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 아래의 비극 (7)

끔찍한 재회

by 이샤라

시즈의 외침에 두 남자는 지체하지 않았다. 아로스가 먼저 그녀의 앞에 서서 보호하듯 이끌었고, 파트로곤은 마지막까지 뒤를 막으며 쇄도하는 괴물들을 떨쳐냈다.


세 사람은 바위 아래의 틈으로 몸을 던졌다. 바위틈은 생각보다 훨씬 깊었고, 습기 어린 공기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바깥의 울음소리가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아로스가 바위덩이를 밀어 입구를 막기 시작하자, 시즈와 파트로곤도 함께 돌과 흙을 끌어다 메웠다. 그 틈으로 괴물 하나가 집요하게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아로스의 검끝이 무자비하게 놈의 눈을 꿰뚫었다.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오면서 마지막 바위틈이 메워지는 동시에 외부의 괴성과 휘몰아치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인 순간,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적막 속에서 아로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환시의 등불이었다. 등불의 청록빛 잔불이 천천히 일렁이며 동굴 안을 밝혀나가자 파트로곤은 그 빛에 눈을 가늘게 떴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전, 대륙의 중심에서 세상을 밝혔던 멸망 전 카노라스의 하늘 위로 세워진 탑의 모습이 떠올랐다. 꼭대기에서 청명하게 타오르며 빛났던 엘나의 광명을 닮은 청록빛이 동굴의 벽을 타고 흐르자 그리운 과거의 무늬가 어렴풋이 겹쳐졌다.


시즈는 등을 돌려 어둠으로 뒤덮인 곳을 바라보았다. 등불빛이 그녀의 뺨을 스치자, 눈동자에 남아 있던 푸른 잔광이 무언가를 감지한 듯 다시금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동굴... 아까 그 시체의 기류와 이어지고 있어요."


말끝에 실린 감각은 단호했다. 손끝에 남아 있는 전류처럼 어둠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면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공기 속에 엉켜 흐르는 피비린내와 바닥 밑을 타고 흐르던 감각이 다시 피부를 따라 스며들었다.


아로스는 등불을 조용히 시즈에게 건넸다. 청록빛 잔불이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흐르듯 그녀의 손끝으로 옮겨지자 시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서자, 그 뒤로 아로스와 파트로곤은 조용히 뒤따라갔다.


희미한 등불빛이 벽을 타고 스쳐 지나가면서 어둠은 서서히 퇴각하며 동굴의 내면을 드러냈다. 불규칙하게 뻗은 종유석과 석주, 눅눅하게 젖은 이끼로 가득한 동굴의 발밑에는 오래도록 고여 있던 수분이 스며 있었고, 벽면은 물과 어둠에 닳은 채 조용히 침식되고 있었다. 누구의 발길도, 손길도 닿은 적 없는 듯했다. 그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를 침묵 속에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무음처럼, 소리조차 섣불리 스며들지 못하는 기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 정적 속을 걷던 파트로곤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내쉬던 호흡이 허공에서 잠시 멎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바람 같은 감정이 불쑥 일렁였다.


'이 길 끝에......'


언제부턴가 잊고 있었던 하나의 희망. 살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바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어둠의 끝에 도달한다면... 그 손길, 그 목소리를 다시 마주할 수 있을지도.


깊은 동굴의 음영 아래, 가르바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공기는 흙먼지와 비린내가 섞여 있었고, 천천히 갈라지는 감각은 동굴 너머로 퍼져 나갔다. 가르바의 정신은 산란실 바깥으로 날아간 유생들의 시야에 맞물리며 서서히 움직임을 포착해가고 있었다.


붕대 뒤로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수십 마리의 유생들이 차례차례 도륙 나고 있었다. 불완전한 의식들 속에서 윤곽이 점차 또렷해졌고, 그 틈으로 침입자들 중 하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반년 전, 협곡에서 정신을 끌어모으던 가르바를 향해 무모하게 달려들었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는 쥐새끼처럼 협곡에 숨어들어 통제에서 벗어난 유생들을 몰래 사냥하곤 했지만, 혼자였기에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남자는 처음 보는 이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특히, 그와 함께 유생을 도륙내고 있는 기사 하나는 눈에 띄게 강했다. 성인 남성보다 몇 배는 무거운 유생의 몸통을 정면으로 받아낸 뒤 턱을 단숨에 꺾는 동작은 절대 인간의 힘이 아니었으며, 주위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기운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무형의 틈새를 비집고 흐르는 그 위력은 이 공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가르바의 심장을 뛰게 만든 것은 기사의 뒤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검은 예복과 왼쪽 눈을 가린 가면의 모습에 가르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녀.


