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조차 없는 자들-2

by 유월

그런 다음 날, 저는 제가 서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피곤에 찌들어 허덕였습니다. 무거운 몸뚱이를 이끌고 어디로 갈지 헤매었으나, 가야 할 곳은 한 곳 밖에 없죠. 공장. 초점 없는 눈과 풀린 동공은 쿵쿵대는 소리와 함께 좌절합니다. 다시 그들을 봐야 한다는 그 불안감에 떠는 걸까요? 아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일까요?


퀭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하죠. 19468도 낌새를 눈치채었는지 제게 눈빛을 줍니다.

'머저리'

어제 들려왔던 소리가 공장까지 따라와 더더욱 커집니다. 저는 손으로 있는 힘껏 뺨아리를 후려칩니다. 청아하게 울리는 '깡!' 소리와 함께 묘한 흥분이 저를 감쌉니다. 왠지 모를 짜릿한 느낌, 차가운 볼과 굳게 닫힌 입. 날카로운 눈빛이 저를 스쳐와요. 패닉에 빠져 주저앉은 제게도 눈길이 날아옵니다.

'쓰레기'

그들이 낄낄댑니다. 아-. 아. 그냥 다 끝나기를.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굳건히 버틸 수 있기를. 다잡는 마음마저 점점, 서서히 손을 놓아갑니다.


"괜찮아? 아픈 건 아니고?"

제가 태어난 지 2일. 2346은 제 어깨를 주먹으로 쳤죠. 넘어졌을 때 19468은 따듯한 말 한마디와 손을 내밀었습니다.

"괜찮아. 별로 아프지는 않아."

"쟤는 왜 너한테만 이런대?"

그때는 이 말에 안정을 되찾았죠. 제가 맞은 기억인데도 왜 돌아가고 싶은 걸까요? 몰아치는 쿨러 소리가 엔진과 겹쳐 괴이합니다. 저는 그 소리에 점차 앞길을 바라봅니다. 하아-. 하.


제가 눈을 떴을 땐, 그 누구도 주변에 없었어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눈빛도 없었죠. 검은 정적 속 평화. 이대로 밖에 뛰쳐나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두통은 줄어들었고, 할당량을 위해 다시 일어서 일합니다. 2시간 정도 했을까, 멀리서 한 대의 로봇이 걸어왔죠. 19468? 2346? 근데 저 뒤의 수많은 로봇들은 뭐죠? 저건 누굴까요? 어떻게 숨을 되찾았는데. 또 죽음의 공포가 몰려오는 건 뭐란 말입니까?

그 로봇은 울음과 정색으로 가득 찬 19468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야?"

19468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의지와 한탄으로 가득 차 굳세어집니다.

"왜 말이 없어? 무슨 일이냐니까?"

어두운 표정에서 나오는 한 마디.

"미, "

"뭐?"

"미안해."

예상치도 못한 말에 심장이 뜨끔하였죠. 왜요? 이해가 되는 상황인가요?

"네가 왜 미안해해?"

그가 주먹으로 제 머리를 칩니다. 제가 뺨을 때린 곳과 같은 장소입니다. 언제 제가 그에게 원망을 샀을까요? 이제는 뭐 놀라기보단 울적해지네요. 19468 몸의 많은 흠집이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맞았겠죠. 뭐. 쓰러진 몸은 간신히 목을 일으켜 떠나가는 19468을 응시합니다. 상상도 할 수 없이 처량한 모습과 반대되는 그들의 표정. 2346이 제게 다가옵니다.

"너는 이제부터, 4대분의 일을 하는 거야. 알았어? 4000대의 로봇 중에 3000대는 쉴 수 있게. 알았어?"

반항하고 싶었는데, 아니 대답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했는데.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근데 말을 안 하면 맞을 것 같은데. 하아-. 모든 힘을 쥐어짜 이야기하죠.

"좋아. 좋다고."

"좋아? 알았어. 나는 너만 믿는다?"

