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의 무게, 벼락의 심판
시즈의 동요를 읽은 아로스는 그녀를 향해 뒤돌았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시즈뿐이었다. 어깨너머로 유생들의 형체가 꿈틀대고 있었음에도 등을 돌리지 않은 그는 검을 천천히 들어 앞에 꽂듯이 세운 뒤, 양손으로 시즈를 감싸 안았다.
"괜찮습니다. 숨만 고르십시오."
말끝은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그 목소리는 절벽 끝에 매달린 손에 닿은 밧줄처럼, 짧지만 분명한 구원이 되었다. 시즈는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으며 숨을 들이켰다. 폐로 스며든 공기는 눅눅하고 탁했지만 그것마저도 살갗을 적시는 물처럼 간신히 숨통을 틔워주었다.
손끝의 경직이 아주 조금 느슨해진 시즈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자, 아로스는 그 작고 결연한 움직임에 응답하듯이 검은 다시 고쳐 잡은 뒤 가르바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너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어. 시시콜콜한 언령에도 관심 없고 말이지. 그러니 뒤에 서 있는 아이만 넘기고 물러나는 게 어때? 불필요한 희생을 감내할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아로스는 가르바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오히려 더욱 검을 단단히 쥘 뿐이었다.
"...역시 피를 봐야겠다는 건가."
가르바는 고개를 살짝 치켜든 뒤 부드럽게 입김을 불었다. 허공으로 길게 퍼져나가는 그 숨결 속에는 미묘한 붉은 기운이 실려 있었다. 입김은 형체를 가지지 않은 채 낮게 흘러가면서 산란실 깊숙한 곳의 어둠을 뒤흔들었고, 기척 없는 떨림이 동굴의 벽을 따라 퍼지며 잠들어 있던 것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울음 같았으나, 이내 무거운 몸이 벽을 밀치는 소리가 귓속을 찢었다. 발톱이 긁히는 듯한 마찰음과 축축한 살덩이의 움직임이 동시에 밀려왔고, 시즈와 아로스의 뒤편을 제외한 사방에서 암흑이 갈라졌다. 그 틈 속에서 용인들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짙고 검붉은 비늘로 뒤덮인 몸집은 이미 성인 남성을 훌쩍 넘고 있었다. 태생의 이형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날카로운 이빨과 갈라진 발톱을 드러낸 모습에는 어디에도 온전한 균형은 존재하지 않았다. 굽은 척추 위로 늘어진 팔이 드리워졌고, 피멍 같은 주름진 비늘 아래로는 근육이 들끓듯 꿈틀거렸다.
벽과 천장 틈을 기어오르며 수없이 늘어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가르바는 다시 입을 열었다.
"기사는 너희들 좋을 대로 하고... 무녀는 숨만 붙여서 데려와."
그 말은 명령이라기보다는 잔혹한 유희의 개시를 알리는 서막에 가까웠다. 곧이어 용인들이 일제히 포효를 터뜨렸다. 흉포한 본능이 가득한 포식자의 울음소리가 두 사람을 향해 날카롭게 덮쳐왔다.
아로스는 숨을 고르지 않았다. 울부짖음이 몰려오기 전, 이미 그의 몸은 허공을 베며 전진하고 있었다. 날을 벼린 듯 매서운 검격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가장 먼저 달려든 용인의 가슴팍이 두 동강 나며 피가 흩날렸다. 등 뒤에서는 푸른빛으로 요동치는 시즈의 기운이 얇은 장막처럼 퍼져 용인들의 기세를 일시적으로 누그러뜨렸으나 숫자는 너무 많았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형체들에 시야는 점차 틀어막히고, 전신을 휘감는 기척은 끝없이 번져갔다.
그럼에도 아로스는 움직이는 그림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검은 번개처럼 움직이며 허공을 찢으며 비틀린 형체의 턱을 꿰뚫었다. 포효와 함께 밀려든 무게가 팔을 짓누를 때마다 그는 되려 더 깊이 칼끝을 찔러 넣었다. 파열음이 잇따랐고, 튄 피가 바닥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뒤에 세 마리입니다!"
시즈의 경고에 맞춰, 아로스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낮추고 검을 반원으로 그렸다. 바로 뒤로 몰래 파고들던 용인의 머리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고, 나머지 두 마리 또한 연이은 공격에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귓가를 스치는 비명과 떨리는 숨결 속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빈틈을 본능처럼 메우며 움직였다. 그러나 몰려드는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수가 줄었다 싶던 용인들은 벽과 천장의 틈에서 줄지어 모습을 드러냈고, 도륙난 사체 위로 또 다른 용인들이 피비린내를 따라 몰려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르바의 눈빛에 흥미가 비쳤다. 입꼬리를 비틀 듯 부드럽게 끌어올린 그녀의 손끝에서 다시금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고, 피처럼 농도 짙은 뇌격이 또 한 번 시즈를 향해 날아갔다. 시즈는 모든 이능을 자신에게 집중하며 용인들에게 퍼뜨린 장막을 거둬 손바닥을 반쯤 비튼 채 방어막을 형성했다. 푸른빛의 기운이 전방에 펼쳐지며 일렁였고, 붉은 뇌격이 그것에 부딪히는 순간 붉은 섬광이 폭발했다.