그 순간, 그녀의 이능이 터져 나왔다. 위력은 거칠고 조율되지 않았지만, 가르바는 이능에 깃든 기운을 놓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이 힘은... 설마?"


아텐시아. 그 힘은 고룡의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감각의 깊은 층에서 바로 가르바의 내면을 파고들었다. 강렬한 마력의 깊이는 자신이 받았던 축복은 물론이고, 사브라트가 준 권능조차도 넘어설 만큼의 질량이었다. 오베디안도, 주교도, 심지어 사브라트마저도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모를 정도였다.


패배자처럼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수틀리면 창은의 강을 다시 한번 습격할 생각마저도 있었지만, 무녀의 힘을 보니 그럴 이유가 전부 사라져 버렸다.


가르바는 천천히 손을 들어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무녀여... 넌 내게 가장 완벽한 기회야. 이 기회를 통해 사브라트를 넘어 진정한 협곡의 지배자가 될 수 있을 거야. 너의 힘은 단순한 축복이 아냐. 내가 닿을 수 없었던 경지로 이끄는 열쇠지. 이제는 그 위를 바라볼 때가 왔어. 나를 업신여기던 버러지들을 내 손안에 두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것이다!"


목소리가 동굴 전체에 메아리치자, 그 안에 실린 감정이 파문처럼 퍼지면서 유생들의 살기가 천천히 들썩이기 시작했다. 가르바는 무녀와 기사, 그리고 반년 전에 놓쳤던 남자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유생을 피해 좁은 틈으로 몸을 숨겼고, 놀랍게도 그 틈은 산란실과 이어진 동굴과 연결된 곳이었다. 그 광경 속에서 가르바는 잠깐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무녀와 기사를 따라 들어간 남자의 시선. 반년 전, 그 애처로운 시선이 누구를 향했는지 또렷이 기억했다.


절름발이 여자, 그리고 아직까지도 산란실에서 죽지 않고 남아 있는 로엔나. 그 둘이 가족임을 직감한 가르바의 입가에서 형언하기 힘든 잔혹한 미소가 번졌다.


"...눈물겨운 재회가 되겠군."


무녀를 사로잡고, 남자가 로엔나를 본 순간의 절망을 상상을 곱씹는 표정에는 냉혹함과 전율이 동시에 스며 있었다. 가르바의 웃음소리가 동굴 속을 울리자, 그 웃음에 동조하듯 유생들의 포효가 함께 울려 퍼졌다.


세 사람은 말없이 동굴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땅 밑의 공기는 바깥보다도 더 썩어 있었고, 뼈인지 시체인지 분간조차 안 되는 덩어리들이 벽면에 엉겨 붙어 습기와 피비린내를 베어내고 있었다. 청록빛 등불 아래로 동굴의 토착 생물들이 기척에 놀라 물속으로 뛰어들 때마다 찬기운이 손끝을 타고 스며들었다.


조용히 앞장서던 시즈가 걸음을 늦추더니, 문득 파트로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족분들이 사라지기 전에는... 어떻게 살아오셨나요?"


대답 대신 파트로곤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과거를 더듬는 듯한 눈빛에는 피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고룡이 서쪽으로 가는 길을 끊은 이후, 나는 생존자들을 모아 쿠베르 교역소를 중심으로 버텼다. 물자도 있었고, 방어선도 있었지. 파도의 악마들 상대로 어떻게든 버티긴 했지만... 여전히 욕심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 있었어. 그렇게 8년째 되던 날, 나와 의견이 자주 충돌하던 교역소장이 무리를 이끌고 무기고를 점령했어. 어떻게든 타협하려 했지만... 놈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아 협박했지. 내 아내와 딸도 포함돼 있었지."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파트로곤의 표정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결국 나를 따라나서겠다는 소수의 사람들만을 이끌고 교역소를 떠났고, 어떻게든 생존했지.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모르겠더군. 지독한 파도의 악마들과 상대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말이야."


쓴웃음을 지은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떠도는 삶은 지독하리만치 고단했어. 가진 것을 노리는 자들,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이단자들... 그러다 결국 이 에리스 협곡까지 밀려왔지."


파트로곤의 시선이 흐릿해진 채 허공을 응시했다. 어둠에 깃든 눈빛에는 여전히 꺼지지 않는 감정이 남아 있었다.


"우리 딸이 당신과 비슷한 나이일 텐데."


그 말에 시즈는 조용히 눈을 피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따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로엔나."


