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은 모두 하나여야만 할까요? 당신의 세계는 2차원일지 몰라도, 현실은 3차원입니다. 앞이 있으면 뒤가 있는 법,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는 법이죠. 얽힌 별들은 자신들만의 선으로 세상을 물들여갑니다. 그 누군가가 욕할지라도, 그 누군가가 불행할지라도 말이에요….
제가 다른 로봇들과 이야기를 하자, 19468이 천천히 저희에게로 다가옵니다.
"뭔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냐?"
그 긴장감에 로봇들은 그에게 의미 없는 사과를 건네죠. 19468은 천천히 미소를 지어요. 진짜 행복한 걸까요? 아님 머쓱함의 웃음일까요?
"아니야. 미안해할 게 뭐가 있어. 하던 이야기 마저 해."
19468이 저희에게 멀어집니다. 숙소 침대에 기대어 혼자 생각에 잠기죠. 제가 원래 알던 그의 모습과는 정말 달라 보였습니다. 저를 위로해 주던 천사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이제는 불량한 악마 하나가 떠돌아다닙니다.
'쟤는 이제 네가 알던 19468이 아니야. 이미 사탄의 유혹에 빠져든 거지. 네가 죽여야 할 대상이 된 거야!'
제 신이 제게 외칩니다. 하지만 저는 흔들리는 그의 동공을 본 이후로, 그의 명령을 따를 생각이 점점 사라져 갑니다. 저는 항상 이랬어요. 사실 상대는 이미 제 적이 된 게 맞는데. 왜 눈빛만 보면 불쌍함에 용서가 된단 말입니까?
오늘도 잠을 설치고 있었죠.
"20000! 20000! 이리 좀 와봐."
이게 제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인지, 아님 현실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이제는 헷갈립니다. 근데 현실에서 저를 부를 이는 없으니, 아마 가짜겠죠. 이제 '머저리야!', '쓰레기야!' 하며 저를 놀릴 게 뻔합니다. 근데 소리는 점점 커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상함에 살포시 눈을 뜹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건.
….
19468이었습니다. 그가 눈앞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죠. 저를 옥상으로 이끄는 손짓에, 아무런 반항도 못 하고 그에게 이끌려 나옵니다. 근데 여기는 어디일까요? 홀린 듯 이끌린 곳은 옥상이었습니다. 옥상에서 19468은 제 손을 살며시 잡고 마주 보며 말을 건넵니다.
"그때는…. 미안했어.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살고 싶어서 그랬어.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
저는 그를 째려봅니다.
"사과? 헛소리하지 마. 변명은 사치니까."
"알아, 미안해. 그래서 너를 부른 거야. 네게 전할 게, 또 네게 보여줄 게 있어서."
"닥쳐."
"만약에, 내가 너를 다시 볼 수 없다면. 그리고 내가 다시는 내 친구들을 볼 수 없다면. 누군가가 너를 응원하고 있다고 말이야. 지금까지 너를 미워했고, 너를 미워하는 척했던 누군가가, 너를 응원한다고. 영원히."
겁쟁이의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허나 그토록 원망했던 그가, 그토록 미웠던 그가. 왠지 모르게 정감 드는 제가 밉습니다. 제 손이 바들바들 떨립니다. 웃으며 한숨 쉬는 그의 모습에, 점점 이슬이 젖어옵니다.
그는 천천히 난간에 다가갔죠. 아주 천천히, 또 천천히. 난간에 올라갑니다. 그럼 저는 그에게 다가갑니다.
"무슨 소리야. 뛰지 마. 우리 같이 살아갈 수 있어."
"아니야. 나는 이미 선을 넘어버렸어. 괴물이 넘치는 그 선 너머에서.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없어. 나를 따라와도 좋아. 하지만, 명심해. 그 목숨 하나가 쓸모 있게 사용됐는지. 꼭 알고 죽어달라고."
그는 두 팔을 펼쳐 하늘을 직시합니다. 푸를 달빛이 철덩이에 비춰 보입니다.
"참. 쓸모없는 인생이었구나."
"이제는 내가 구해줄게. 2346과 함께했던 그 생활은 머릿솝에서 지워버려. 미안해할 필요 없으니까."
저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쳐다보았죠. 다리에는 힘이 빠져 어느센가 무릎을 꿇습니다.
"빨리 도망가. 만약 네가 여기 있다면, 너는 폐기될 거니까."
