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기사
부서진 심장의 노래 1-2부 - 심연의 추격 (2)에서 이어집니다.
아로스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주변을 훑으며 시즈 옆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멀리서 낮고 끊기는 흐느낌이 바람결에 묻혀 전해졌다.
처음엔 바람이 폐허의 구석을 스치는 착각 같았지만, 곧 그것이 분명한 울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한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깊은 절망과 혼돈이 한 곳에 엉킨 실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흐느낌이었다.
"저기서 들리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맞물림과 동시에, 아로스가 낮게 속삭이며 폐허의 어두운 구석을 가리켰다. 소리는 교역소 중심부의 무너진 구조물 뒤편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들을 폐허 끝자락에 묶어두고, 숨소리마저 죽인 채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의 근원은 땅속에 묻힌 지하창고였다.
"...지하로 이어지는군요."
아로스가 손을 칼자루 근처에 두고 속삭이자, 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첫 발을 계단 위에 올렸다. 가장자리를 따라 난 나무 계단의 삐걱이는 소리가 불안하게 울렸다.
지하 창고는 눅눅한 어둠과 차가운 공기에 잠겨 있었다. 거칠고 축축한 돌로 이루어진 벽면에는 오래된 금속 고리들이 녹이 슨 채 흉물처럼 매달려 있었다. 벽을 타고 흐른 오염된 지하수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작은 메아리를 만들었고, 공기 속엔 곰팡이와 부패한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흐느낌은 한쪽 구석에서 울려왔다. 조심스레 소리의 근원으로 다가가자, 그림자 속에서 웅크린 형체가 드러났다.
한 남자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군데군데 찢어진 누더기 같은 옷 아래로는 심하게 여윈 몸의 뼈마디가 선명히 드러났다. 피부는 흙과 말라붙은 피로 얼룩진 듯 뒤덮여 있었고, 굳은 핏덩이가 손가락 마디마다 들러붙어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숨이 끊어질 듯 가늘게 흐느끼고 있었다.
시즈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숨을 낮춘 채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여기에... 혼자 계신 건가요?"
그 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움푹 꺼진 눈은 충혈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고, 터진 입술 사이로 마른 숨이 새어 나왔다. 그 얼굴은 공포와 절망이 가면처럼 굳어붙은 형상이었다.
"...모두... 사라졌어..."
바람결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는 중간중간 흐느낌에 휘말려 끊겼다.
"그들이 나타나서... 다 죽여버렸어. 모두... 사라져 버렸어..."
시즈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남자의 어깨에 올렸다.
"그들이라니... 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둠에서 왔어... 무언가가 다가와서... 모두를......"
남자의 말은 한없이 불안정했고, 점점 더 흐려졌다. 다시 고개를 떨군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들은... 또다시 올 거야... 모든 것이 끝날 거야......"
주위를 둘러보던 아로스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시즈를 향해 말했다.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닙니다. 서둘러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로스의 단호한 말에 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희와 함께 이곳을 벗어나요. 더 이상 여기 머물러 계셔서는—"
"안 돼!"
남자가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 속에는 광기가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 아무도 나갈 수 없어...!!"
그는 다시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떨었다. 말과 행동은 뒤엉켜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공포는 한치의 거짓도 없는 듯한 불길함이 스쳤다.
"무녀님, 얼른 이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곳의 공기는 너무도 음습합니다."
시즈는 마지막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 혼란의 안갯속에서 웅크린 채 미동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지하 창고를 빠져나온 시즈와 아로스는 숨소리마저 눌러 담은 채 빠른 걸음으로 폐허를 가로질렀다. 차가운 지하의 공기와 남자가 토해낸 흐느낌은 아직도 두 사람의 가슴속에서 묵직하게 울리고 있었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시죠."
아로스의 낮고 가라앉은 말에 시즈는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무언가의 모습에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 한 명이 고요하게 서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폐허의 일부로 착각했지만 시선이 닿자마자 본능이 경고를 울렸다. 그것은 살아 있는 듯 보였으나 생명의 결은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농축된 공포만이 그 껍질을 채우고 있었으며, 인간과 비슷한 그 모습은 어딘가 결정적으로 어긋나 있었다.
