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추격 (1)

다시 피어나는 불꽃

by 이샤라
...언제부터인가, 대지 곳곳에서 낯선 전사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어느 날 문득 비틀려버린 것일까.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길을 잃은 망령들’이라 불렀다. 살아남은 이들이 남긴 증언은 하나같이 흐릿하고 불완전했다. 갑주는 검게 녹슬어 문드러졌으며, 그 안에 깃든 어둠은 결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고. 어느 누구도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었고, 침묵과 공포 속에서 이름 없는 망령들은 더욱 짙은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일그러진 전사들은 아직도 죽음의 평원을 떠돌며,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어느 음유시인의 이야기 中



심연의 추격



제단은 이미 오래전에 숨을 거둔 듯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검게 그을린 석벽은 금세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웠고, 그 위에 남은 재마저 건조한 바람에 흩날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노아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무릎 아래로 스며드는 바닥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손끝에 남아 있는 화상 자국, 그리고 전장과 병자들의 마을에서 수없이 쌓아온 피로와 책임의 흔적은 이 순간 그를 더욱 단단히 뿌리내리게 했다.


'이 불꽃이... 정말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무릎을 꿇은 이유는 간절한 기도 따위가 아니었다. 기적을 바라는 소망이 아닌 스스로에게 새긴 의무. 도시를 버리고 떠난 사제들의 빈자리를 대신해서, 꺼져버린 불씨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본능 같은 책무였다.


노아는 두 손을 모아 차가운 재 위에 올렸다. 손끝이 검댕으로 더럽혀졌으나 마치 오래된 의식을 따라 하듯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것은 불의 사제들이 거쳐야 했던 관례로, 불씨 앞에 무릎 꿇고 심장의 고동을 불길에 바치는 의례였다. 숨을 고르며 눈을 감자, 귓가엔 오래전부터 이어진 듯한 환청이 울려 퍼졌다. 아버지와 형, 사제들과 수천의 시민들이 불길 앞에서 읊조리던 기도와 불이 꺼지지 않던 시절에 울려 퍼지던 묵직한 망치 소리. 그 모든 것이 아득한 기억처럼 되살아났다.


내면에서 뻗어 나온 열이 손끝으로 모여들었다. 신성한 불꽃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불티였으나, 노아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불완전한 불씨일지라도 그 안에는 지난 세월 동안 걸어온 모든 책임과 다짐이 고스란히 서려 있었다. 그것은 불완전했기에 오히려 더 진실했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겠다는 고집 같은 불꽃이었다.


"...정말 가능하다고 믿는 것인가?"


제단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신전의 꼭대기에서 거인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마룬이 믿음이 서린 목소리로 답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야지 않겠나. 이 도시의 진정한 힘은 바트라님의 불꽃이 아니던가. 저 소년이 그 불꽃을 이을 수 있다면 이그니카는 잃어버린 힘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두 눈으로 보지 않았나. 소년의 불꽃이 용광로를 다시 끓어오르게 하는 것을 말이야."


"하지만 의식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그대도 신계를 보았을 텐데. 바트라께서 정말 살아 계신지도 알 수 없는 와중에, 제아무리 적통 후계자의 동생이라 한들 저 꼬마가 40일간 식음을 전폐한 채 의식을 완수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겉으로는 보잘것없는 필멸자로 보일지 모르지. 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내면을 지닌 소년이다. 나를 향해 당돌하게 맞선 인간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저 녀석 만은 달랐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끝까지 믿을 것이다."


묵묵히 대화를 듣던 오르드의 시선이 멀리 하늘에 떠 있는 신계로 향했다. 그곳은 여전히 피눈물을 흘리듯 붉은 화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 광경은 보는 이의 속을 서서히 태워버렸고, 매번 시선에 담을 때마다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끝내 미련을 놓지 못했다. 바트라가 아직 살아 있기를, 그리고 권속들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해 이 도시가 다시 숨을 되찾기를. 신계의 불꽃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오르드에게 있어서는 마지막까지 붙잡아야 할 실낱과도 같았다.


제단 위로 작은 불씨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웠으나, 노아의 두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설령 이 불씨가 사라진다 해도 그는 다시 붙일 터였다. 수백 번이라도, 수천 번이라도.




