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징조
하늘은 병든 피부처럼 누런 구름에 가려 있었다. 희미한 빛은 계곡을 어슴푸레 비추었지만, 그마저도 무색하게 만드는 음산하고 메마른 공기에 삼켜지는 듯했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죽음의 땅 위로는 오직 발굽의 둔탁한 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릴 뿐이었다.
시즈는 말을 멈추지 않은 채 시선을 낮추었다. 에리스 협곡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곳에 남겨진 것들은 쉽게 등을 돌릴 수 없을 만큼 깊은 흔적을 남겼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로엔나와 파트로곤의 마지막 순간이 어둡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비극은 기억의 저편에서 피처럼 뚝뚝 떨어져 오늘의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때, 아로스의 조용한 목소리가 말발굽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무녀님, 아직도 협곡에서의 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신 겁니까?"
감정을 조심스럽게 덜어내는 그 물음에 시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마지막까지... 그토록 처절하게 발버둥 치고 무너졌으니까요."
아로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비난도 위로도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감춘 숨결이었다.
"그 비극 속에 저희가 너무 깊이 휘말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굉장히 위험했지 않습니까. 앞으로 북쪽으로 갈수록 그런 일은 수 없이 반복될 겁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즈는 잠시 말없이 아로스를 바라본 뒤 눈길을 내렸다.
"귀공께서는... 그들을 외면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진 않습니다만... 모두를 구하려는 마음이 무녀님의 안위를 집어삼킬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등을 돌릴 수 없었어요. 그렇게 외면한다면, 저는 더 이상 무녀라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 말에, 아로스는 시즈의 얼굴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대답했다.
"저는 언제까지나 무녀님의 뜻을 존중할 것입니다. 하지만 묻겠습니다. 아우로라를 떠나기 전, 교리에 얽매여 스스로의 몸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율리아님의 말씀을 잊으신 겁니까?"
시즈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분노도 슬픔도 없었지만 그보다 더 묵직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누군가를 도우려는 마음이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녀님 스스로가 무너지면 아무도 구할 수 없습니다. "
"......율리아님도, 귀공도... 결국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군요."
아로스의 말에, 시즈는 힘없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눈동자엔 여전히 꺼지지 않는 의지가 고요히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저는 등을 돌릴 수 없어요.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무녀가 된다면...... 저는 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시즈의 말을 조용히 받아들인 아로스의 눈빛은 변함없었지만, 턱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곁에 있어야겠군요."
그 말엔 책망도, 체념도 없었다. 다만 스스로가 짊어진 역할에 대한 명확한 인식만이 담겨 있었다.
각자의 생각에 잠긴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침묵이 이어졌고, 발굽 소리만이 메마른 대지를 울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를 발견한 시즈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 이곳은......"
시즈의 시선이 머무른 곳에는 짧고 오래된 기억이 비틀린 채 남아 있었다. 물이 흐르던 흔적이 남은 메마른 대지, 창은의 강의 잔해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때 생명을 머금었던 물줄기가 사라진 검게 썩어버린 땅 위로는 몸이 거의 다 무너져 내린 파도의 악마들이 의미 없는 울부짖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서 있는 그 모습은 마치 마지막까지 생명을 붙들려는 절박한 몸짓처럼 서 있었다. 자색 균사체와 곰팡이가 나무껍질을 뒤덮어 갉아먹고 있었으며, 바람이 닿을 때마다 눅눅하게 썩은 내음이 진동을 일으켰다. 나무 아래에는 병사들의 시신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내장은 사방으로 터져나간 채로 흘러내렸고, 갑옷 틈새마다 지렁이를 닮은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뒤엉킨 채 들끓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시즈는 코를 움켜잡으며 겨우 구역질을 삼켰다. 아로스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죽어 있는 이곳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곧이어 자욱한 독기 너머로 감시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탑은 무너질 듯 기울어 있었음에도 기적처럼 땅 위에 서 있었고, 주변에는 또 다른 잔해가 널려 있었다.
녹슨 무구, 찌그러진 투구, 썩고 삭아버린 갑주. 이곳을 지키려다 쓰러진 병사들의 주검은 마치 유물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 틈마다 탑 밖에서 보았던 섬뜩한 벌레들이 시체의 틈을 파고들며 역겨운 악취를 퍼뜨리고 있었다.
