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 아래의 비극 (9)

악의가 베푼 안식

by 이샤라

"...나는 카노라스에서 수천의 전사들을 길러냈다. 광야의 피비린내 속에서 서로를 물고 뜯는 참상을 버텨낸 자들이지.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이런 분노를 안겨준 적은 없었어."


목소리는 낮고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불꽃 그 이상의 맹렬함이 응축되어 있었다.


"애초에 복수 따윈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가족을, 내 딸아이를 온전히 다시 품에 안고 싶었을 뿐인데......!"


붉게 젖은 손이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그 발걸음은 마치 무너진 대지처럼 울렸다.


"나에게 자비를 바라지 마라. 편히 끝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네년의 심장을 씹어 삼킨다 해도... 내 증오는 사그라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가르바는 코웃음을 쳤다.


"심장을 씹어 삼킨다라... 고작 가슴에 구멍 하나 냈다고 감정이 무너지는 꼴을 보니 역시 물러터졌어. 큰소리는 쳤지만 아직 화가 덜 난 모양이지? 죽음으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네 딸은 아직 보여줄게 남아있는 것 같은데."


가르바는 고개를 돌려 한 손으로 로엔나의 배를 가리키고는, 마치 선물을 꺼내려는 사람처럼 몸을 돌렸다. 단검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다가가는 얼굴에는 짙은 흥분이 서려 있었다. 곧이어 식어버린 숨결이 머문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갔고, 그 귓속으로 잔혹한 속삭임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네 뱃속의 생명들에게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게 해 줘야지 않겠니?"


피로 얼룩진 손이 부풀어 오른 복부의 곡선을 쓰다듬었다.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잔인함과 조롱이 기름처럼 번들거렸다. 입술을 열며 내뱉는 목소리도 연민을 가장했을 뿐, 그 밑바닥에는 의도된 모욕이 가득했다. 그제야 시즈는 가르바의 의도를 직감했다.


"멈춰! 당신 지금 뭘 하려는——"


하지만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가르바의 단검이 로엔나의 부풀어 오른 배를 무참히 갈랐기 때문이다. 찢어진 살점 사이로 피와 점액에 뒤덮인 끔찍한 알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가르바는 아무렇지 않게 그 안으로 손을 찔러 넣어 알 하나를 끄집어냈다.


성인이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야 겨우 품을 수 있을 만큼이나 커다란 그것은 붉은 점액으로 뒤덮인 손바닥 위에서 혐오스러울 정도로 미세하게 떨리며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시즈와 아로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때? 이 아이가 품고 있던 생명이야. 반년 동안 수없이 낳아온 씨앗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하지. 네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딸이 마지막으로 남긴... 끔찍한 유산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파트로곤의 이성은 완전히 끊어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


허공을 가르는 절규가 동굴 벽을 울렸다. 그것은 격노도 슬픔도 아닌, 감정이 모두 뒤섞인 절멸의 울부짖음이었다. 일그러진 눈동자에서 피눈물이 쏟아졌고, 파트로곤은 낡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가르바를 향해 맹수처럼 돌진했다.


내딛는 걸음마다 산란실 바닥에 흩어진 유생의 알들은 무참히 짓밟히며 으스러졌다. 미끈한 점액과 피비린내가 튀었고, 터진 껍질 속에서 숨을 쉬던 생명들이 울음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짓뭉개지는 광경에 가르바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조심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구나. 그렇게 짓밟고 다니면 아이들이 다치잖아!"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얄궂은 표독이 배어 있었다. 가르바는 천천히 손을 들어 파트로곤을 가리키며 잔인한 농담을 읊듯 중얼거렸다.


"물어뜯으렴."


가르바의 말에 산란실 곳곳에서 꿈틀대던 유생들이 일제히 몸을 들썩였다. 덜 자란 날개와 바닥에 엎드려 있던 몸이 일제히 일어났고, 휘파람처럼 얇은 울음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의 유생이 한꺼번에 파트로곤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트로곤!"


시즈의 떨리는 외침과 동시에, 아로스가 단숨에 뛰어들었다. 몸을 비틀어 유생 하나를 향해 검을 내리치자, 날개가 거칠게 잘려나가며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그 틈을 비집고 또 다른 유생들이 파트로곤에게 달려들고 있었고, 시즈는 이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보호막을 펼쳤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한 줄기 숨통에 불과했다. 유생들은 멈추지 않았다.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그들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작은 포식자처럼 사나운 본능을 드러냈다. 날개가 튀어 오르고, 이빨과 발톱이 휘둘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 사이로는 미쳐 날뛰는 검이 번개처럼 튀었다.


