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
산란실은 더 이상 생명을 품은 곳이 아니었다. 무너진 천장의 거대한 잔해가 덮친 그곳은 이제 부서진 알과 짓이겨진 유생들, 형체를 잃은 용인의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부화를 기다리던 알들 또한 대부분 무너짐에 휩쓸리며 강한 충격으로 깨지고 터져나갔다.
껍질의 틈으로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생명체가 흐릿한 점액 속에 드러나 있었고, 일부는 골격이 으스러진 채 잔해 아래에 눌려 있었다. 연약한 외피와 점액이 뒤섞여 진득한 흐름을 이루는 동시에 속을 뒤집을 듯한 악취가 공간을 감쌌다. 섭리를 거스르며 태어나려 했던 생명들이 순식간에 부패하기 시작하자 공기는 숨을 쉬는 것마저 잔혹하게 오염됐고, 가라앉은 어둠 속으로 떠다니는 먼지가 그 황폐한 장면 위에 느릿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 틈 어딘가, 어둠에 삼켜진 잔해 한가운데에서 낮고 깊은 기침 소리가 터졌다.
"쿨럭...... 허윽......"
잔해를 밀어내며 기어 나온 것은 가르바였다. 왼팔 하나로 힘겹게 일어선 그녀의 모습은 상처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오른팔이 터져나간 어깨 아래로는 피가 끊임없이 흐르며 눅눅하게 옷을 적셨고,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은 굳은 피로 막힌 듯 거칠게 울렸다.
가르바는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들었다. 붕대로 가려진 얼굴 한쪽으로는 핏줄기들이 흐른 듯이 붉은 흔적이 번져 있었다. 그녀는 뭔가를 더듬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잔해 틈새에서 맞닿아 있는 두 손을 발견했다.
굵고 굳은살이 배긴 거친 손, 그리고 가냘프고 피와 상처로 가득한 손이었다. 마치 마지막 순간에 서로를 향해 내민 듯한 그 광경에 가르바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쩜, 죽어서까지도 이렇게 기분 나쁘게 하는 건지."
숨이 막히듯 꺽꺽대는 웃음 사이로 조용한 중얼거림과 동시에 가르바는 크게 다시 숨을 들이켰다. 폐허의 공기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썩은 점액과 불타버린 살점의 냄새로 폐부를 갈겼고, 기침과 함께 토악질이 올라왔지만 토할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 다시 주위를 바라본 순간,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산란실은 더 이상 자신의 아래에 놓여있던 세계가 아니었으며, 찢겨진 고막처럼 울리는 머릿속에서는 망상처럼 미래가 그려졌다.
무릎 꿇은 자신의 모습과 내려다보는 이들의 차가운 시선. 단말마처럼 흔들리는 숨결 속에서 가르바는 과거의 기억이 또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자격을 박탈당하며 눈을 잃던 날의 치욕이 골수 깊이 되살아났고, 이번에는 그 조차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뒤따랐다. 무너진 산란실과 스러진 예비 군단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도 없으니 그 끝은 결코 권능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힘이 잔뜩 들어간 왼손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가르바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의식을 잠식해 가는 불안과 공포였다. 사라진 오른 팔의 격통조차 의식 저편으로 밀려날 만큼 그녀는 스스로의 종말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식의 바닥에서도 하나만큼은 변함없었다.
'...그 힘을 가질 수만 있다면......'
자신을 추락시킨 아텐시아의 권능이 담긴 무녀의 힘은 여전히 가르바의 내면 어딘가에서 사나운 욕망처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 그녀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큰 사치였고, 지금은 오로지 생존만을 생각해야 했다. 가르바는 피를 따라 흘러내린 긴 머리칼을 억지로 뒤로 젖힌 뒤 산란실의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숨을 눌렀다. 눈을 가린 붕대 아래로 식은땀이 맺혔고, 부여잡고 있는 오른쪽 어깨에서는 여전히 식은 피가 줄줄이 흘러내렸다.
깨진 알껍질로 인해 칼날이 도사린 듯한 돌무더기를 기어 넘고, 먼지와 피가 엉긴 바닥을 따라 엎드려 기었다. 폐허는 조용했지만 무언가가 여전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태어나기도 전에 압사당한 유생들의 썩지 않은 잔상일까, 아니면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채 죽은 이들의 시선일까. 하지만 가르바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천천히, 필사적으로 외곽을 향해 움직였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길게 뻗은 동굴 밖으로 간신히 빠져나온 가르바는 무너진 경계부까지 기어올라 협곡의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억지로 기척을 감춘 여파 때문인지 숨을 크게 들이쉬면 폐가 찢길 것 같았고, 숨을 내쉬면 흉곽이 쪼그라드는 듯했다.