"......"
시즈는 말을 멈춘 채 탑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숨결에는 한 겹의 슬픔과 또 한 겹의 무력함을 품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부서진 탑의 입구를 따라 묵묵히 그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한층 더 음침했다. 죽음의 기운이 사방에 스며들어 있었고, 공기조차 뼛속을 기는 듯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실내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 또한 모두 곰팡이와 부패의 늪에 잠긴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은... 완전히 버려졌습니다."
아로스의 목소리는 낮았고, 감정의 결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시즈는 잠시 바닥에 쓰러진 기사 한 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부러진 검을 움켜쥔 채 숨을 멈춘 그 모습에 고개를 숙여 손을 모았다. 그리고, 침묵과 기도를 올렸다.
"......이곳에서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사명을 다하려 한 걸까요."
"죽은 자들 만이 알고 있겠지요."
아로스의 마지막 말은 벽에 스며들어 사라지듯 낮았다. 죽음과 부패가 모든 것을 집어삼킨 이곳은 사람의 목소리조차 머무르지 못하는 곳이었다.
탑을 빠져나오며 두 사람은 다시 말을 몰았다. 하지만 그들의 어깨 위에는 쉽게 벗겨지지 않는 어둠의 흔적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곳의 죽음은 단순한 하나의 비극이 아닌 세계를 잠식해 가는 어둠의 한 단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감시탑의 기슭을 벗어나려는 순간, 불현듯 한 노인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굽은 허리와 가죽, 뼈만 남은 마른 육신은 마치 흙에서 솟은 망령 같았다. 깊게 꺼진 두 눈은 허연 막에 가려졌고, 빛은커녕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거적때기처럼 낡고 해진 옷은 살결에 들러붙어 있었으며, 그 위로 덧입은 찢어진 천 조각에는 사라질 듯 흐릿한 카노라스의 탑 문양이 어렴풋이 그려져 있었다.
시즈는 말고삐를 당기며 몸을 낮췄다. 시선은 똑바로 노인을 꿰뚫었지만 긴장한 기색은 숨겨지지 않았다. 감시탑의 죽음과 부패를 마주한 직후였기에 눈앞의 존재가 살아 있는 자인지, 환영인지조 차도 알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노인은 마치 그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낮게 입을 열었다.
"서쪽의 무녀... 그리고, 환시를 품은 이로군. 먼 길을... 왔겠소."
그의 말투는 느렸다. 말라붙은 입술은 단어 하나를 뱉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시즈는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움찔였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인은 허공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기쁨도 적대도 아닌, 이미 모든 것을 지나쳐버린 자들의 기이한 냉소였다.
"그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노인일 뿐이오."
그의 음성은 점점 낮아졌다. 마치 땅속에서 기어 나오는 죽은 자의 숨소리처럼 변해갔다.
"두 사람도... 이곳에서 오래 버티진 못할 거요. 이곳은...... 모든 걸 삼키는 곳이니까."
아로스는 노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가늠하려는 듯 매섭게 그를 응시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뭔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는 말인가?"
노인은 시선을 깔며 땅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한참 뒤, 흐느적이듯 입을 열었다.
"위험은...... 언제나 스스로 다가오는 법이오. 특히...... 당신 같은...... 아, 아니...... 모든 환시를 품은 이들이...... 끝내 다르진 않더이다."
그 말에 시즈는 눈썹을 찌푸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말의 고삐를 쥔 손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이 감돌았고, 그녀는 불안함을 숨기지 못한 채 노인에게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죠?"
노인은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희미하게 눈을 감은 그는 이내 속삭이듯 말을 이어갔다.
"수많은 이들이...... 환시를 품었소. 그들도 처음에는 모두 같았지. 하지만...... 그들 모두, 끝내 사명을 다하기도 전에 돌변했소. 계시도, 생명도, 신념도...... 그 모든 걸 짓밟고 파괴하며 죽음의 전령이 되었지."
노인의 말투는 비단결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날이 서 있었다. 조용한 어조 속에는 섬뜩한 조소가 스며 있었고, 들을수록 서늘함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자 아로스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했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던 노인은 한참 뒤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유혹이 있었다고 하더군. 그들 모두를 시험하는 유혹...... 그것은 끝내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소.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고, 굴복한 자들 위에......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다지. 심연의 깊은 어둠 아래...... 나락에 깃든 것."
