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의 요람
"그렇다면... 아까 저희가 협곡으로 들어오면서 본... 그 짐승의 시체도..."
"그놈은 며칠 전 내가 덫을 조절하다가 실수로 죽인 놈이다. 원래는 잡아서 심문하려 했는데 덫의 압력이 과했지. 시체를 치우지 않은 것도 일부러 그런 것이다. 놈들이 동족의 냄새를 맡고 따라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어. 오늘도 여느 때처럼, 또 다른 놈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파트로곤은 시즈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방금까지의 격한 감정과는 다른, 깊은 자책의 그늘이 스쳐갔다.
"그때 당신이 나타났지. 처음에는... 진짜 그 무녀가 돌아온 줄 알아서 눈이 돌아버렸어."
그의 시선이 다시 불길 속으로 내려앉았다.
"당신의 눈빛, 말투, 조용한 걸음까지... 너무도 닮았더군.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과 거의 똑같이 말이야. 마치... 악몽이 현실로 덮쳐온 것처럼."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아로스가 파트로곤의 말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우리를 공격한 건... 그 무녀가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해서?"
"핑계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했지."
파트로곤은 시즈와 눈을 마주친 채 덧붙였다.
"아무튼, 사람들을 데려간 직후 정확히 같은 장소에 용을 닮은 짐승들이 나타나 동료들을 죽였다. 그건... 어떤 신호였을지도 몰라. 놈들은 분명 한통속임이 틀림없어."
시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에는 알 수 없는 긴장과 미세한 떨림이 스쳐갔다. 과거에 마주했던 공포가 머릿속에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피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모닥불의 마지막 불씨가 바람에 흔들리는 사이, 그녀의 시선은 야영지 너머의 어둠 속에 놓인 무언가를 향하고 있었다.
"...시체를 보러 가시려는 겁니까?"
아로스의 낮은 물음에도 시즈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천천히 일어나 걸음을 옮기자 파트로곤과 아로스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달빛이 닿지 않는 협곡의 그늘 속, 날개가 부러진 채 죽어 있던 짐승의 시체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바닥은 피와 검붉은 점액으로 눅눅히 젖어 있었으며, 죽은 사체의 몸에서 풍겨오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면서 퍼지고 있었다. 시즈는 그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 가슴께가 조여드는 느낌과 함께, 오래전 자신을 덮쳤던 광경이 다시금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거대한 형체들이 하늘을 뒤덮던 그날, 사람들의 비명이 눈앞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아냐, 괜찮을 거야.'
눈을 감고 짧게 숨을 고른 시즈는 부서져 뒤틀린 짐승의 머리 위로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순간, 차디찬 고요가 손끝을 타고 퍼졌다. 마치 잔잔한 물결이 뒤틀린 차원의 틈을 건드리는 듯, 의식의 표면이 일그러지면서 시즈의 눈앞으로 짧고 강렬한 환영이 흘렀다.
검붉은 날개의 진동, 미세하게 남아있는 이능의 기운, 그리고 음습한 협곡 너머에서 밀려오는 무언가의 향기. 습한 흙냄새와 뒤섞인 짐승의 체취 사이로 지독하게 깔린 비릿한 피의 향이 느껴지자 시즈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 시체... 어느 방향에서 날아왔는지 알 것 같아요.”
손가락이 어둠 너머의 좁은 협곡을 가리켰다.
"저기 북서쪽의 피비린내가 굉장히 짙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얼추 맞는 것 같군. 그날 놈들이 날아온 방향과 같아."
시즈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협곡의 길을 바라보았다. 경사가 급하고 바위들이 엉켜 있는 지형은 말을 타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도 비좁아 보였다.
"...걸어서 가야겠어요."
그녀는 야영지 쪽으로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말들은 이곳에 두고, 대신... 보이지 않게 감춰야겠네요."
아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들의 고삐를 잡았다. 시즈가 손을 들어 조용히 주문을 속삭이자, 공기 중의 빛이 어긋나듯 일그러지면서 말들이 서있는 자리가 부드러운 안개에 휘감긴 듯 흐려졌다. 이능은 짧은 기척만 남긴 채 공간을 감싸면서 말들의 형체를 주변과 하나로 녹였고, 시즈는 레클레스와 다리아의 머리에 이마를 맞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걱정 마. 금방 돌아올 거야."
레클레스와 다리아는 시즈의 손길을 부드럽게 받아낸 뒤, 그 자리에서 조용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마치 개의치 말고 다녀오라는 그 모습에 시즈는 작게 미소 지었다.
"이제 괜찮아요. 웬만한 눈으로는 찾기 힘들 거예요."