거대한 폭발이 휩쓸고 간 협곡 어딘가, 정신을 차린 오베디안은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한쪽 눈이 묵직하게 저린 채, 귓가에는 날카로운 이명이 파고들었다. 주위를 훑자 부서진 절벽, 뒤틀린 지면, 그리고 강렬한 폭발의 잔흔만이 황량하게 남아 있었다. 사방으로 바위와 토사가 뒤엉킨 균열은 뿌리째 갈라져 협곡의 윤곽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가르바의 형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폭발의 여파만 놓고 보면 죽음이 확실해 보였으나 그 공백은 오히려 꺼림칙했다. 결론은 분명해야 했지만, 가느다란 실처럼 남아 있는 불신은 끝내 끊어지지 않았다.


오베디안은 먼지를 털어내듯 날개를 펼쳤다. 가르바가 정말 사라졌는지 따져볼 겨를은 없었다. 폭발의 잔흔 속에 남은 불길한 공백은 마음을 짓눌렀지만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몸 깊숙이 파고든 통증을 억누른 채, 곧장 날개를 크게 펼쳐 협곡의 심부를 향해 날아올랐다.


리마 산맥의 상층부까지 단숨에 솟구쳐 날아오른 그는 바람을 가르며 능선을 타고 흐르는 기류를 꿰찼다. 바위와 얼음이 맞물린 절벽 틈새가 눈앞에 나타나자 오베디안은 몸을 틀어 숨겨진 경로로 몸을 낮췄다. 그 틈새는 바깥 세계의 눈에 결코 띄지 않는 둥지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둥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기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둥지 내 용인들의 감각은 한 곳으로 쏠린 채 웅성거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굽은 등과 꼬리가 느릿하게 움직이며 흉강 깊숙이 깔린 불안이 공기를 따라 번졌고, 오베디안은 그들의 동요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오베디안은 날갯짓을 멈추지 않으며 순식간에 산맥 내부의 깊은 협곡을 따라 하강했다. 바위와 암흑이 맞물린 공간을 끝으로 중앙홀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중심에 주교 비디아가 서 있었다. 가면 아래의 미묘한 미소, 단정히 정돈된 의복, 그리고 불쾌하게 풍겨오는 은근한 압박감이 홀 안의 공기를 장악하고 있었다.


발끝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의 시선과 비디아의 시선이 조용히 마주쳤다.


"오, 마침 협상의 안건을 시작하려 했는데 때맞춰 오셨군요. 그런데... 먼지 구덩이에서 목욕이라도 하고 오신 겁니까?"


비디아의 비아냥 섞인 물음 뒤로, 사브라트의 의식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이리 늦은 것이지?


오베디안은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가르바를 놓쳤다는 사실을 쉽사리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으나, 사브라트는 오베디안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신적 공명을 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스스로 자멸을 택했더군. 하지만, 너 또한 부주의로 인해 방심한 것과 다름없다.]


그 어조에는 질책과 함께 사태의 전모를 꿰뚫고 있었고, 오베디안은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경고를 새기겠습니다.]


공명 속에서 오베디안의 대답이 끝나자, 홀 안으로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때, 비디아가 옆에서 고개를 기울이며 가면 속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일전에 있던 무녀는 어디로 간 겁니까?"


호기심을 감춘 듯 한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그 안에 스치는 기색은 알 듯 모를 탁함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오베디안은 단칼에 비디아의 말을 끊었다.


"외부인 따위가 이곳의 사정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나?"


날카로운 답변에 비디아는 기가 찬 듯이 웃었다. 하지만 뒤이어 어깨를 조금 낮추더니, 능청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은 발언을 용서해 주시길. 그럼, 협상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 볼까요."


협상이라는 단어와 함께 금빛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암흑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숨소리마저 한층 짙어졌고, 그것은 마치 주교를 향해 다가오는 듯 발걸음 없이 거리를 좁혀왔다.


좋다. 주교여, 네가 바라는 것을 숨김없이 말하라.



"제가 원하는 것은 아우로라의 무녀와 의문의 기사입니다. 무녀는 저희 세력의 미래의 한 획을 그어줄 열쇠이며..."


비디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아주 미세하지만 숨길 수 없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기사는 제가 섬기는 분께서 유독 필요로 하는 중요한 존재이지요. 그들은 강대한 이능을 지녔기에 제 세력만으로는 확보가 쉽지 않습니다만, 협곡의 지배자께서 지원해 주신다면 결과는 확실히 보장될 것입니다."


