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 아래의 비극 (8)

저울질

by 이샤라

목소리는 거의 외마디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파트로곤은 본능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로엔나에게 다가갈수록 발걸음은 무거워졌고, 허공을 짓누르던 감정의 무게에 걸음은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았다. 마침내 그 앞에 다다른 순간, 두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으로 딸의 얼굴을 더듬었다.


"......로엔나, 나다. 아버지... 아버지가 왔다."


의식을 잃은 로엔나의 눈동자는 텅 빈 허공을 향한 채 흔들림 하나 없었다. 미동도, 감정도, 아무 말도 없는 모습에 파트로곤은 숨이 끊어질 듯이 목울대가 치솟았다.


"로엔나! 눈 좀 떠보렴! 내가 왔다! 이제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떨리는 두 눈은 사슬에 묶인 손목으로 향했다. 파트로곤은 광기에 가까운 절박함으로 미친 듯이 쇠고랑을 잡아당겼지만 굳은 피가 말라붙은 족쇄는 아무리 힘을 줘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공기가 변했다. 한기처럼 피부를 파고드는 살기가 세 사람이 들어온 틈 왼편의 거대한 입구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시즈가 들어 올린 등불의 청록빛 불꽃이 어둠의 농도를 얕게 벗기자 낯익은 형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굴 밖 협곡의 길목에서 덮쳐왔던 흉측한 괴물들이었다. 그 숨 막히는 대치 속에서, 놈들 사이로 또 다른 실루엣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기운이 스치듯 어른거리는 백발, 피로 번진 듯한 웃음기와 기묘하게 일그러진 입꼬리. 여기저기 불에 그을린 자국이 역력한 검은 로브는 아우로라의 무녀가 입던 예복이었음을 보여주는 문양이 누더기처럼 너덜거리고 있었다. 눈은 붕대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광기는 공간을 불쾌한 기운으로 물들였다.


가르바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정말이지, 눈물겨운 재회로군."


조롱과 기쁨이 뒤섞인 노래처럼 부드러운 음색에는 생명을 희롱하는 자의 경멸이 깊이 배어 있었다. 그 표독스러운 표정에 파트로곤의 뇌리로 형언할 수 없는 격정이 치솟았다. 그가 어깨를 떨며 이를 악물고 노려보자, 가르바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면서 입가에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쥐새끼처럼 겨우겨우 목숨만 부지한 끝에 도착한 곳이 이 자리일 줄은 몰랐겠지. 오래 기다린 발걸음이 이토록 잔인한 선물로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어."


시즈는 참혹한 광경과 대비되는 가르바의 표독스러운 표정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또한, 협곡을 가로질러 흐르던 이능의 잔향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당신이... 이 모든 짓을 꾸민 건가요?"


목소리에는 분노와 경멸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가르바는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듯, 시선을 산란실 구석에 쓰러져 있는 여인들에 멈추며 입꼬리를 말았다.


"꾸민다니? 그리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데. 난 그저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낸 것뿐이야. 저 여자들은 과정속에서 필요했던 도구였고, 이제는 제 기능을 다한 것뿐이지."


가르바의 시선이 주검들을 지나쳐 쇠사슬에 묶인 채 기절해 있는 로엔나에게로 향했다. 파트로곤이 로엔나를 부여잡고 있는 것을 본 가르바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튕겼고, 그 소리와 함께 로엔나의 복부에서 붉은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부풀어 오른 복부 안쪽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지자 고통에 일그러진 비명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이 동굴을 가득 채웠다. 그 절규는 짐승의 울음보다 더 뼈를 저미게 했고, 파트로곤의 떨리는 입술 끝에서는 간절한 애원이 터져 나왔다.


"제발! 제발 그만둬!! 제발...! 부탁이다...!"


핏발 선 눈을 감고 파트로곤은 두 팔로 로엔나를 감싼 채 떨리는 몸을 숙였다. 극심한 고통에 짓눌린 로엔나는 비명을 길게 내지르지도, 숨 마저 몰아쉬지 못하며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더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딸의 심장이 가늘고도 불안하게 맥박치고 있자 그는 결국 자존심을 버렸다.


