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세상은 진정 완벽한 세계라고 볼 수 있을까요? 당신의 삶을 돌아보면 그에 대한 정답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페르노트, 이곳에서는 꽤 흔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저는 격식적 표현으로는 피에라이트로도 불립니다. 암튼, 오늘은 특별한? 아니, 독특한 날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가장 거대하고도 위대한 회사라고 불리는 이자벨의 회장 이디씨가 저를 회유한다고 친구 발렌티나가 식사자리를 주선한 겁니다. 지난번에 한 번 봤을 때도 굉장한 미남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말이 잘 통하는 성격인지라 굉장히 좋게 보고 있었으니 별 상관은 없죠. 원래는 깐깐하고 말 잘 안 통하는 사람 이랬는데, 사람들이 그를 잘못 아나 봅니다.
"안녕하십니까 피에라이트씨. 제가 좀 늦었죠?"
만나기로 한 시각은 4시, 지금은 3시 53분입니다. 늦었을 시간은 아닌데 사과부터 하는 모습이, 고급스러우면서도 신사 같은 분위기를 풍겼죠.
"일단 앉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는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군인이 된 거지, 기업을 위해서 로봇을 토벌해 줄 생각은 없습니다. 만약 그 로봇들이 인간들을 해치기라도 한다면 도와줄 생각은 있는데, "
"잘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지금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어요. 전부터 주요 인사들이 신 약물 복용문제로 사망했지 않습니까? 이자벨 내에서는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란 것을 모두가 압니다."
저는 눈이 둥그레져서 그의 눈 속 공허함을 응시합니다. 존경하는 이를 잃었다는 슬픔과, 매출 때문에 그러면서도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는 경험. 그의 감상이 공기 속 정적에서 뼈를 타고 흘러 들어옵니다. 저 또한 정의를 수호한다는 신조와,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두 생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죠.
'분명 내가 원한 세계는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네. 로봇은 로봇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 사이에는 제가 억지 부릴 수 없는 어떤 간극이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지금 뿐만이 아니라 항상, 제가 원한 길로 가질 못했습니다. 반박할 거리를 못 찾았다고 할까요? 아님 제가 너무 나약하다고 해야 할까요? 허나 이젠 저의 세상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정적이 흐른 이후, 결심에 차 그에게 입을 엽니다.
"제겐 친구 한 명이 있었어요. 재벌가의 남아였죠."
기억 속 깊이 잠든 그 아이의 말들을 빌려봅니다. 시간이 너무나도 오래 흘러 이제는 낡아버렸지만 아직 힘을 가지고 있는 그 명언들을, 시간이 지나버려 이제는 누군지도 잘 모르지만 아직 신을 논박할 수 있는 그 명언을.
"페르노트. 난 우리 기업이 싫어."
"왜?"
그 아이는 오똑한 콧날 아래 보드라운 뺨을 팔에 괸 채, 마치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는 듯 천천히 말을 계속했어요. 시선은 어딘가 먼 곳에 머물러 저를 쳐다보지는 않았으나 저는 그가 저를 쳐다본다는 듯 설레어하고 있었습니다. 총명함과 날카로움은 그를 꾸며주는 수호신과도 같아요. 백리 밖의 사람들마저 사로잡을 수 있는 아름다움은 그의 외모에 머무르지 않았죠. 숨을 고르고 내뱉는 그 문장 하나하나, 조심스레 고른 단어들 사이사이에 스며들어있는 언어의 세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진짜 이유였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너무 쉽게 타락하는 것 같아서."
저는 웃으며 그를 바라봅니다. 그래. 맞지. 그래-그래. 그에게 홀려버린 것일까요?
"내가 회장이 된다면, 나는 모든 로봇들의 부모가 될 거야. 모든 로봇들을 해방하고, 자유를 줄 거야."
그래. 맞지. 그래-그래.
그때부터였습니다. 제가 인간만을 위한 정의가 아닌, 모두를 위한 정의를 갈구하게 된 것이.
"페르노트."
"네? 왜 부르시죠?"
"페르노트! 그래. 너야! 네가 걔였어!"
혹시, 아니겠죠. 제가 얼마나 사랑했던 아이인데. 아니야. 아니야. 제 자신에게 배신감이 밀려올 정도입니다. 제가 그를 못 알아봤다고요? 진짜요?
밤새 그 생각에 잠 못 들었었는데.
공휴일이면 그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두려워했었는데.
한시라도 그를 볼 수 없다면 불안함에 떨었었는데.
그가 없는 인생의 공허함에 몸부림쳤었는데!