그렇게 숨소리를 삼키고 고통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려던 그때, 눈앞에서 땅을 스치는 무거운 기척이 내려앉았다. 허공에서 바람을 가르며 천천히 내려오는 날갯짓 소리에 가르바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숨결조차 멈추며 바닥에 얼굴을 묻으려는 찰나─
"......이런이런. 도망치는 꼴이 너무 가련해서 하마터면 그냥 보내줄 뻔했잖아."
낮고 서늘한 목소리에 가르바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단번에 무릎이 꺾였고, 단말마처럼 비틀린 숨이 새어 나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림자가의 날카로운 발톱 끝이 붉은 피로 그려진 바닥을 밟으며 그녀의 코앞에 멈춰 섰다.
오베디안이 몸소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도망은 네 역할이 아니었을 텐데. 설마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말투에는 동정도 격노도 없었다. 단지 오래전부터 예정된 결말을 기다렸다는 듯한 무심한 냉기만이 서려 있었다.
"......오베디안."
가르바는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느리게 움직였으나, 그 이름을 부르는 데조차 숨이 모자랐다.
"저를 죽이러 온 겁니까?"
"마음 같아선 당장 이 자리에서 찢어 죽이고 싶군."
오베디안은 가르바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뒤편의 날개가 길게 갈라지며 협곡의 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네 죽음은 사브라트께 달려 있다. 내 손으로 널 찢어발길 기회가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말이야."
가르바는 입술을 꾹 깨물며 망가진 몸을 바닥에 가깝게 웅크렸다. 숨소리마다 고통이 들이쳤지만, 그 와중에도 자존심만은 움켜쥐고 있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합니까?"
그녀는 간신히 말을 잇고, 들끓는 숨을 삼켰다.
"난 지고신의 세력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했습니다. 단 한 번도... 이 협곡에서 벗어나려 한 적이 없습니다!"
"헌신? 유생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것이 헌신이라 말할 수 있나?"
가르바는 숨을 멈춘 듯 오베디안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 동안 불신을 견디며 쌓아온 감정의 침전물이 묵직하게 들어차 있었다.
"네가 이 협곡에 들어왔던 첫날부터, 나는 널 신뢰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믿고 싶단 생각조차 없었지. 너의 오만과 탐욕은 결국 네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진작부터 알고 있었거든."
그 말은 가르바의 속을 찢었고, 찢긴 감정은 곧바로 벼락처럼 튀어 올랐다.
"...닥쳐!"
거칠고 낮은 목소리와 함께 왼손 끝에서 붉은 벼락이 갈라져 나왔다. 하지만 날카롭게 내질러진 뇌격은 오베디안의 몸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잿가루처럼 사라지면서 사소한 상처조차 남기지 못했다.
"사브라트님의 피가 가장 진하게 흐르는 나에게 붉은 벼락을 쓰다니...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구나. 이젠 판단조차 제대로 못할 만큼 망가진 거냐?"
오베디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몸이 튀어 오르더니, 가르바는 감지할 틈도 없이 목덜미와 상체를 붙잡혀 순식간에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거대한 손아귀에 짓눌리자 잘려나간 오른팔 자리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들었다.
"놔...... 놔라! 이 멍청한 도마뱀 같은 놈아!”
비명을 지르며 왼손에 전격을 다시 피워보려 했지만 오베디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가르바를 협곡의 벽으로 내던졌다. 몸이 벽에 부딪히는 동시에 무언가 뚝 끊어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퍼졌고, 절단된 팔의 통증이 잠시 잊힐 만큼 몸속 깊숙이 밀려든 격통은 호흡을 완전히 빼앗아갔다.
고통으로 벌어진 입으로 숨은 들어오지 않았다. 피에 젖은 뺨이 바닥에 닿자 간신히 고개를 들었지만 오베디안은 검은 날개를 반쯤 펼친 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지금 당장이라도 내 손으로 널 찢어 죽이고 싶다. 하지만 네 죽음은 사브라트께서 정하실 일이지. 그 대신, 죽지 않을 만큼 망가뜨려주마."
오베디안은 잔혹하리만치 차분한 표정으로 가르바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가르바는 입술을 떨며 이를 악물었지만, 새어 나오는 신음은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네년의 자존심이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확인해 볼까?"