잠시 말을 멈춘 노인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그 시선은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 어딘가 더 먼 곳을 내다보는 듯했으며, 마치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의 틈을 꿰뚫는 듯한 모습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되더이다. 당신도...... 그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아로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이 가볍게 떨렸지만 어떤 단어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머뭇거리는 그에게 노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그대의 걸음걸이가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그 끝이 바뀐다 하더이다."
말을 끝낸 노인은 그대로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발소리도, 기척도 없이, 마치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생존자라기엔 그 기척이 너무도 희미했고, 망령이라기엔 그가 남긴 경고가 지나치게 뼈아팠다. 왜 하필 지금 나타나 그런 불길한 예언을 쏟아낸 것일까. 환시를 품은 자들의 비참한 말로를 굳이 들려준 의도가 무엇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광인의 헛소리라 치부하고 싶었으나, 가슴 한구석을 파고든 찝찝한 불안감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시즈와 아로스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두 사람의 귓가에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한 노인의 희미한 웃음소리만이 잔향처럼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폐허의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우자 두 사람은 자연스레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잿빛 하늘 아래의 잔해들은 거대한 사체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 틈새마다 불길한 침묵이 스며들어 있었다. 건물들은 한때 벽돌로 단단히 세워졌던 듯했으나 대부분이 무너져 흔적만 남았다. 갈라진 벽돌 틈과 부서진 아치형 창문은 이곳이 한때 웅장한 교역소였음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었으며, 광장이라 불릴 만한 넓은 공간의 중심부는 알 수 없는 검은 덩굴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바큇살이 부서진 수레가 녹슨 채 방치돼 있었고, 그 금속 부스러기는 오래전 운송의 분주함을 떠올리게 했다. 강가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이미 말라붙은 물길이 희미하게 이어졌으며, 강둑에는 바랜 밧줄과 부서진 나무 상자가 무심히 널려 있었다.
그 곁에는 비석처럼 쓰러진 간판 조각이 바람에 눕혀져 있었다. 그러나 폐허의 쓸쓸함을 압도한 것은 그곳에 널브러진 수많은 시체였다. 감시탑에서 마주한 광경과 다르지 않은, 아니 그보다 더 기괴한 참상이었다.
두 사람을 멈춰 세운 것은 섬뜩한 얼굴들이었다. 시신들의 눈은 전부 비어 있었다. 눈동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깊고 공허한 어둠이 고여 있었고, 마치 마지막 순간에 끔찍한 무언가를 목격한 채 영원히 굳어버린 듯했다. 그 얼굴들이 교역소의 고요와 맞물리면서 숨 막히는 불길함을 한층 더 짙게 드리웠다.
시즈와 아로스의 시선은 자연스레 시체에서 강둑으로 옮겨갔다. 한때 교역소를 가로지르며 흐르던 강물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지만, 여기저기 남아 있는 흔적들이 이곳이 생명의 흐름으로 번성하던 시절을 아련하게 불러냈다. 강둑 옆으로는 물길을 따라 길게 뻗은 선착장이 있었으나 기둥 절반이 무너져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부패한 나무판에는 거센 힘에 깎인 상처가 남아 있었다. 부서진 창고에서 흘러나온 잔해 사이로는 다양한 물자가 뒤엉켜 있었다. 썩어 가는 섬유 뭉치와 깨진 도자기 조각, 반쯤 부서진 상자에는 곡물 껍질이 달라붙어 있었으며 그 옆으로는 녹슨 금속망과 함께 속살이 다 파 먹힌 가재 껍데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 시즈는 무너진 벽에 기댄 채 쓰러져 있는 나무 팻말을 발견했다. 표면은 먼지와 진흙에 뒤덮여 있었으나, 그 밑으로 희미하게 새겨진 글씨가 엿보였다. 말에서 내린 시즈는 손끝으로 거칠게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한 글자씩 읽었다.
"쿠베르 교역소..."
목소리는 스스로도 모르게 낮아졌고, 그 울림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스며 있었다.
부서진 심장의 노래 1-3부 - 심연의 추격 (3)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