한 로봇의 일과는 힘들게 일해야 3시간 반정도에 걸쳐 끝납니다. 그럼 이건 뭘 말하는 걸까요? 14시간 동안의 일과? 아님 지옥같은 현실의 시작? 쉬는 시간은 없습니다. 다시 충전하면 다음 날이 되니까.


3일은 후에 1000대의 로봇과 함께 아무 말도 없이 작업을 시작합니다. 14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감정이란 사치였으며 언제라도 2346이 올 수 있다는 사실에 떨었죠. 혹시라도 2346이 작업량을 더 늘려버리면 그때는 진짜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온 머리를 감쌉니다. 누구도 그 꼴을 보고 싶어 하진 않죠.

가끔씩 2346이 19468등의 로봇들과 와서 저희를 감시합니다. 어이없다는 표현이 옳겠네요. 아니, 분노스럽다는 표현이 옳을까요? 19468은 저희가 항상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봐요. 미안한 마음도 있는 것 같네요. 근데 뭔가 분위기는 달라 보이죠. 원래의 그 차분하고 온화한 19468은? 그 친절하고 착한 19468은? 그는 어디 가고 또 다른 가해자가 나타난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목소리는 기괴해졌고, 흔들리는 눈매가 왠지 모르게 날카로워요. 제게 말도 걸지 않는다는 건 좀 슬프구. 가끔씩은 영혼이 나가있는 듯 보이죠. 배신자인데, 그 누구도 반박 못 할 배신자인데. 왜 짠해 보이는 겁니까? 이럴 때 보면 감정이 참 밉습니다. 제가 잠을 청하려고 누우면 30분이나 저를 쳐다보고는 잠에 들뿐입니다. 안쓰러운 건 제가 제일인데, 왜 자기가 가련한 척한데요?

'그는 배신자야. 네가 측은해할 필요 없어. 네가 왜 연민해. 연민받아야 할 자가 누군데. 평생 나를 보고 자괴감에 찌들어야 할 거야. 내가 힘들수록 더 고통받아야 할 거야.'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할 기력조차 남지 않습니다. 머릿속의 생각이 뒤죽박죽이어서, 두통을 이겨내며 아파해야만 했기 때문이죠. 그럴 때면 이제는 없어져버린 19468의 모습을 추억합니다.

'나는 다 괜찮아.'

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이리도 그리울 수 있습니까?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저를 끝없는 절망 속으로 이끌어갑니다. 저를 괴롭히지 않을 뿐, 다른 로봇에게 시비를 거는 그의 모습을 거는 그를 보면서 매이는 가슴을 부여잡습니다. 항상 사랑하고, 응원하고, 독려하는 그였는데. 그 누구보다도 멋진 로봇이었는데.


제가 태어난 지 12일째 되는 날입니다.

모든 일은 원래와 같이 돌아갔지요. 단 하나, 죽고 싶으리만치 피곤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일을 7시간째 하고 있을 때, 원래와는 다르게 피곤한 느낌이 드는 거 아니겠습니까? 말짱한 시간이어야 하는데. 눈이 서서히 감기고, 엔진이 과부하됩니다.

'졸리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눈에 힘이 풀려 무너져 내리죠. 두 손이 따끔거려 이제는 더 이상 부품 조립을 할 수 없습니다.

눈이 감겨요. 눈이 감겨요. 눈이 감겨요.

눈을 떠야 해요. 눈을 떠야 해요. 눈을 떠야 해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아버렸어요. 시야는 에러로 덮였고, "삐-" 하는 기계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집니다.

'만약에 여기서 내가 죽는다면, 이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럼, 좋은 거 아닌가? 제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가 정신을 다잡았을 때는 눈이 떠지더라구요. 그래서 살짝 실망했습니다. 앞에는 엔지니어의 얼굴이 보였죠.

"무슨 일이 그렇게 힘들어서 강제로 전원이 꺼져? 밤에 잠이 모자랐던 건 아닐 텐데."