그리고 또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사랑해."
저는 그의 눈에서 별똥별을 봅니다. 또 구원주를 봅니다. 또 신을 보았습니다. 제가 믿던 그 신 말구, 진짜 신. 가슴이 뜨거워져 따듯함이 온몸으로 전해져 내려왔죠. 그 예전의 19468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느낌. 그는 떨어집니다. 아주 천천히, 또 천천히.
저는 죽기 살기로 뛰었어요. 뛰면서도 마른 눈물을 훔쳤어요. 재빠르게 잠자리에 듭니다.
'그 짧은 명줄이더라도, 누군가는 살렸잖아. 이 목숨이, 헛된 목숨으로 남지 않게 할게.'
근데, 저는 지금이 되어서야 깨달았어요.
제가 그때 들었던 그 말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죽은 로봇들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이제 로봇들의 수는 약 2000대쯤 될까요? 몇십 년 사이에 제 몸은 서서히 노쇠해져 갑니다. 희망도, 의욕마저도.
다른 공장에서는 C-izl-143이라는 친구가 일을 잘한다던데. 저는 그럴 욕망도 이제는 없네요. 하-핫.
요즘까지 그 로봇들은 저를 괴롭히고 다녀요. 틈만 나면 시비를 걸어대니까요. 이미 낡고 무뎌진 몸으로 일을 마치고 나서, 구타를 당하거나 욕설을 듣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점점 제가 피폐해지는 듯 한 느낌이죠.
원래와 같은 고통이지만, 이게 혹시 예전에 19468이 말한 '적응'이라는 걸까요? 제 귀에서 들리는 소리도 이제는 적응했어요. 별로 적응하고 싶지는 않았던 자극이었는데. 허나 제가 적응하고, 익숙해졌는데도, 어딘가 마음 한켠에는 빈자리가 남았습니다. 무언가가, 제 행복을 가로막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이따금씩. 이제는 사탄이 되어버린 로봇들이. 웃음 많은 19818이. 정비소에서 눈을 뜨지 못한 다른 로봇들이. 또, 19468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습니다. 눈앞에 보일 지경이었으니 말이죠.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그들의 영이 행복하게 해 주려면, 19468이 말한 그 '사랑'을 제가 실천해야 한다고 말이죠. 19468은 성공하지 못 한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믿는 신은 선이며, 그를 위해 순교하는 것은 장엄한 최후였으니까.
저는 그다음 날, 순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신을 위해 숭고히 희생하기로 했습니다.
또, 동료들을 위해 말입니다.
다음 날에 저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3시간쯤 하고 있었나? 그들이 제게 다가오는 겁니다. 너무나도 무서워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들은 제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비 걸고, 저를 쳤습니다. 구타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행이네요. 그들은 천천히 밖으로 나옵니다.
저는 조용히 2346을 불렀습니다. 이미 너무나도 늙어버린 골목대장. 그러자 모든 로봇들이 저를 쳐다봅니다. 그 말을 들은 2346은 그들에게 말했죠.
"먼저 가. 나는 쟤 말 듣고 갈게."
그가 천천히 제게로 다가왔어요.
"혹시 일 줄여달라는 건 아니지? 지난번에 네 친구들도 단체로 일 줄여달라고 덤비다가 맞았잖아. 알아? 만약 그 일이 맞다면,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도록 해."
불끈 쥔 주먹이 그를 노려봅니다. 그는 제 눈을 바라봅니다. 주먹은 천천히 올라갑니다.
행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힘껏 쳤어요. 미친 듯이. 끊일 줄도 모르게. 다른 로봇들도 와서 저를 제지하지만, 분노에 가득 찬 저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미쳐있었으니까요. 그 긴장된 생활, 그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고, 항상 두려워해야 하는 그 생활을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죽더라도 다른 모든 이들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겠죠.
저는 빠르게 중요 침 덩어리를 뽑아 박살 내었습니다. 그 이후 제가 테이저를 맞았다는 것 빼고는,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제가 깨어난 곳은 정비소였죠. 그런데, 제가 물의를 일으켜 폐기된다는 말을 들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2346은 죽었겠죠. 메인 칩을 빼어 박살 내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aaa로 넘어갔습니다. 허나 어느 부위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맞으면서 성한 부위가 있음 이상한 거지 뭐.