"——큿!"
충격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방어막은 깨지지 않았지만 균열은 계속 번져나갔다. 맥을 타고 흐르던 기류는 고통에 휘청였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 모습에 가르바는 느릿하게 웃으며 조롱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약해빠졌잖아! 협곡에서 보여준 모습은 내 착각이었나?"
가르바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은 채 다시 붉은 기운을 모았다. 이번에는 한 손이 아닌 양손이었다. 붉은 번개가 팔뚝을 따라 피어올랐고, 연이어 맹렬한 뇌격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리고 거침없이 시즈를 겨냥해 던졌다.
무자비한 뇌격이 산란실 내부를 흔들자 바위가 갈라지면서 사방으로 잔해가 튀었다. 시즈는 숨을 쉴 틈조차 없었다. 방어막을 감싼 푸른빛이 몰아치는 충격으로 사그라질 때마다 다시 기운을 모아 막아야 했다. 이능의 순환은 점점 느려졌고, 제자리에 붙은 두 발과 다리가 미친 듯이 떨렸다.
"겨우 이 정도로 버거워? 그런 강대한 힘을 손에 쥐고도 쓸 줄 모르는 주제에... 도대체 뭣하러 갖고 있는 거니?"
양손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뇌격은 여전히 시즈를 향해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 수십 차례를 버텨온 방어막은 결국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시즈의 몸이 휘청이자 가르바는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피처럼 짙은 붉은 기운이 팔뚝을 따라 응집되며 서늘한 웃음과 함께 허공을 가르며 일격이 던져졌다.
"걱정하지 마. 죽이지는 않을 거니까!"
그 일격은 오로지 고통만을 위해 극대화한 쐐기였다. 파열음과 함께 뇌격의 기운이 전신을 타고 번지자 가슴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던 메스꺼움이 시즈의 목을 죄며 올라왔다.
"무녀님!"
아로스의 외침이 메아리치듯 퍼졌지만 이미 그의 몸은 용인들의 물결에 갇혀 있었다. 사방에서 파고드는 이빨과 발톱을 막기 위해 그는 칼을 멈출 수 없었다. 피가 튀고, 고막을 울리는 포효가 뒤섞인 혼란 속에서 자신을 막아서는 형체들은 오히려 시시각각 더 많아지고 있었다. 심장박동보다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러도 벽처럼 밀려드는 육체는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위태로운 모습을 바라보던 가르바는 고개를 젖히며, 마치 장대한 연극의 피날레를 맞은 듯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시즈의 눈동자가 칠흑처럼 가라앉았다. 온몸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 눈앞에서 지난 기억들이 밀물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싸늘하게 늘어진 로엔나의 주검 아래에서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파트로곤. 부패에 무너져가는 시스테나 전선의 병사를 끝내 살려내지 못한 무력감. 스스로를 희생해 딸을 감쌌던, 끝끝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꺼져갔던 어머니의 온기.
그리고 지금,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용인의 발톱 사이를 헤집으며 버티고 있는 아로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피와 비명으로 가득한 그 기류 속에서 내면 속 무의식이 시즈를 붙잡았다.
『...그대가 이 고통을 견뎌낸 것은 단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다. 허락된 힘 또한 축복으로 여기지 마라...... 누구에게도 허락된 적 없는 용의 기운이 그대 안에 새겨졌으니, 필연코 그에 걸맞는 대가와 책임을 요구할 것이다. 허나 책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 힘은 마음과 함께 흔들리고, 끝내 무너질 수도 있다. 내면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에게 이 힘은 축복이 아닌 스스로를 갉아먹는 재앙과 다름없다...... 앞으로의 여정 속에서 세상의 상흔과 직면하게 될 것이니, 더 깊은 어둠과도 맞설 수 있는 자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아텐시아의 말이 떠오르는 그 순간, 시즈의 왼눈이 번뜩였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며 뻗어 나갔고, 가면 중심을 뚫고 나온 한줄기의 푸른 섬광은 온몸에 휘몰아치던 붉은 뇌격을 단숨에 갈라 사방으로 흩트렸다. 산란실 전체가 푸르게 물들며 바닥과 벽 곳곳에 균열이 생겼으며, 그것은 마치 대지 자체가 갈라질 듯한 파열이었다.
"......그래야지."
가르바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정도는 돼야지. 너무 쉽게 부서지면 재미없잖아!"
오른팔에서 다시금 불타오른 거대한 뇌격은 이전과는 전혀 결이 달랐다. 원형의 전류가 가르바의 손목을 감싸기 시작하자, 그것은 거대한 창처럼 압축되어 뻗어 나왔다.
"어디... 이것도 한번 받아내 보렴!!"