협곡의 끝을 향해 고개를 든 시즈의 눈앞으로는 아직도 어둠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가 비릿한 냄새가 가장 진하게 흘러드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아로스와 파트로곤도 그 뒤를 따랐다.
좁고 축축한 협곡 사이, 날이 선 바위틈을 따라 바람이 밀려들었다. 그 바람은 어딘가 비늘과 피의 잔향을 머금고 있었다. 갈라진 암반 위로 짐승의 발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바닥의 모래밭 위로는 부드럽게 눌린 발자국이 겹겹이 얽혀 있었다. 그 모든 흔적은 하나같이 북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짙게 가라앉은 피비린내와 맞물려 움직인 무리의 방향은 단 한 곳이었다. 냄새와 발자국, 그리고 기운의 자취가 모두 같은 틈바구니로 향해 있었던 것이다.
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긴장은 숨결처럼 조용히 피부에 들러붙었다. 협곡은 마치 오래된 생물의 내장처럼 음습하고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바람이 땀과 피냄새를 실은 채 어둠을 파고들었고, 그 바람이 세 사람의 등줄기를 따라 내려앉을 때마다 불길한 예감이 살을 훑듯 지나갔다.
동굴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벽면을 따라 얽힌 비늘에서는 비린내가 풍겼고, 그 실루엣 너머로는 껍질 속에 잠든 수많은 생명들의 미세한 박동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의 중앙에 홀로 서 있던 가르바의 붕대 아래로 용의 기운이 천천히 일렁였다.
붉은 뇌격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내면은 매 순간마다 분노의 불씨를 삼키는 중이었다. 자신을 주교라 소개한 남자는 말끝마다 고귀함을 입에 올렸다. 한때 무녀였던 자신을 '쓸모를 다한 그릇'으로 치부했고, 그 더러운 시선으로 과거를 훑었다. 오베디안의 조롱으로 모자라 이교도의 수장 따위가 자신에게 수치심을 안겼다는 사실이 가르바의 가슴을 깊고 거칠게 저며 들었다.
하지만 군단을 더 모으라는 명을 이행하기 위해 가르바는 광장의 혼란 이후 곧바로 이곳으로 돌아와 의식을 준비했다. 사브라트는 비디아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섣불리 신뢰하지 않았다. 가르바에게 내려진 추가 군단 창조의 지시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계산이었고, 그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복종의 탈을 쓴 채 감정을 억눌렀다.
가르바는 동굴의 깊숙한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피비린내가 짙게 깔린 그곳은 산란실이라 불리는, 부화가 임박한 알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희미한 푸른빛을 띤 껍질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 틈 사이로 갓 깨어난 유생들이 꿈틀대며 기어 다녔고, 날카롭고 습한 울음소리가 낮게 깔린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산란실 한쪽에는 여인들이 쓰러져 있었다. 바닥에 웅크린 채 짐승처럼 몸을 말고 누운 그들의 모습은 생명이 빠져나가는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라붙은 팔다리와 갈라진 입술, 잿빛으로 바랜 피부는 이미 회복 불능의 육체를 드러내고 있었고, 가늘게 흔들리는 숨결조차 희미했다. 수년간 혹사당한 여인들 대부분은 알을 품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새로운 노예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에 이른 부화를 강행해야 하는 상황은 가르바의 오만한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다. 이미 겪었던 굴욕들이 쓰디쓴 기억처럼 되살아났다. 실패는 곧 무가치함의 증명이자 힘없는 자의 말로였다. 지금은 비록 사브라트의 의지를 따르는 도구 신세지만, 그녀는 이빨을 갈며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뒤엎을 힘을 손에 넣을 것이라 다짐했다. 자신을 업신여기고 멸시했던 모든 자들을 발아래 무릎 꿇릴 그날을 위해서라면... 오늘의 치욕은 수만 번이라도 견디리라.
'나는 여기서 꺾이지 않아. 언젠가... 반드시 나를 업신여긴 것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
붕대 아래로 다시 붉은 벼락의 기운이 일렁였다. 내면에서 치밀어 오르는 고열은 굴복을 가장한 순응 속에서도 조용히 울부짖고 있었다.