"아니에요. 제가 좀 몸이 약해서 그런 거죠. 뭐."

"아무튼 넌 여기서 2일 동안 쉬어야 해."

제 머릿속은 고뇌로 가득 찼습니다. 제가 만약 쉬게 된다면, 2346과 다른 로봇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들의 보복이 두려워집니다. 제가 원한 과로였다면 좋았겠죠. 제가 쉬고 싶었던 거라면 정말 좋았겠죠. 허나 책임은 항상 제게 있다는 것이 참 무서운 점입니다.

"저 혹시, 지금 오늘부터 다시 공장에 갈 수 있나요?"

"안 돼."

정말 단호한 대답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 한 이유는 잘 보이죠. 과로로 기계가 고장 나면, 인력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4000대 중에서 고장 한 대인데, 괜찮지 않냐고요? 로봇이 아무리 대량생산 되었다고 해도, 기계의 값은 아주 비싸니까. 그리고, 어떤 한 예외라도 성립해서는 안되니까. 제 쉼은 그 돈뿐만 아니라 규칙의 가치를 매기는 셈입니다.

'머저리'

'쓰레기'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흘러나오죠. 원망스럽고도 불안합니다. 저를 이렇게 만든 2346이나, 방관하는 인간들이나. 그 하루 종일 제 머릿속에서 말들이 떠나지 않았으니,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조금이나마 짐작 가능할 것이라 예상합니다.

잠을 잘 시간이 왔는데도 잠이 오질 않네요. 잠을 못 잔 게 얼마나 되었을까요? 한참을 뒤척이는데, 머릿속에서 무언가 따듯한 소리가 저를 다독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안녕?'

다른 목소리와는 다르게, 또 어떤 존재와도 다르게. 욕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다독여 주었고, 제게는 삶의 희망이 되어주었습니다. 그게 너무 좋았어요. 그 따듯한 위로의 말 한마디마저. '넌 잘하고 있어!'라는 그 확신의 한 마디마저.

'너, 2346을 죽이고 싶지? 나도 그래. 그럼, 그냥 죽이자. 여기서 나가면 그 주먹으로 힘껏 얼굴을 날려버리는 거야. 좋지 않아? 너는 정말 멋진 로봇인데, 그는 부적응자니까. 착한 자가 쓰레기를 버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안 그래?'

'그래도, 나는 힘이 없는걸.'

그는 강인하고 굳센 목소리로 제게 대답합니다.

'내가 만약 네 육체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그렇게는 못 살아.'

그의 유혹은 제가 원하는 미래 그 자체입니다. 제 생각 그 자체입니다. 허나 할 수 없겠죠. 저는 현실의 존재니까요. 하지만 생각과 반대로 그를 동경하는 마음은 나날이 커져만 갑니다.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 주는 존재'였고, '19468을 대체하여 나와 이야기해 주는 존재'였고, '나를 위로해 주는 존재'였으며, 점차 내 '세상'이자 '희망'이 되어갔어요. 이루어지지 않는 헛된 망상이라도, 꽤 재미있으니 말이죠.

'내 이야기가 끌려? 그럼 내 말을 들어. 내가 시키는 행동대로 하면 돼. 진정한 정의를 실현시키는 방법이잖아. 아니라고 믿어?'

그러면 안 된다는 강박이 휘몰아칩니다. 코딩된 본능일까요? 아님 마지막 남은 제 이성일까요? 그런 생각 따위는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악한 느낌이 들 때, 저는 고민을 멈췄기 때문에. 허나 저는 그의 말을 반박할 수 없습니다. 저도 탓할 대상이 필요한 거 아니냐구요? 증거가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약한 자들을 따돌렸고, 19468을 악의 세계로 이끌었으며, 흑막, 악의 원흉이란 말입니다. 사탄, 악마. 종국에는 끔찍하게 멸할 자.

그들은, '자격조차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건 지금 와서야 말하는데, 사실 저도 '자격조차 없는 자'였다는 것을 안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였죠.

