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갯속의 악몽
"성채가 보입니다!"
아로스의 말에 두 사람은 고삐를 더욱 거칠게 당겼다. 레클레스와 다리아는 지칠 대로 지쳤지만 뒤에서 몰려오는 소름 끼치는 기마대의 그림자에 떠밀리듯 마지막 힘을 쥐어짜 달렸다.
성채에 다다르자 그들은 허겁지겁 무너져가는 마구간 속으로 몸을 숨겼다. 마구간 안에는 축축하게 젖은 흙내와 부서진 목재의 쾌쾌한 먼지, 썩은 물에 절은 짚더미가 뒤섞여 있었다. 천장은 무너질 듯 위태로웠고, 벽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짙어지는 안갯속에서는 그마저도 훌륭한 은신처였다.
"잠시 숨을 고르죠."
성채의 폐허를 휘감은 안개는 모든 소리를 삼키듯 깊은 고요를 드리웠다. 그러나 평화는 찰나였다. 멀리서 말발굽이 땅을 울리는 소리가 번져왔고, 그 뒤를 잇는 건 짐승의 울음이 아닌 낮고 불규칙한 괴이한 숨소리였다. 망령 기마대가 성채로 스며들 듯 들어서는 모습에 아로스가 검자루를 쥐며 몸을 낮추자, 시즈가 손을 뻗어 이능을 펼쳤다. 손끝에서 번져나간 희미한 빛은 물결처럼 공기 중에 타고 흐르면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시즈는 조심스레 말을 달래며 빛의 흐름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집중했다. 마구간 안은 숨이 막힐 만큼 정적에 잠겼다. 천장의 들보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삐걱였고, 벽마다 난 구멍 사이로 안개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아로스는 반쯤 검을 뽑아 들고 좁은 틈 사이로 바깥을 주시했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안갯속에서 드러난 기마대의 선두가 뼈마디가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말들의 몸통과 다리에서는 달리며 떨어져 나간 살점이 매달려 있었고, 기수들은 마치 한 몸 같았음에도 부자연스레 움직였다. 그들의 일부는 카노라스 기마대의 흔적을 간직한 흉장을 달고 있었으나 이미 부패에 잠식되어 심하게 훼손된 형상이었다. 갑옷 틈새마다 스며든 어둠은 그들의 존재를 더욱 불안하게 뒤흔들었다.
그 순간, 기마대가 마구간 앞에서 멈춰 섰다.
'왜 멈춘 거지...?'
아로스는 숨을 죽이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기수 하나가 정적을 깨며 천천히 말머리를 돌려 마구간을 향했다. 투구 속 보랏빛 안광은 마구간 주변을 훑듯 움직이며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그 기수가 탄 말은 피가 역류하는 듯한 숨을 내쉬었고, 썩은 냄새가 마구간 안으로 스며들었다.
기수의 시선이 마구간 틈 사이에 숨어 있는 아로스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공기가 얼어붙는 순간, 아로스는 검을 뽑아 올릴 준비를 마쳤다.
"...들켰나요?"
시즈는 거의 숨을 삼키듯 낮게 물었다. 얇게 흔들리던 공간의 왜곡이 잠시 불안하게 일렁였으나 손끝에 힘이 더 실리자 간신히 제자리를 유지했다.
마구간을 응시하던 망령 기수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봤다. 기수가 등자를 밟아 말을 재촉하자 썩어 문드러진 말이 불안하게 몸을 비틀며 앞으로 나아갔다. 기마대의 발굽 소리와 뒤틀린 갑옷의 마찰음이 마치 신경을 긁어대는 듯 귀에 박혔다. 그들은 두 사람의 기척을 알고도 일부러 지나치는 것처럼 보였고, 그 애매한 거리가 오히려 가슴을 죄었다.
마구간 앞을 완전히 벗어난 줄 알았을 때, 마지막 기수가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뒤를 흘낏 돌아보는 듯한 그 시선이 멀리서도 시즈와 아로스를 꿰뚫는 것만 같았지만, 곧 안개가 그 형체를 삼키며 시야에서 지워졌다.
멀어져 가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구간 안의 긴장이 풀렸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갑자기 가벼워진 듯했고, 시즈는 긴장을 거두며 숨을 몰아쉬었다.
"...간발의 차였네요."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 그녀의 말에, 아로스도 서서히 검에서 손을 뗐다. 손끝에는 여전히 긴장의 떨림이 남아 있었다.
"황금의 땅을 누볐다던 기마대가 저렇게 비참하게 변했다니..."