그때, 문득 가르바의 시선이 그들 중 한 명에 멈췄다. 로엔나라는 이름의 여인은, 유일하게 용인의 알들을 품고 있는 마지막 노예였다. 쇠사슬에 두 손목이 묶인 채 벽에 기대 무릎을 꿇고 있었고, 땀과 핏자국으로 뒤덮인 피부는 다른 여인들과 달리 아직 미약한 생기가 남아 있었다. 닳아버린 얼굴선 어딘가에는 단정하고 조용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을 것만 같은 기색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눈은 이미 초점을 잃어 흐릿하게 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라진 입술에서는 마른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그녀의 배는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었다. 얇게 늘어난 피부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반투명하게 비쳐 보였고, 그 안에서 여러 개의 생명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꿈틀거리는 형상이 역겹게 들여다보였다. 뱃속의 움직임은 육체적으로도 끔찍했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은 그 움직임을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의지를 다해 혀를 깨물으려 해도 가르바가 걸어둔 주문에 가로막혀 몸은 차가운 벽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죽음을 선택할 자유조차 빼앗긴 로엔나는 끊임없이 자신을 갉아먹는 감각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좌절과 절망, 침묵 속에 쌓여가는 무력감은 오롯이 홀로의 몫이었다.
로엔나는 자신의 손목에 남은 옅은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붙잡았던 흔적이었다. 거동이 불편했던 어머니는 산란실에 끌려온 지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고, 곧바로 차가운 동굴바닥에 버려져 유생들의 먹잇감이 되면서 마지막 존엄성까지 빼앗겼다. 그 장면은 로엔나의 기억 속에서 단 한순간도 지워진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죽고 난 뒤, 자신을 바라보던 가르바의 목소리가 또렷이 되살아났다.
넌 네 몫을 다해야 하지 않겠니?
그 목소리는 로엔나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자존감마저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때, 가르바가 알들 사이를 거닐며 로엔나를 향해 다가왔다. 붕대 아래로 그려지는 표정에는 기이한 만족감이 서려 있었으며, 다가오는 한 걸음마다 무겁게 가라앉은 현실을 떨치려는 뒤틀린 집념이 스며 있었다. 익숙한 손끝이 로엔나의 턱을 감싸 들자 억지로 맞닿은 감각 너머로 살아 숨 쉬는 울림이 상상되었고, 가르바는 그 순간을 음미하듯 미소 지었다. 산란실은 그녀에게 있어서 고통의 무대이자 작고 축축한 심장들이 빚는 음률을 즐기는 기형의 안식처였다.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다, 로엔나. 그동안 네 몸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참으로 훌륭했지만...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란다."
목소리는 놀랄 만큼 다정했지만 말끝마다 서늘한 살기가 스며 있었다. 로엔나의 목울대에서 새어 나온 것은 메마른 숨뿐이었다. 가늘게 떨리는 눈빛에 실린 그 간절함마저도 가르바는 흘려보내듯 조용히 웃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로엔나의 부풀어 오른 배 위에 얹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반투명한 살갗 아래서 무언가가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살아 있는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자 가르바는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너도 알잖니? 네 몸이 얼마나 훌륭히 일을 해냈는지. 이 산란실에서 너만큼 완벽히 역할을 수행한 사람은 없단다. 이 동굴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수많은 기적이... 네 안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믿겨지니?"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화상자국으로 가득한 긴 손끝으로 복부를 부드럽게 누르며 다시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서둘러야겠어. 네 몸이 그토록 많은 걸 감당해 냈는데 더 못할 이유는 없잖니? 그러니 주기를 더 당겨보자꾸나. 수를 늘리고, 속도를 높이고... 더 많은 아이들이 조금 더 빨리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네가 얼마나 잘해왔는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아니까 말이야."
로엔나의 배를 내려다본 가르바는 천천히 곁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얼굴을 복부 가까이 들이댔다. 피부 아래로 전해지는 알들은 작은 심장을 지닌 생명체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멈춘 채 귀를 기울였고, 입가엔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들리는구나... 제각각으로 뛰는 생명의 심장박동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인지."
로엔나는 미약하게 고개를 저으며 간신히 말했다.
"...제발, 그만... 그만둬......"
그러나 가르바는 대꾸하지 않았다. 손끝으로 살결을 천천히 더듬고 누를 때마다 피부 아래에서 알들이 반응하듯 꿈틀거렸고, 그녀는 크기와 위치를 가늠하듯이 세심하게 짚어 내려갔다. 손이 배의 옆쪽으로 옮겨질 즈음 더 작고 부드러운 움직임이 손바닥에 닿았다. 도망치려는 듯 미세하게 미끄러지는 감촉에 가르바는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아직 너무 작아. 자극이 필요하겠어."
가르바는 왼손을 로엔나의 아랫배에 밀착시키며 낮게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붉은 기운이 번지듯 퍼져 나오더니 살아있는 벌레처럼 살갗을 파고들어 자궁 안쪽으로 기어 들어가는 끔찍한 감각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