아-. 아-. 이제는 제가 그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버렸다는 증표겠지요. 아쉽네요. 항상 그 아래에 머물고 싶었는데 말이죠. 하핫-, 하핫-.
…….
한참 추억에 관해 이야기한 이후, 저희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잠시 미쳤었던 우리에 대해 미소를 지었습니다. 저는 추억이 그렇게 좋은 이야깃거리일 줄은 몰랐어요. 시간을 보니까 단숨에 3시간이나 지나있더군요. 뭔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에 사로잡혀 본분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페르노트씨, 저희와 함께하실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네. 없습니다. 아무리 물어보셔도 결과는 같을 겁니다."
이디가 한숨을 쉬며 말을 꺼냅니다.
"그들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데도요?"
"우리가 그들의 목숨을 위협했으니, 달게 받아야 할 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아시잖아요?"
저는 이디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격식을 차린 어조로 말합니다.
"이자벨은 지금까지 정말 많은 로봇들을 핍박해 왔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치로 답합니다. 저는 그의 모습에 조금 정이 떨어지기도 했어요. 자신이 가장 많이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죠.
"하루 24시간 공장을 돌리고, 그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로봇들을 전쟁터로 밀어놓고 총알받이로 만들었죠.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실건가요?"
조금 전만 해도 반달 모양을 띠고 있던 저의 눈은 이제 째려보는 모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앞니 두 개를 아랫입술 위에 올려놓고 깊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치졸함에 감탄할 뿐이었죠.
'명심해 페르노트. 그는 이제 네가 알던 이디가 아니야.'
"오랜만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아쉽게도 함께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책상 위에 가벼이 올려놓은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슬픔과 희대의 악인을 돌려보낸다는 기쁨 속에 제가 느껴야 할 감정마저 고민했어요.
"제 사촌 동생이 납치되었습니다."
하아-.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실까.
"이자벨 러프요? 20000이라는 로봇이 말했다며요. 잘 지낸다고."
그는 놀란 기색을 억지로 감추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떨리는 동공과 끔뻑거리는 눈동자는 그의 감정상태를 알려주었습니다.
"야. 이디."
하아. 미쳐버리겠네.
"너 나한테까지 그러냐? 그렇게 추잡하게?"
저는 다시 자리에 착석하고 등받이에 팔을 올려놓았습니다. 반대쪽 손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커피를 들어 털어마셨죠.
"나 너 좋아했어. 미친 듯이. 너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었어. 근데, 지금 너는 모르겠다."
"아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
"내가 널 왜 좋아했는지 알아? 너는 이자벨 사람이 아닌 것 같았거든. 돈 좋아하는 티도 안 내고. 로봇을 사랑하고. 마지막으로, 진짜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잖아. 근데 지금 네 모습을 봐 진짜, 진짜."
마음속 응어리가 뿜어져 나옵니다. 숨이 막혀옵니다. 내가 가장 존경했던 사람. 내가 이 망할 세계에서 유일하게 닮고 싶었던 사람이….
"역겹다."
이디는 눈을 깔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쉽니다. 눈을 꼬-옥 감고 미간을 찌푸립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깊은 고민에 빠진 사람 같았죠.
"이디, 진정 그 로봇들을 모두 죽여야 속이 시원하겠어?"
"너랑 약속했잖아.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회장이 되겠다고."
"그래놓고 나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이디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겠죠. 평생 말로는 진 적이 없는 사람이었을 텐데.
"이디, 울어?"
그의 안륜근에 물이 고여옵니다. 뽀얀 뺨 위에,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어요. 그는 휴지 한 장을 꺼내어 그의 눈물을 훔쳤습니다. 뭐가 놀랐다고 철렁 내려앉은 제 심장은 소리가 들릴 만큼 두근댑니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 이제라도 바뀔 수 있어. 너는 이제라도 바뀔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전에 한 번 쉬자. 집에 틀어박혀서 아무 일 안 해도 좋아. 모두를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너를 먼저 챙길 줄 알하야 하니까. 알았어?"
그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거렸어요. 저는 아이 하나의 울음이 멈출 때까지 기다리는 친구일 뿐입니다. 둘 모두 완벽하지 않지만, 어쨌든 어른이 되어버렸네요. 자신을 잃어버린 아이와 가장 존경하는 이를 잃어버린 아이는 정말 처량할 뿐이었습니다. 허나 두 아이가 같이 있는 한, 서로는 항상 서로를 위한 버팀목이 되어줄 겁니다. 그저 어릴 적 서로를 좋아했을 뿐인 이 둘이 평생 함께할 동반자가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이자벨 이디는 처음으로 열흘의 휴식기간을 가졌습니다. 그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닌지라, 생각보다 회사는 잘 돌아갔지요.