"그들의 몰락이 평원의 파멸을 상징하는 것이겠죠."
"제가 알기로, 기마대는 카노라스가 멸망하고도 평원이 완전히 오염되기 직전까지 저항하다 자취를 감췄다고 들었어요.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광장에 서 있던 기사를 기억하십니까? 기마대는 그 뒤틀린 기사에게 조종당하는 듯했습니다.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타리안에서 보았던 이형의 짐승들도 비슷한 기운이었지만, 그놈들보다 훨씬 지독하고... 비교도 안될 정도로 불길했습니다."
아로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미묘하게 흔들려 있었다. 전투 속에서도 결코 평정심을 잃지 않던 그였지만 교역소 폐허에서 마주한 기사는 상상 이상으로 불길했다. 이 세상의 형상과는 거리가 먼 그 모습은 자신이 사선의 강기슭을 건너 다시 되살아난 이후 지금까지 겪은 수많은 전장 속에서 처음 느끼는 초자연적인 공포였다. 타리안으로 향하던 길에 맞섰던 짐승들의 기운과도 결이 달랐다.
그와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기분 나쁘게 익숙한 기운이 그를 감쌌다. 그것은 의식의 깊은 곳을 두드리며 오래된 기억처럼 맴돌았지만,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형태를 알 수 없었다.
'심연에 잠식되었다 해도 이런 기운을 느낄 이유는 없는데... 대체 뭐지?'
"...귀공, 평소와 다르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신 것 같아요. 무슨 일이신가요?"
시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로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뒤틀린 기사들에게서... 이상하게도 저와 닮은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말로 풀어낼 수가 없군요."
"익숙한 기운이라는 건가요?"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본질 속에 흐르는 힘이... 제가 지니고 있는 것과 닮아 있었습니다. 다만 같은 존재라고 느껴진 것은 아니었죠. 오히려... 본래 순수했을지도 모를 무언가가 심하게 변질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시즈는 한동안 그 말을 곱씹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 뒤틀린 기사도 귀공과 같은 환시를 품었던 이들이었을까요?"
아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시즈의 추측을 부정하진 않았다. 그리고 문득 아우로라에서 아텐시아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자신을 제외한 수많은 환시를 품은 전사들이 왜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더 궁금해졌다.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생각해요. 그들도 한때는 귀공처럼, 엘나의 힘과 환시의 등불을 품고 사명을 받은 이들이었을지 모르죠. 하지만 무언가가 그들을 변질시켰고... 지금은 심연에 잠식된 채 허울만 남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무녀님의 말씀대로라면... 세상 어딘가에는 저희가 알지 못하는 더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겠군요."
아로스의 말을 끝으로 시즈는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가 말한 '알지 못하는 비밀'이 단순한 비유가 아닌 오랫동안 감춰져 온 어떤 진실의 그림자를 가리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속에서 엘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만약 그들이 엘나의 사명을 받은 존재였다면... 어째서 엘나는 그들을 구하지 못했을까요."
시즈의 낮은 물음에 아로스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이 검자루를 가볍게 움켜쥐었다가 이내 풀리기를 반복했다.
"...결국 저희가 찾고자 하는 것이 엘나 아닙니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 엘나가 지금 그들을 구할 힘이 있을 리 없습니다."
아로스의 말에 시즈는 또 한 번 시선을 떨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현 세계의 참상을 떠올리면 그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듣고 보니, 귀공의 말씀이 맞네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고, 그 적막을 가르듯 아로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고삐를 잡았다.
"움직이시죠.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말입니다."
순간, 시즈는 갑작스러운 감각에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며칠 전 산란실에서 마주했던 기운이 공기 속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날 무너지는 산란실에서 두 사람은 도망치듯 빠져나왔기에 가르바가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폐허의 공기 속에서 느껴진 이 결은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그때, 대답할 틈조차 없이 아로스가 시즈의 앞을 막아섰다. 순식간에 마구간 한쪽 벽이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고, 틈 사이로 무언가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아로스의 검이 번뜩이며 그것을 가로막자, 부패한 살덩이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것은 괴이하게 비대한 오른팔이었고, 무너진 틈 너머로 비틀린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당신이... 어, 어떻게...?"
시즈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떨렸다.
그것은 가르바였다. 그러나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상체는 화상과 그을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타다 남은 검은 의복이 찢겨 늘어진 채 신체 일부를 덮고 있었다. 사라진 오른팔의 자리에서는 끔찍하게 뒤틀린 살덩이가 꿈틀대며 새 팔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며, 허리 아래로는 다리가 아닌 민달팽이를 닮은 연체동물의 흉측한 육체가 이어졌다.