파트로곤은 앞을 막는 유생들을 거침없이 도륙했다. 외침도, 분노의 언어도 없는 그의 시선에는 오직 가르바만이 있을 뿐이었다. 휘두르는 검격과 함께 튀어 오른 유생의 머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피를 내뿜는 육편이 산란실 바닥 위로 끈적하게 뒹굴었다. 하지만 시즈의 보호막은 점차 희미해졌다. 빛이 깜박였고, 갈라진 틈 사이로 짐승의 이빨이 들어섰다. 결국 방어막이 무너져 내리자 파트로곤은 완전히 노출된 채 사방에서 물어뜯기기 시작했다.


부서진 갑옷 아래로 찢긴 살점과 터진 혈관 사이로 피가 솟구쳤음에도 검을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았다. 유생들이 온몸을 물고 늘어져도 그는 발을 내디뎠다. 절뚝이고 흔들리는 걸음 속에서도 파트로곤의 시선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가르바의 눈앞에 도착했다.


발밑에는 도륙된 유생들의 육편이 마치 육질의 구름처럼 깔려 있었고, 그 위를 지나치는 몸에는 여전히 셀 수 없이 많은 유생들이 매달려 있었다. 팔, 어깨, 다리를 물고 늘어진 그 모습은 마치 시체를 탐하는 구더기 같았다. 온몸이 물어뜯긴 몸에서는 피가 폭우처럼 흘러내리고 있었음에도 파트로곤은 떨리는 팔을 들어 올렸다. 공기를 가르는 칼끝은 더없이 느렸으나 단호했다.


그 순간, 가르바의 오른손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의 명치를 뚫었다.


콰득——


뼈와 살이 갈라지는 소리가 둔탁하게 퍼졌고, 파트로곤의 눈이 커졌다. 가슴이 한 차례 크게 들썩이면서 입가로 핏물이 쏟아졌다. 상처를 안은 채 가르바의 어깨에 턱을 괴듯 몸을 기댄 그 순간까지도 손은 여전히 검을 쥔 채 떨고 있었다. 칼끝은 가늘게 떨리며 가르바를 향해 겨누어져 있었고,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 일격을 내리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런 파트로곤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는 가르바의 입가에는 여느 때와 같은 유려한 미소가 어렸다. 곧이어 왼손으로 그의 등을 감싸듯 끌어안더니, 천천히 토닥이며 속삭였다.


"...어서 가야지. 예쁜 딸이 혼자 기다리고 있잖아."


그 말과 함께, 가르바는 파트로곤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옆으로 밀어냈다. 명치를 관통한 손이 뽑힌 몸은 피를 뿜어내며 무력하게 주저앉았고, 사슬에 묶인 채 고개를 떨군 로엔나의 주검 앞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아버지와 딸.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잔혹한 비극의 말미를 맞았다. 시즈는 그 참혹함에 질식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말은 갈라진 숨 속에서 흘러나왔다. 시선은 가르바를 꿰뚫듯 응시하고 있었고, 목소리에는 씻을 수 없는 경멸이 실려 있었다.


"한때 아우로라의 무녀였던 당신이 어떻게... 어떻게 사람들을 이렇게 잔인하게 조롱하고 짓밟을 수 있어...? 무녀란 이름을 가졌던 자가 생명을 희롱하는 괴물이 되다니... 이건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야!"


시즈의 경멸에도 불구하고 가르바는 표독스럽게 웃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색은 오히려 조롱의 칼날을 숨기기에 더없이 적절했다. 그녀는 여전히 피에 젖은 채 시든 두 부녀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죄악이라... 정의니 구원이니 하는 말들도 곱게 포장된 환상이지. 네가 그렇게 믿고 싶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지만, 아직도 세상이 믿음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고결한 이상 따위로 신도들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마지막 말은 조소 섞인 웃음과 함께 뱉어졌다. 하지만 이내 목소리는 감정의 기복으로 점점 격해졌다.


"착각하지 마. 믿음과 이상, 사명이라는 허울은 망가질 여유조차 없는 자들의 도피처일 뿐이야. 세상이 정의를 기다리던 시절은 끝났어. 남은 건 오직 하나야. 질서를 부수고 다시 쓸어 담을 수 있는 진짜 힘이지.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아니라, 그 위에서 군림하는 힘 말이야!"


말끝이 잠시 갈라졌으나, 가르바는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오래전에 깨달았지. 신앙의 눈빛이 하나둘 흐려질 때야말로, 사람들은 위로가 아닌 명령을 바라는 법이라는 걸. 무녀란 이름은 그저 필요할 때만 꺼내드는 위장된 신앙이었을 뿐이야. 감히 고결함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의 내면은 욕정과 탐욕으로 넘실댔지. 구역질 나는 위선... 나는 그 역겨운 믿음을 찢어발겨 숨겨진 본능을 끌어낼 거야. 공포와 힘, 오직 그것만이 이 썩어빠진 세상의 유일한 진리니까."