"제발... 내 딸만은 살려줘... 네가 원하는 게 뭐든... 내가......!"


파트로곤의 처참한 목소리에 가르바는 순간 시선을 멈추더니, 이내 흥미를 느낀 듯 입가를 비틀었다.


"...절뚝거리던 년이 떠오르네."


그 말에, 파트로곤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 여자도 너처럼 딸을 감쌌지. 자식 하나 지키겠다고 성치 않은 몸으로 나서더니 보름도 못 버티고 죽어버렸어. 몸뚱이는 새끼들 밥으로 던졌고 말이야."


조롱은 멈추지 않았다. 가르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웃었다. 그 웃음은 냉소도, 연민도 아닌 광기에 빠진 자의 유희에 불과했다.


"역시 가족이라는 건 좋은 도구야. 감정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어."


파트로곤의 눈빛이 바뀌었다. 분노가 다시 들끓었고, 턱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이빨을 악물었으나 딸의 숨결이 자신의 품 안에서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가 모든 몸짓을 제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가르바의 시선이 시즈에게로 향했다.


"딸을 살리고 싶으면, 저 무녀를 내 앞으로 끌고 와. 그럼 저 아이의 고통쯤은... 잠시 멈춰줄 수도 있지."


공기가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다. 절망으로 가득 찬 파트로곤의 고개가 천천히 뒤를 향했다. 그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얼굴로 말없이 시즈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망설임도, 갈등도 없었다. 오로지 극한으로 몰린 선택의 끝자락만이 눈동자에 비쳐 있었다.


"......미안하네."


낮고 쉰 목소리가 겨우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파트로곤은 로엔나를 품에 안은 채 한참을 떨고 있다가, 마침내 두 팔을 조심스레 풀었다. 고통스러운 숨결이 이어지는 딸의 몸을 뒤로 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도,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아... 하지만, 내 딸이... 이 아이가......!"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든 파트로곤은 한 발, 또 한 발 시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눈동자에는 망설임과 자책, 절박함이 엉켜 있었다. 그것은 목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한 사내가 마지막 줄에 매달리는 몸짓이었다.


그때, 아로스가 앞으로 나섰다. 검을 뽑아 들며 앞을 막아선 아로스의 눈매는 싸늘했고,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딴 선택지, 말할 가치도 없어."


낮게 깔린 목소리는 분노로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파트로곤을 향한 것이 아닌 생명을 저울질하는 이 광경 자체에 쏟아붓는 분노였다. 시즈 또한 마력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마력으로 허공이 일그러지듯 흔들리는 순간, 가르바가 비죽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구경이나 해. 네 차례는 멀었으니까!"


그녀의 손끝이 다시 로엔나에게 향하자, 불룩한 배가 요동치며 또다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아아악——!"


살을 에는 듯한 울음이 또 한 번 동굴을 울리자, 시즈는 이를 악문 채 더 큰 고통을 막기 위해 마력을 거두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파트로곤이 검을 움켜쥔 채 튀어나왔다. 절박함에 사로잡힌 그의 눈은 이미 시즈를 향하고 있었다.


"저리 비켜!"


아로스는 순식간에 날아드는 일격을 흘려내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 뒤로도 공격은 망설임 없이 이어졌다.


"내 딸이 죽는 걸, 두 눈 뜨고 보고 있을 수는 없어!"


검 끝이 맞부딪칠 때마다 동굴 안에는 서늘한 쇳소리가 메아리쳤다. 짓밟힌 돌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발소리, 검과 검이 엇갈리는 순간의 짧은 숨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반복해서 충돌했다. 격한 검투를 단번에 끝낼 수 있었음에도 아로스는 수없이 물러섰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 아닌 절규로 몸부림치는 격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파트로곤이 무너진 호흡 속에서 다시 칼을 높이 드는 찰나에 아로스의 몸이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허리를 스치듯 파고들어 검의 손잡이로 옆구리를 가격했고, 뒤이어 손목을 긁는 듯 칼끝으로 무기를 튕겨냈다.


"——큭!"