벼락이 날아옴에도 시즈는 눈을 감지 않았다. 왼눈에서 피어오른 푸른빛이 빛의 장을 이루면서 천장을 찢는 기세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아텐시아의 마력이 각인처럼 시즈의 전신을 감쌌고, 그 푸른 기운은 하나의 번개가 되어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아———
벼락과 벼락이 충돌했다. 붉은 파동과 푸른 섬광이 공중에서 맞붙었고, 산란실은 폭발적인 음향과 함께 굉음을 터뜨렸다. 충돌의 중심에서 파장이 번지면서 양쪽의 기운이 소용돌이처럼 맞물렸다. 그 압도적인 힘에 휘말려, 주변에 몰려들던 용인들은 연기처럼 날려갔다.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괴성이 겹쳐 터졌고, 아로스는 자신을 물고 늘어지는 용인을 내려친 뒤 거대한 파동을 버티기 위해 검을 땅에 깊숙이 꽂았다.
귓가를 때리는 기압의 진동과 피와 먼지가 범벅된 공기 속에서 파동은 점점 폭발적으로 번졌고, 두 힘의 균형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시즈가 이를 악물며 왼손을 힘껏 벌리자, 전신을 타고 흐르던 푸른 마력이 왼팔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받아라———!!!"
외침과 동시에 솟구친 벼락은 응축된 칼날처럼 날아올랐다. 그 파동은 폭주하듯 직선으로 뻗어나가 가르바의 뇌격을 정면으로 뚫고 나갔다. 분노에 찬 의지가 번개에 실린 듯한 압도적인 위력에, 가르바는 이를 악물며 양팔을 들고 뇌격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시즈의 힘은 단순한 위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불안과 결심의 경계를 꿰뚫은 내면의 각성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 정도의 힘을——"
가르바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푸른 벼락이 붉은 벼락을 집어삼키자 가르바는 크게 흔들리며 중심을 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른 섬광이 그녀의 오른팔을 꿰뚫었다.
"——!"
마지막 남은 뇌격을 움켜쥐려 했던 손끝이 일그러지며 뒤틀렸고, 오른팔은 산산조각 나듯이 터져 나갔다. 강렬한 반동이 뼈마디를 쪼개며 가르바를 거세게 밀어내자 그녀의 몸은 공중을 가르며 뒤편 벽으로 날아갔다.
쾅——
벽에 부딪히는 순간, 충격음과 함께 단단했던 암벽이 그대로 갈라지며 금이 퍼졌다. 반동을 이기지 못한 몸은 힘없이 튕겨져 나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붉은 피가 깨진 돌조각 사이로 스며들었고, 오른팔은 형체조차 남지 않은 채 사라져 있었다.
"쿨럭—!"
가르바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폐부를 찌른 고통이 온몸을 휘감은 그녀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하더니 휘청이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시즈 역시 제 발을 지탱하지 못했다. 힘을 쥐고 있던 손끝이 떨리고, 다리가 풀리면서 중심을 잃은 몸이 비틀렸다.
"무녀님!"
아로스가 재빨리 달려온 덕에 시즈는 무릎이 꺾이기 직전 그의 품에 간신히 안겼다.
"무녀님, 괜찮으십니까?"
그때, 산란실의 천장이 갈라졌다. 처음에는 부서진 틈으로 흙먼지만 떨어졌지만 이어서 굵은 균열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지며 바닥이 울렸다. 암벽 전체가 숨을 들이켜는 듯 미세하게 들썩이더니 폭음과 함께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충격에 산란실의 중심부가 붕괴하며 함몰됐고, 바닥에 깔려 있던 수백 개의 알들이 무차별적으로 짓이겨졌다. 터져 나오는 점액과 피, 그리고 아직 완전히 형체를 이루지 못한 채 바닥을 기던 용인의 유생들이 바위에 깔리며 터져나갔다. 기둥이 무너지고, 벽이 갈라졌으며, 먼지가 피처럼 떠올랐다. 산란실 전체가 비명으로 뒤틀렸고 붕괴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꽉 잡으셔야 합니다!"
시즈를 들쳐업은 아로스는 산란실을 가로질러 그들이 들어왔던 길을 따라 거침없이 달렸다. 폐허가 된 뒤편에서는 연쇄적으로 바위들이 무너져 내렸고, 발밑 바닥조차 균열이 퍼지며 휘청였다. 이윽고 출구에 도착했지만, 땅 밑으로 들어오면서 용인들로부터 벗어나려 가로막았던 거대한 바위가 아직 길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틈은 없었다.
아로스는 숨을 크게 들이쉰 후 한 손만으로 바위를 밀어붙였다. 심장을 죄는 소음 속에서 팔의 근육이 으깨지듯 일그러지는 동시에 마디마다 피가 솟는 듯했지만 그는 끝내 바위를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쿠웅——
바위는 큰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졌다. 무너지는 소리가 출구를 집어삼키기 직전, 두 사람은 분노와 광기로 메아리치던 그곳으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