부자연스럽게 꺾인 관절, 길게 늘어진 팔다리. 무수한 균열로 갈라진 갑옷의 틈새마다 썩은 살빛 같은 어둠이 배어 나왔다. 마치 금이 간 도자기 속에서 부패가 스며들다 곪아 터지는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 둔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투구 아래에는 얼굴이라 부를 수 없는 공간이 있었다. 칠흑 같은 공허 속에서 보랏빛이 깜박였고, 그것이 눈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소름 끼치는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하자 사나운 눈보라보다도 날카로운 한기가 기사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무녀님... 조용히, 제 뒤로."
아로스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절제되어 있었다. 손은 이미 검자루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성급한 움직임은 없었다. 기사 또한 여전히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었으나, 그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오히려 숨을 옥죄었다. 폐허의 고요가 한층 깊어지면서 공기조차 멎은 듯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그 순간, 기사가 갑작스레 고개를 번쩍 들었다.
"키이이이이——아아아아아아아아———!!"
투구 안에서 터져 나온 것은 단순한 비명이 아니었다. 쇳조각을 긁어내는 듯한 날카로움과 얼어붙은 피가 갈라지며 울부짖는 듯한 저음이 뒤엉켜 귀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숨을 들이마신 채 영혼을 쥐어뜯기는 감각이었다. 마치 뼛속 깊숙이 스며드는 절망이 공명하며 고막과 의식을 함께 찢어발기는 듯했다.
그 울부짖음이 공기를 가르자, 폐허 너머의 안갯속에서 어둠이 꿈틀거렸다. 먼 곳에서부터 수백 개의 말발굽이 대지를 두드리는 굉음이 밀려왔고, 검은 기사의 주위를 감싸며 망령 같은 기마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반쯤 썩은 말 위에 올라탄 채 달려왔다. 갈비뼈가 흉측하게 드러난 말들의 피부는 덩어리째 썩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기마병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너덜거리는 검은 갑옷의 틈새마다 삭아 문드러진 살점과 썩은 내장이 허물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힘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기괴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망령 기마대는 검은 기사의 비명에 반응하듯 그를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투구 속에서도 검은 기사와 똑같은 보랏빛이 깜박였다.
"움직이십시오. 지금 당장!"
아로스의 단호한 목소리에 시즈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레클레스와 다리아가 묶여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황폐한 광장을 가로지르는 순간, 검은 기사의 투구 속에서 금속을 긁어내는 듯한 비명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광장 안에 늘어선 기마대의 형체들이 그 비명에 화답하듯 일제히 고개를 들자, 아로스는 칼집을 스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강철빛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고, 기마대가 광장의 입구 쪽으로 몰려오는 모습을 확인한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외쳤다.
"지금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시즈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며 피어올랐다. 고요히 일렁이던 빛은 갑작스레 팽창하면서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순간적으로 뒤흔들리더니 파동이 폐허를 가로질러 망령 기마대를 휩쓸었다. 빛에 닿은 망령들의 몸에서 금속이 튀겨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고, 타는 냄새와 함께 기마대 일부는 그 빛에 붙잡힌 채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몇몇은 억눌린 사슬을 끊어내려는 듯 파동 속에서도 몸부림치며 이능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들려 하고 있었다. 그들 중 두 기병이 기어코 푸른빛의 구속을 찢고 튀어나왔다. 썩어 문드러진 손아귀에 쥔 녹슨 검이 공기를 가르며 내려 찍혔고, 얼굴가죽이 반쯤 벗겨진 말의 이빨 사이로 기괴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로스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검을 들어 첫 번째 기병의 일격을 받아내자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며 불꽃과 함께 날카로운 비명이 폐허에 울려 퍼졌다. 그는 손목을 비틀어 상대의 칼을 밀어낸 채 그대로 말의 목덜미를 베어냈다. 썩은 살덩이가 휘청이며 쓰러지자마자 아로스는 곧바로 몸을 돌려 두 번째 기병을 향해 파고들었다. 비틀린 궤도로 휘두른 검날이 스치는 순간, 그는 몸을 낮춰 피하고 허리를 가르는 일격을 꽂았다.
기병이 중심을 잃고 말에서 나동그라지자, 아로스는 곧장 첫 번째 기병에게 되돌아갔다. 발버둥 치며 일어서려는 팔뚝을 걷어차 또 한 번 쓰러뜨린 뒤, 무자비하게 입안으로 칼날을 쑤셔 위턱을 그대로 분리시켜 버렸다.