손에서 튕겨나간 검이 바닥 위를 구르며 찢어지는 소리를 내는 동시에 파트로곤은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아로스는 그를 베지 않았고, 동시에 박수 치는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나쁘지 않은 구경거리였어."


가르바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두운 입구에서 빠져나오는 그 모습이 빛에 흔들리자, 검은 로브는 마치 불길한 형체처럼 일렁였다.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결국 실패했네. 더 이상은 시간 낭비야."


박수를 마친 가르바는 로브 자락 속에서 은처럼 빛나는 가느다란 단검을 꺼냈다. 칼날은 차갑고 얇았으며, 마치 비정한 처형의 도구 같았다. 가르바가 로엔나 쪽으로 다가가자, 시즈는 그 위태로운 낌새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시즈의 물음에 가르바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몸을 낮춘 가르바는 피와 땀으로 젖은 로엔나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그녀의 가슴 위에 시선을 내렸다. 곧이어 한쪽 옷자락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여린 흉곽 너머 심장의 박동이 고통에 쥐어짜이듯 한 숨결로 드러났다.


숨죽인 정적 속에서 가르바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경멸도 동정도 아닌, 오직 조롱과 냉담한 유희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품에 안고 울더니... 결국 네 손으로 지키지도 못하네."


검날이 가슴 위로 살짝 눌리자 핏빛이 천천히 옷감을 적셨다. 가르바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마치 달래듯,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운 동시에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치 귓불 위를 타고 흘러드는 죽음의 예고처럼, 숨소리 하나까지도 무심하고 냉혹했다.


"걱정 마렴. 네 아비의 품보다 더 깊은 곳으로... 아주 천천히 보내줄게."


그 말이 끝나는 동시에, 가르바의 손목이 순식간에 움직였다.


"안돼——!!"


파트로곤의 절규가 허공을 갈라내듯 울려 퍼지는 그 찰나, 날카로운 칼날이 망설임 없이 가슴 중앙을 꿰뚫었다. 로엔나의 몸이 짧게 경련했고, 비명조차 되지 못한 숨이 터져 나왔다. 가르바가 무심하게 단검을 뽑아내자 솟구친 피가 그녀의 손과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복부를 적시면서 서서히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사슬에 묶인 두 손은 마지막 본능처럼 떨리는 힘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떨렸다. 신음인지 숨인지 분간되지 않는 가쁜 호흡은 얇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창백한 얼굴에는 고통과 공포가 겹쳐 있었고, 희미한 의식의 흔적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흔들리는 로엔나의 시선이 위태롭게 파트로곤을 향했다. 힘겹게 깜빡이는 눈빛에 담긴 희미한 의식의 잔해 속에서, 입술은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떨렸다.


"아... 아......"


그러나 끝내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목이 꺾인 인형처럼 힘없이 떨군 고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피투성이가 된 단검을 손등에 쓸어 닦던 가르바가 로엔나를 마치 짐짝처럼 무심하게 밀쳐내자, 쇠사슬에 매달린 그녀의 몸이 둔탁하게 흔들리더니 벽에 늘어진 채 고요히 멈춰 섰다.


가르바는 잠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생명을 잃은 육체에는 더 이상 흥미를 둘 이유가 없다는 듯, 천천히 파트로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희가 이곳에 오지만 않았더라면... 이 아이는 살아 있었을 텐데. 무슨 뜻인지 알겠어? 결국 네 딸을 죽인 건 다름 아닌 너라는 거야."


그 말이 공기 속에 스며들기도 전에, 무거운 정적이 동굴 안을 짓눌렀다. 마치 누군가 숨을 멈춘 듯이 숨소리 하나 허용되지 않는 침묵이었다. 파트로곤의 시선은 여전히 로엔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앞으로 떨어진 고개, 벌어진 가슴, 피에 젖은 뺨. 그의 시선은 서서히 가르바에게로 옮겨졌다. 그 눈에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죄책감과 무력함, 그리고 상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집어삼킨 것은 격노였다. 핏줄을 울리는 뼈의 떨림, 숨조차 삼킬 수 없는 심장의 고동. 그건 인간의 감정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잃은 짐승의 마지막 울음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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