타난 것을 생각하면 절대로 우연일 리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