부패와 심연의 기운에 절은 그 모습은 마치 시스테나 전선에서 보았던 괴물과 흡사했다. 마지막으로, 붕대가 벗겨진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오른쪽 눈은 빛을 잃어 초점 없는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한때 축복이 깃들었던 왼쪽 눈에서는 검은 액체가 울컥거리며 흘러내렸다.
"...그 힘, 내놔."
가르바의 목소리는 가래가 들끓듯이 갈라졌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시즈만을 꿰뚫었다.
"내놔아아아!!"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폐허를 울렸다. 아로스가 시즈를 지키려 앞으로 나섰지만, 시즈는 그보다 먼저 손을 치켜들었다. 번개가 하늘을 가르듯, 푸른 뇌격이 가르바의 앞을 내리침과 동시에 폭발음이 뒤엉켰다. 그녀의 전진이 멎자 시즈가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지금이에요!"
두 사람은 재빨리 말 위에 올라타 고삐를 당겼다. 레클레스와 다리아는 박차듯 마구간을 뛰쳐나가며 성채의 동쪽 출구를 향해 달렸다. 그 뒤로 가르바가 몸을 일으켰다. 미끌거리는 하반신이 질주하듯 바닥을 밀어냈고, 그녀는 검은 액체를 뿜어내며 괴성과 함께 미친 듯한 속도로 두 사람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파론 성채의 동쪽 성문을 빠져나온 시즈와 아로스는 카노라스를 향해 말머리를 곧게 세웠다. 발굽이 썩어 문드러진 대지를 두드릴 때마다 먼지와 독기가 솟구쳤고, 뒤에서는 미친 속도로 질주하는 가르바가 괴성과 함께 두 사람을 쫓았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거대한 날갯짓이 공기를 갈랐다. 그림자가 평원 위를 길게 드리웠고, 날카로운 비명 같은 바람 소리와 함께 용인들이 하늘을 가르며 나타났다.
'...저 둘인가.'
용인들의 시야에 포착된 두 기수. 비디아가 말한 대로 기사와 무녀가 있었다. 오베디안은 깊이 내려앉은 눈빛으로 그들을 굽어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시선이 뒤편으로 미끄러지면서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검은 액체를 뿌리며 두 사람을 맹렬히 추격하는 흉측한 괴물이 있었고, 그 괴물의 상체가 가르바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분명 협곡에서 소멸했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지금 부패한 살과 심연의 기운에 절은 몸뚱이를 질질 끌며 달려오고 있었다.
'믿을 수 없군. 그 정도 폭발이었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
오베디안은 그 참혹한 몰골에 잠시 눈빛이 흔들렸으나, 곧 시선을 앞의 두 기수에게로 돌리며 사냥감에 먼저 초점을 맞췄다.
아로스는 위와 뒤를 번갈아 보았다. 하늘에서는 용인들이, 뒤에서는 가르바가 쫓아왔다. 숨을 내쉴 틈조차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낮게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시간이 지날수록 말들의 숨은 점점 가빠졌고, 발굽의 리듬 또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레클레스와 다리아는 죽을힘을 다해 땅을 박차며 속도를 올렸지만 언제까지고 달릴 수는 없었다.
그때, 시즈가 고개를 들었다. 뭔가를 결심한 듯한 눈빛과 함께 고삐를 잡아당기자 다리아가 급히 멈춰 서며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시즈가 안장에서 뛰어내리는 광경에 아로스는 곧장 말을 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무녀님, 뭘 하시려는 겁니까?"
당혹감이 묻어나는 물음에도 시즈는 대답 대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력이 전신을 휘감으며 소용돌이쳤고, 흐름은 서서히 왼쪽 눈으로 몰렸다. 그 응축된 마력이 손끝으로 전해지면서 주변의 빛을 집어삼키자, 평원 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으면서 하늘은 짙은 먹빛과 불길한 빛깔로 뒤섞였다. 그 모습을 굽어보던 오베디안은 어이없다는 코웃음을 쳤다.
"벼락이라... 우리를 상대로? 어디서 하찮은 장난 따위를..."
시즈는 숨을 고른 뒤 속으로 짧게 기도를 올렸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결심이 가슴속에서 뿌리내렸다. 하늘의 구름이 찢기듯 뒤틀리기 시작하자 응축된 뇌격의 중심에서 푸른빛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왼쪽 눈을 덮은 가면의 문양이 폭발하듯 빛을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