사브라트의 금빛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그들을 손에 넣었을 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냐.


비디아는 가면 아래로 미소를 머금었다.


"힘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이 깊은 그늘에 머물 이유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다시금 세상의 무대 위로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말이지요. 다만... 그전에 제가 섬기는 분의 계획이 실현될 필요가 있으니, 그것은 협력의 모든 결과가 완성된 뒤에 가능합니다."


그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오베디안의 눈매가 차갑게 가늘어졌다.


"필요한 것들을 먼저 받고, 힘은 나중에 준다는 말인가? 협상이 아닌 말장난 따위를 누가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협력이라 함은 서로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요. 약속한 힘은 협곡의 지배자께 반드시 돌아갈 것입니다. 당신이 느끼시는 그 불만은... 협상의 본질과는 무관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인내하신다면, 그 가치가 얼마나 확실한지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홀 안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사브라트의 금빛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깊이 번득이며 주교의 말과 그 이면을 오래도록 가늠하는 듯했고, 그로 인해 침묵은 길게 흘렀다. 공기의 기류가 미세하게 요동쳤다가 잦아들자, 마침내 낮고 단호한 의식이 울려 퍼졌다.


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군단의 일부를 내어줄 터이니... 네 손에 쥔 그 판을 어디까지 굴릴 수 있는지 보여봐라.


비디아는 고개를 숙이며 차분히 대답했다.


"지혜로운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협곡의 지배자이시여. 저희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사브라트의 황금빛 눈동자가 잠시 오베디안을 스쳤다. 그 시선은 의미를 남긴 채 천천히 가라앉았고, 이내 빛이 닫히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홀 안에 남아 있던 위압적인 기척도 서서히 가라앉자 숨죽인 정적만이 자리했다.


그 순간, 비디아가 오베디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에 봤던 무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요."


부드럽지만 호기심을 감추지 않은 어투였다. 그러나 오베디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질책을 받은 일을 굳이 입 밖에 낼 이유가 없었다. 그 침묵을 감상하듯 바라보던 비디아는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참으로 아쉽군요. 그녀 또한 새로운 숨결을 품어낼 그릇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자신의 안에서 잉태된 존재의 맥이 고동치는 순간, 파도처럼 번져 몸과 마음을 적셔오는 그 울림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울지 상상해 보신 적 있습니까? 그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실로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세상만사가 뜻대로 되진 않는 법이니 말입니다."


오베디안은 짧게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날카롭게 던졌다.


"그따위 상상은 네 머릿속에나 담아둬라. 이곳 협곡은 쓸모없는 자들을 미련 없이 버리는 곳이다. 나라면 그런 환상에 빠질 시간에 앞으로 실행될 계획부터 다시 점검할 것이다."


비디아는 가면 아래로 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제가 말한 무녀와 기사는 아마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존재일 테니, 이번만큼은 당신의 협곡에서도 미련 없는 선택이 이루어지겠군요."


오베디안은 대꾸 없이 날개를 펼쳤다. 검은 그림자가 한 번 크게 일렁이며 날아오르는 바람과 함께 홀 위쪽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비디아 또한 더 이상 홀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바위 틈새를 따라 흐르는 바람이 가면 가장자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어느 순간 불현듯 걸음을 멈춘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쓸모없다, 버린다라... 하지만 부서지고 흩어진 그릇일수록... 다른 모양으로 빚어내는 법이 있는 것이지요."


걸음을 멈춘 비디아는 소매 속에서 천천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것은 희미한 불빛을 토해내는 잿멍울이었다. 검게 그을린 재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심장의 고동이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그것은 꺼져가는 불씨 같으면서도 억지로 붙잡아 둔 생명의 맥처럼 불길하게 떨렸다.


손끝으로 매만지듯 잿멍울을 굴리자, 덩어리는 순간 경련하듯 몸부림치더니 곧 가라앉았다.


"비록 본래의 울림은 잃었을지라도... 때로는 달리 깨어난 숨결이 더 충실한 맹세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면 속 눈빛이 잠시 은밀히 일렁였다. 협곡을 감싼 어둠은 더욱 눅눅해졌고, 흘러나온 말끝은 끝내 공기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불길한 기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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