짧은 대답과 함께 파트로곤의 입가에 슬픔과 미소가 동시에 그려졌다.


"어릴 적부터 피난만 다녀서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에 응석 한번 제대로 못 부렸지. 게다가 아내는 오래전부터 다리를 제대로 못 써서 걷지도 못했는데, 그 애는 엄마가 아픈 것에 대해 짜증 한번 낸 적도 없었어."


시즈는 말없이 그의 곁으로 조금 더 다가섰다. 파트로곤의 목소리는 굵고 거칠었지만, 그 안에는 단단히 누르고 눌러온 감정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먹을 게 없다고 투정하지 않았고, 웃을 일이 없어도 웃어줬어. 제 어미가 아파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는 작은 손으로 허리와 무릎을 주물러줬지. 그런 애였어. 아주 의젓하고... 예쁘게 자라줬어."


"정말 어른스러웠군요."


"그래...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지......"


대화가 오가는 사이, 동굴은 더욱 깊어졌다. 미끄러운 이끼는 점점 더 벽을 뒤덮었고, 천장은 뭔가가 날아와 부딪힌 듯 곳곳이 파여 있었다.


그때, 시즈가 걸음을 멈추고 등불을 높이 들었다. 아로스 또한 칼집에 손을 올렸다. 금방이라도 뽑을 기세를 보이는 그 모습에 파트로곤도 검을 단단히 쥐었다.


"...무녀님도 느껴지십니까?"


아로스의 말에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동굴에 들어왔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악취가 밀려왔고, 감각은 더욱 불쾌하고 곤두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야가 탁 트였다. 앞쪽에 넓은 공간이 드러나자, 시즈는 손을 들어 조용히 신호를 보냈다.


"......뭔가 엄청나게 많아요."


세 사람의 눈앞으로 이질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바닥에는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알들이 가득했고, 반투명한 껍질 내부에서는 무언가 꿈틀거리는 형체가 비쳤다. 축축한 점액질이 뚝뚝 흘러내리고, 탁한 액체가 고여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악몽의 한 장면 같았다.


"이건...!"


"놈들의 알인 것 같습니다."


아로스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혐오와 분노, 그리고 그에 섞인 절망의 기척이 한 줄기 숨결처럼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타닥—


축축한 소리가 나면서 첫 알껍질이 갈라졌고, 이어진 건 일련의 연쇄였다. 깨지고, 튀어나오고, 울부짖었다. 갓 태어난 유생들은 반쯤 닫힌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며 끈적하고 미숙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얇은 비늘 위로 점액이 흘러내렸고, 조막만 한 날개는 제대로 펼쳐지지도 않은 채 몸통에 들러붙어 있었다. 비틀거리며 나오는 반인반룡의 형체들이 본능적으로 벽을 기어오르자 탁한 울음이 동굴 전체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끔찍한 장면이 뒤따랐다.


동굴 벽면의 그림자 속에 여인들이 쓰러져 있었다. 대부분은 이미 숨이 끊긴 듯한 모습이었고,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난 그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찢긴 옷자락과 짓뭉개진 사지, 창백하게 갈라진 입술과 초점을 잃은 눈동자.


시즈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눈동자가 떨리고, 가면의 안광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를 악문 채 주변을 살피던 아로스의 검은 반사적으로 절반쯤 빠져나와 있었다.


"......이곳에서 뭔가,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트로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선은 한 여인에게 고정됐다. 다른 시신들과 달리 아직 희미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었지만 그 모습은 처참했다.


양 손목은 녹슨 사슬에 묶인 채 축 늘어져 있었고, 무기력하게 고개가 떨어진 몸은 힘을 잃은 인형처럼 구겨져 있었다. 기형적으로 부푼 배, 흉터로 뒤덮인 허벅지와 팔뚝, 그리고 마치 감정이 봉인된 듯 공허하게 떠 있는 눈동자. 얼굴은 상처투성이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바래진 살결이 드러났다. 마른 피와 눈물 자국이 섞여 굳은 채, 그녀의 얼굴을 얼룩지게 감쌌다.


파트로곤의 눈이 흔들렸다. 표정이 일그러진 그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숨이 가슴께에서 멎었고, 한쪽 무릎이 휘청거렸다.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 시야를 가르고 들어오자 가슴께가 무너져 내린 듯한 호흡과 함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피와 먼지 속에서 겨우 드러났음에도 너무나 낯익은 이목구비. 처참한 모습의 여인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피를 나눈 사랑하는 딸이었다.


"......로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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