붉게 물든 손이 천천히 붕대에 닿았다. 피와 점액으로 번진 손끝이 붕대를 따라 왼편으로 미끄러졌고, 그 아래로 어렴풋한 붉은 기운이 타오르듯 번져나갔다.


"아텐시아는 날 버렸지만... 운 좋게도 복수의 화신을 만났지. 그렇게 진짜 힘으로 군림할 순간을 기다리던 와중에 네가 나타난 거야."


가르바의 시선이 천천히 시즈의 가면 너머 왼눈을 향해 옮겨졌다. 억눌린 욕망이 마침내 숨통을 틔우는 순간이었다.


"그 힘... 네게는 어울리지 않아. 그 따위 정신 상태로는 강대한 권능을 다룰 자격 따위는 없어. 오로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자가 가져야 하지. 그러니... 내가 가져가야겠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르바의 양 손끝에서 붉은 섬광이 번쩍이며 일었다. 전류처럼 번진 균열이 팔목을 타고 피어오르더니, 날개처럼 펼쳐진 그 붉은 뇌격은 파열음과 함께 산란실을 가르며 시즈를 향해 날아갔다. 시즈도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며 이능을 끌어올렸지만 한발 늦었다. 허공에 그은 궤적 위로 푸른빛의 결계가 펼쳐졌지만 뇌격은 방어막이 완전히 형성되기 전 틈새를 파고들었고, 날카로운 전류가 허공을 찢으며 시즈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파열음이 시즈의 몸에 닿기 직전, 아로스가 번개처럼 빠르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개처럼 흩날리던 뇌격이 그의 검 끝에서 맞부딪힌 순간 산란실은 두 개의 힘이 충돌하는 굉음으로 뒤흔들렸다.


검과 뇌격이 맞닿은 경계에서 섬광이 튀었고, 화염처럼 타오르는 열기가 고막을 때릴 정도로 거칠게 번졌다. 청록빛 검신은 갈라지지 않았지만 진동은 뼈를 타고 몸 전체로 퍼졌다. 아로스는 이를 악물며 검이 꺾이지 않게 버텼다. 붉은 벼락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날카롭고 강렬했다. 만일 들고 있는 검이 아마룬이 만든 것이 아닌 일반적인 검이었다면 칼날은 진작에 부서졌을 것이 분명했다.


찢어질 듯한 열기 속에서 시즈가 숨을 들이켰다. 튕겨나간 뇌격이 산란실의 석주 하나를 뚫으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직 타들어가는 냄새가 살갗을 타고 맴도는 그 순간, 가르바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붕대에 가려진 시선은 아로스를 정면으로 붙들었다. 놀라움도, 납득도 보이지 않는 표정 아래로 묻힌 감정은 확실하지 않았지만 입꼬리는 서서히 비틀려갔다.


"그래서 그랬던 건가... 네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했지."


마치 의문 하나가 풀린 사람처럼, 가르바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표정에 깃든 광기는 여전했지만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아이들의 눈을 통해 너를 처음 봤을 때도 어렴풋이 느껴지긴 했어. 알 수 없는 결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기운이 엘나의 잔영이 깃든 환시를 품은 전사일 줄이야."


아로스는 앞으로 한 발짝 더 내딛으며 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쥔 뒤, 뒤편의 시즈를 향해 반쯤 고개를 돌렸다.


"무녀님, 괜찮으십니까?"


속삭이는 듯한 그 물음은 짧았지만 안에 담긴 감정은 조심스러웠다. 고요한 물결 위로 낙엽 하나가 떨어진 듯 아로스의 목소리는 시즈의 의식을 천천히 되돌려 놓았으나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숨이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고, 가슴이 조여드는 감각이 진득하게 뱃속에서 일었다. 시즈의 시선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허공을 헤맸다. 한때 자신을 짓눌렀던 기억의 잔재 속에서 터져 나오던 피비린내와 비명들, 그리고 어둠 속을 기어오르던 날붙이 같은 눈동자들.


지금 이 공간의 모든 것이 마치 과거가 형체를 갖추어 되살아난 듯했다. 땅 밑의 압력, 숨이 막히는 밀폐감, 유생들의 군무처럼 쏟아지는 시선. 저 끝에서 파트로곤이 물어뜯겼던 광경이 떠올랐고, 가르바의 손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던 순간이 눈앞에 겹쳐졌다. 차갑게 굳은 손끝이 푸르게 질려 있었고, 온몸은 요동치듯 떨렸다.


아로스는 시즈의 동요를 읽고는 검을 천천히 들어 그녀 앞에 다시 세웠다. 한 발 앞에 선 어깨너머로 유생들의 형체가 꿈틀대고 있었음에도 등을 돌리지 않았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시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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