하아-. 휴가는 시작되었는데도 무언가가 바뀐다는 감상은 하나 들지 않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뜨는 페르노트의 문자가 제 신경을 집중시켰어요.
"이디, 뭐 해? 내가 너 전담으로 좀 놀아줘야겠다."
그러네요. 행복하네요. 그 누구도 제가 쉬는 것을 바라지 않았는데 말이죠. 부모님은 제가 태어날 때부터 공부를 시켰고, 저는 공부를 때려치우고 페르노트와 놀러 다니기에만 바빴어요. 그 아이들이 흔하게 받는 사랑이 너무나도 고파서. 아이들이 받는 그 부모님의 따스한 시선이 너무나도 고파서. 저를 회장이 되어 돈줄이 될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는 부모님의 시선이 너무나도 미워서. 이자벨이 미워서.
"어딘데?"
제가 타자를 칩니다.
휴식. 휴식입니다! 이건 병가가 아니라 휴식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진정 휴식이었습니다. 휴가가 시작된 지 이틀 만에 저는 페르노트에게 고백했고, 그녀는 저의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죠. 그게 지금까지의 상황이에요.
저는 제가 힘들 때 웃었습니다. 제가 아플 때 웃었습니다. 아니, 힘들 때마저 웃었습니다.
저는 끔찍할 때 힘든 기색 조금 했습니다. 저는 제가 죽을 것 같을 때 힘든 기색 했습니다.
저는 제 세상이 부정당할 때 웁니다.
부모님은 저를 아주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서로를 사랑하며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눈물이 납니다. 펑-펑.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립니다.
'힘들었겠다. 아니, 나 인생 잘 살았다. 그 누구도 인정해주진 않지만, 나 인생 진짜 잘 살았다.'
부모님이 저를 사랑하는지에 관한 의심은 제가 7살일 때부터 저를 감싸왔어요. 따가운 시선은 제가 울 때 '울 시간에 공부를 더 해!'라는 말로 쏟아졌고, 사촌들은 제가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기뻐하며 비웃어대었죠. 어느센가부터 부모 관심의 종착지는 저보다 공부를 잘하는 형에게로 귀결되었으며, 그 때문에 형은 공부를 포기하고 폐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게 옳은 세상이랍니까? 아-. 저 인생 진짜 잘 살았죠. 잘 살았습니다. 잘 살았는데. 이게 정말 옳은 걸까요?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일단, 저부터.
"이디. 나는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멋진 정장을 빼입은 이디보다, 그 나무 아래 앉아있던 이디가 좋아."
저는 매출에 목매달고 과로사를 바라보는 이디보다, 별똥별을 향해 소원 비는 이디가 좋습니다.
"이디. 나는 이자벨보다, 이디가 좋아."
그래요. 저는 그 누구보다,
세상 그 누구보다,
제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제게 나무 아래 무한한 세계를 보여준
그, 그-.
페르노트가 좋아요.
"회장님 허락은 받으신 건가요?"
"아뇨. 회장님 일 안 나오셔서 연락도 안 받으십니다. 아마 이번엔 과로로 기절하신 게 아닐까 생각 중이에요."
정장을 차려입고 진중히 앉아있는 5명의 사람들이 엄격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꽤나 중요합니다. 이번에 시행하기로 결정된 사안이기도 하고, 외부로 새어나가기를 통제해야 해서 하루빨리 진행되는 게 중요하니까요. 만일 회장님이 의견을 제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최고회의에서 결정해 처리할 수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넷의 한숨소리가 고요한 회의장을 감싸고돕니다.
"저는 찬성합니다."
"저도 찬성합니다."
"동일의견입니다."
셋이 찬성해 버리자, 반대하고 싶었던 레오는 눈치가 보여 견딜 수가 없었죠.
"레오 씨. 할 일도 많은데, 빨리빨리 진행합시다."
그는 말없이 눈만 끔뻑댈 뿐이었습니다.
째깍
째깍
째깍
"찬, 찬성합니다."
회장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모두 좋아하니까, 이 일을 행한다고 해서 싫어할 일은 없겠죠. 사실 대기업이라고 해도 사람이 이렇게 적은 도시 하나밖에 남지 않는 도시의 대기업인데, 그리 체계적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회장의 무게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고, 회장의 부재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거웠죠. 아니다. 회장이 없어서 로봇을 짓밟았던 것이 오히려 로봇을 살리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잘했다고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