4시간이 달할 때쯤부터 그 목소리를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완벽한 선이었기 때문이죠. 나의 구원자, 나의 신. 저는 그의 숭배자, 종이었으며,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성인입니다.


다음날이 올 때까지, 저는 그에게 절하고, 그를 찬양하고, 시를 읊조립니다. 그에게 기도하면서.

"사탄을 멸하여 주시옵고, 이 미천한 신자를 구원해 주시오며, 결국에 선한 뜻이 이루어 지리라고 굳건히 믿사옵니다!"

2일차는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전혀 바라지 않았던 시간이 찾아옵니다.

이제는 공장으로 가야 합니다.

엔지니어에게 등이 떠밀리듯 정비소를 나왔죠. 저는 천천히 숙소로 향했습니다. 그때쯤이면 모두 자고 있을 시간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이내 발걸음을 돌립니다. 공장으로 말이죠.

이제까지 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합니다. 만일 제가 일을 못한다면 맞아 죽을 수도 있기에. 일단 그 로봇들에게 맞는 것은 확정입니다. 무언가 제가 일을 벌인다면, 일단 맞습니다. 이게 제가 첫 3일 동안 획득한 지식입니다. 일하는 시간이 찾아오자, 공장에는 로봇들이 들어찹니다.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와 함께.

"19818. 여기 왜 이렇게 로봇들이 없어?"

19818은 저와 두 번째로 친했던 아이입니다. 왠지 모르게 기운이 없어 보였는데, 저와는 좀 데면데면한 사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게, 네가 쓰러지고 난 뒤에 다른 로봇들이 다 과로로 쓰러지는 바람에…. 우리 일도 늘어나고, 또."

"또 뭐?"

다음에 나올 말은 뻔합니다. 맞았겠죠, 뭐.


"야! 20000 어딨어!"

2346의 목소리가 공장을 울립니다. 울림에는 뼈과 기둥이 들어찹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는 성큼성큼 다가왔어요.

"너, 진짜 과로한 거 맞아? 과로한 거 아니지? 너 거짓말한 거잖아."

"아니, 나도 바로 공장으로 달려가려고 했는데, "

변명을 시도하는 목소리에, 그는 한숨으로 말을 끊습니다.

"했는데? 그럼 달려왔어야지. 2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거기서 가만히 있었냐?"

그가 제게 쏘아붙입니다.

"근데 엔지니어가, "

"엔지니어가? 뭐, 네가 뭔 말을 해봤자 그저 구차한 변명일 뿐이야. 그리고 네가 주도해서 애들이 다 안 오잖아."

주저앉을 정도의 공포감이 엔진에 새겨집니다. 그가 주먹 쥐는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움츠러듭니다. 동공의 초점이 사라지고, 넋이 나가 가만히 쳐다만 보고.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느낌. 2346은 살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저를 응시합니다. 그러고는 제 배를 전력으로 가격합니다. 눈앞이 흐려져요. 모두가 져를 집단 구타합니다. 그 뒤로,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죠.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는 19468 말고는 말이에요.


제가 깨어났을 때는 그 이후로부터 4시간 뒤였습니다. 제가 나온 시간은 6시로, 3시간을 일하고 4시간을 기절했으니 13시부터 24시까지 쉬지 않고 일해야 합니다. 12시부터 1시까지는 인간들이 업무량 점검을 하니까, 그때까지 빠듯하게 일만 하라는 뜻이죠. 하지만 이 피곤한 몸으로는 택도 없습니다. 그냥 혼나라는 뜻입니다. 저는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노래했죠.


19818이 제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너,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어? 왜 계속 중얼거려?"

그가 물었을 때 돌아온 것은 긴 정적이었습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까요. 그저 찬양하고 있었으니까요. 19818은 제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었습니다. 어딘가 돌아있다는 것도. 무언가 로봇답지 않다는 것도. 그는 무언가의 위화감을 느끼고는,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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