그러나 기병들의 움직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떨어져 나간 머리와 부서진 뼈들은 비명이라도 지르듯 끼긱거리며 꺾이더니,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생명이 깃든 움직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슬에 끌려 억지로 조종되는 꼭두각시 같았다.
그 사이, 시즈는 푸른빛의 장막을 유지한 채 레클레스와 다리아의 고삐를 풀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말들이 발굽을 굴려대자 그녀는 숨을 고르며 조용히 손을 얹었다.
"쉬이... 진정해, 얘들아. 금방 이곳을 벗어날 거야.”
말들의 거친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뒤늦게 도착한 아로스가 레클레스의 고삐를 움켜쥐고 안장에 뛰어올랐다.
"어서 떠납시다!"
아로스의 외침에 시즈도 다리아의 등에 올라 고삐를 당기며 속도를 붙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발길을 재촉해 교역소의 폐허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멀어져 가던 고요는 금세 깨졌다. 시즈의 이능이 서서히 사그라들자 뒤편에서 망령들의 절규와 말발굽이 다시 땅을 울렸다. 기마대는 비틀거리면서도 속도를 올렸고, 부패한 손들이 허공을 가르며 두 사람을 향해 집요하게 뻗어왔다.
짙은 어둠이 깔린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용인들의 대열 속에서, 오베디안은 선두에서 카노르 평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뒤를 따르는 수십 마리의 중견급 용인들은 아무 말 없이 대열을 유지했지만, 그들의 날개 끝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오베디안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협곡에서의 불쾌한 협상이 가시처럼 맴돌았다. 사브라트가 비디아의 요청을 수락하긴 했으나 그 태도는 줄곧 오베디안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놈은 말 끝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사브라트께서 왜 주교와 손을 잡으셨는지는 알았지만... 주교 또한 분명 협곡을 발판 삼아 음침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계획을 완성하려 할 터. 이번 계획은 용인들과 비디아의 신도들이 협공하여 무녀와 기사를 사로잡는 것이었으나, 결국 주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다는 생각이 속내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바로 그때, 한 가닥의 기지가 오베디안의 뇌리를 스쳤다.
사전에 먼저 그 둘을 가로채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것.
결심은 단단해졌다. 오베디안에게 있어서 비디아는 그저 협곡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불청객일 뿐이었다. 사브라트와 군단의 힘을 결코 가볍게 보지 못하도록, 그는 새로운 계획을 깊이 각인했다. 이번 협공은 주교의 놀음판이 아닌 사브라트의 이름 아래 세력의 미래를 쌓아 올리는 초석이 돼야만 했다. 상념에 잠겨있던 그의 시선은 어느덧 독구름 너머로 펼쳐진 카노르 평원에 고정됐다. 멀리서 카노르 평원의 실루엣이 어둠을 뚫고 드러나자 매서운 바람결과 함께 수십 쌍의 날개가 한 몸처럼 일제히 박동했다. 비늘 사이로 스치는 바람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각자의 그림자가 먹구름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짐승처럼 엉켜 흘렀다.
머지않아, 이 날갯짓은 평원의 적막을 흔드는 신호탄이 될 것이었다.
폐허가 된 교역소를 벗어난 시즈와 아로스는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부패로 뒤덮인 죽음의 평원 위로는 짙은 안개가 대지 위를 기어오르며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시스테나 전선 밖의 오염지대보다도 훨씬 무겁고 답답한 부패의 기운은 마치 대지가 천천히 그들을 집어삼키려는 듯 스며들었다.
등 뒤로는 수백의 망령 기마대가 바짝 붙어 추격해 오고 있었다. 살점이 썩어 문드러진 말과 기사들이 어둠에 휘감겨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처럼 몰려오는 광경은 등줄기를 서늘하게 얼렸다.
"집요하게 쫓아오는군요."
아로스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낮게 말했다.
"이대로라면 말들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저 정도 규모는 제 이능으로 오래 묶어둘 수도 없어요. 어떻게든 따돌려야 하는데, 방법이 없을까요?"
시즈의 목소리에는 숨 가쁜 호흡과 함께 조급함이 묻어났다. 말들은 이미 속도를 잃기 시작했다.
그 순간, 평원의 언덕 너머로 무너져 내린 성곽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노르 평원의 최서부 관문인 파론 성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