그 말과 함께, 오베디안의 거대한 주먹이 정확히 명치를 향해 내리 꽂혔다.
퍼억──
"커흑......!"
갈비뼈 너머 장기를 직격 한 충격은 뇌를 마비시켰다. 몸 안의 모든 것이 뒤틀리며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이 척추를 타고 전율처럼 번졌고, 숨은 목에서 끊겼다. 혀끝까지 올라온 비명마저 지르지 못한 그 모습을 지켜본 오베디안은 그녀를 집어 들어 바닥에 내던졌다.
가르바는 무릎을 꿇은 채 떨리는 왼손 끝으로 바닥을 짚었다. 숨을 쉬려 안간힘을 썼지만 파열된 듯한 고통은 늑골 아래로 가시처럼 박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허윽... 허억......"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면서 그녀는 이를 갈았다. 뒤이어 터져 나온 말에는 아직도 자존심이 실려 있었다.
"......네놈이...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가르바의 도발에 오베디안의 눈이 날카롭게 좁혀졌지만, 그 안에는 더 이상 설득도 분노도 없었다. 오로지 억제된 증오만이 차가운 안개처럼 흘렀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말을 내뱉다니, 네년의 오만함은 정말 끝이 없군."
두 번째 주먹은 명치가 아닌 복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끄헉......!"
숨도, 고통도, 모든 감각이 동시에 폭발했다. 의식은 점점 무너졌고, 피부 아래 모든 신경이 비명을 질렀다. 남은 한 손으로 바닥을 긁으며 몸부림쳤지만 이미 손끝마저 굳어가고 있었다. 몸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자 오베디안은 코웃음을 치며 가르바를 발끝으로 밀어 쓰러뜨린 뒤 무자비하게 남은 팔을 잡아끌며 일으켜 세웠다.
"다 죽어가는 주제에 아직도 아가리로는 날 이기려 들어?"
한순간도 연민을 보이지 않은 그의 손아귀가 다시 가르바의 어깨를 쥐었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꿈치만이 허공을 집은 채로 허우적였다. 오베디안은 그녀의 몸을 다시 벽에 밀어붙였다. 가르바는 입을 벌려 숨을 몰아쉬려 했지만 벽에 눌린 폐는 팽창조차 하지 못했다.
"넌 단 한 번이라도 나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 없었을 거다. 강한 척을 하면서도 내심 날 두려워했어. 언제나 그랬지."
"허억... 너야말로... 네가 보는 게 전부라 착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걸......?"
간신히 숨을 내쉰 가르바는 고개를 들어 오베디안을 바라보았다. 피에 젖은 얼굴 위로는 희미한 웃음이 올라왔고, 그것은 비틀린 오만과 함께 끓어오른 원한이 섞인 미소였다.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여지껏 깨닫지 못한 것이냐?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네놈이 가장 연민받을 구석이지!"
그녀의 도발에 오베디안은 짧게 웃었지만, 그 안에는 어떤 유쾌함도 없었다. 차갑게 멎은 혐오만이 담겨 있던 미소가 점점 일그러지면서 거대한 손이 피와 먼지로 뒤엉킨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던 찰나의 순간, 가르바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떨리는 왼손이 붕대로 덮인 눈가를 향했고, 화상으로 뒤덮인 손가락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왼쪽 눈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끄읏!"
육질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끈적한 액체가 붕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당황한 오베디안은 순간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짓이냐!? 네년이 드디어 미쳤──"
오베디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르바는 무언가를 집어든 왼손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고동치는 눈알 하나가 터질 듯 떨리고 있었다. 응축된 붉은빛이 그 속에서 꿈틀거리며 일그러졌고, 갈라진 혈관 속에서는 피보다 붉은 전류가 튀었다. 가르바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오베디안을 향해 던졌다.
"...선물이야."
콰아아아아앙───
눈알이 그의 몸에 닿자마자 폭렬한 붉은 섬광이 협곡을 뒤덮었다. 일순간 주변이 하얗게 타올랐고, 마치 모든 색이 지워진 듯한 충격파가 번개처럼 뻗어갔다. 땅이 요동치고 바위가 뒤집히면서 피와 돌, 먼지가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
오베디안은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한 채 직격을 맞았다. 하얗게 번쩍인 눈앞으로 온몸의 감각이 비틀렸으며, 순간적인 진공 뒤로 이어진 충격은 말 그대로 공백을 남겼다. 그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한 걸음 비틀거리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폐허 위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어둠 속에서 드리운 긴 그림자가 먼지 사이로 스며들며 잔해를 가로질러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