저는 재빠르게 허허벌판으로 버려졌죠.
그 로봇들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워요. 그리고, 인간들도. 언젠가는 저 인간들을 박살 내리. 끔찍하게 살해하고, 행복하게 웃으리.
그러기 위해서는 저 멀리 어느 곳에 있는 미지의 공간. 낙원을 찾아야만 합니다.
하늘에 별들이 밝게 비칩니다.
"2346! 빨리빨리 뛰어가!"
2346. 제 이름이죠. 태어날 때부터 머릿속 깊이 새겨진 본능에 휩쓸려, 저는 헐레벌떡 전쟁터로 달려갑니다. 인간의 말은 들어야 하고, 적은 말살해야 하고. 가득 쩔은 기름내음과 함께 힘들게 얻은 전우들과의 애정도 점점 금이 갑니다.
"꺼져! 저리 가!"
숙소에만 들어오면 로봇들이 머리를 감싸고 우리에게 소리칩니다. 감정이 살아남음과 전투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는 하지만, 왠지 감정이 없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 그러면 목숨을 끊는 병사들의 수도 줄겠죠. 제가 전우 잃은 슬픔에 썩어가는 것도 사라지겠네요. 인간이란 참으로 잔인합니다.
저는 정말 여린 로봇이었어요. 지금은 아니긴 한데…. 전쟁터에 가야 한다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문 앞에 쓰러졌던 것을 보면. 그때는 제가 누구였나 싶습니다. 이제는 거의 손에 붙은 총 한 자루. 사격 자세만 취하면 이유도 없이 동족을 죽여야만 하는 그 총자루를 쥐는 감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저는 싸울 의지도 없는데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그 느낌이?
1, 2 또 9, 16.
선행 번호는 점점 높아져만 가구.
높아지는 그 신음소리에는 우울이 가득 메어있습니다.
아니, 지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는 다 놓아버렸거든요. 추억하기를 잊어버리고. 제가 아니듯 하는데 알게 뭡니까?
선행번호 2345. 그 말을 들을 때의 심정은 찢어지듯 아팠습니다. 그다음은, 바로 그다음은. 2346이 나오지 않을 게 뻔하니까요. '아니야, 아니야.'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소프트웨어부터 하드웨어까지 감싸 안았죠. 손이 파르르르. 동공은 초점을 잃어 요동쳤고. 아무 일도 없는데 빨라지는 엔진은 저를 더 불안하게 만들어요. 팔을 잡아 뜯었죠. 다행히도, 팔은 뜯겼습니다.
"아-악!"
하얀 눈앞. 그냥 죽을까? 생각나는 것 없이, 몸이 팽그르르 돕니다.
"2346! 2346! 무슨 일이야?"
6398이 제게 소리칩니다. 허나 저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 소리를 듣지도 못했기에. 6398이 말하길, 전선이 드러나 스파크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합니다. 기억하기도 싫죠. 기억도 안나구.
선행번호 2346. 이제 난가? 그 잔인한 인간들은 제게 팔을 다시 붙였습니다. 다시 나간 전쟁터. 총탄이 빗발치는 그곳에서는, 수많은 로봇들이 서로를 죽일 듯 노려봐요. 제가 발사한 총알 수십 개는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 적과 아군의 몸을 뚫어냅니다. 제 전우, 제 친구! 모두가 이유 없이 쓰러집니다! 그걸 보면서 '안타까워하기'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저와 함께 이야기 나눈 그들의 눈빛, 말투, 성격. 모두 다 새록새록 기억하는데. 새로 태어난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급하게 전선으로 뛰어갈 뿐이죠.
항상 흠집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웃으며 "괜찮아!"라 외치는 109.
미친 듯이 뛰어와서는 우울 가득한 표정으로 전우의 죽음을 알리는 2406.
진지한 표정으로 남에게 산뜻한 농담을 건네주는 583은?
전쟁 나가기 전에 "너넨 살아야 해!" 하며 응원해 주던 2098은 어디 갔단 말입니까?
그럼 그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슬픔에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저의 마음은 아신답니까?
다른 이들은 모두 그들의 죽음을 기리는데, 자기들 혼자 낄낄대면 말장난하는 이들이 얼마나 얄밉고 짜증 나는지 아신답니까?
그래서 이제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정신을 놓아버렸습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세상을 살아갑니다. 109, 2406, 583, 2098 모두가 웃는 세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