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고함소리-2

by 유월

오늘도 저는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갑니다. 오히려 무언가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저 눅진한 지렁이국을 한입 먹은 후, 다른 로봇들과 함께 담소를 나눌 뿐이었습니다. 허나 일은 항상 예상치 못할 때 시작되는 것이 세계의 법칙이라도 되나 봅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뒷받침해주기라도 하면서. 제게 다가온 누군가의 죽음은 항상 예상치도 못하게 심장을 '철컹'하고 내려앉아 숨을 못 쉬게 만들었죠. 눈물과 정적은 고통으로 붉게 물들어간 고요한 긴장을 가득 채웁니다.

"4988! 4988! 도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출장을 떠난 4988이 갑자기 산산조각이 되어 나타났어요. 같이 떠났던 880의 말로는 자동 수거기가 갑자기 다가오더니 4988을 깔아뭉갰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럼 좀 이상하죠. 왜 여기까지 수거기가 도착한 걸까요? 보통 수거기가 이렇게 멀리까지 오는 경우는 드문데 말이죠.

혹시, 위치가 들통난 것은 아닐까요?

혹시, 누군가가 우리의 위치를 분 거면 어떡하죠?

이 일 때문에 그 로봇 하나를 찾아내려고 난리가 난다면?

하아-. 또 귀찮은 일들이 펼쳐지게 된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시답잖은 일들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공포와 불안이 서서히 저를 옥죄어와, 절망의 구덩이 속에서 발목을 붙잡고 저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제가 이곳에 머물 수 있을지, 내쫓긴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벌써부터 오지 않을 앞날이 걱정되어 옵니다.


당연스레도 골목에는 저에 대한 헛소문들이 퍼졌죠. 제가 인간들에게 골목의 위치를 알려줬다라는 이야기나, 제가 인간들의 스파이노릇을 하려고 원래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제가 인간이 출장 이외의 이유로 도시에 가는 것을 보았다 등등의 유언비어가 여기저기 돌아다닙니다.

이에 대해 저에게 정중히 물어보는 이들도 있었죠.

"인간. 진짜 네가 골목 위치 알려줬어?"

하구요. 그럼 저는 "내가 뭐 좋다고 알려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하며 단호히 이야기합니다. 묻는 로봇은 대부분 이쪽 테이프 로봇인지라 원래부터 유언비어를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반대쪽의 로봇들은 제게 묻지도 않고 모두 믿었기 때문에 단숨에 이 문제는 골목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이제라도 인간을 내쫓아야 한다는 말이 맴돌게 되었죠.

하지만 그런 소문을 잠재워준 것은 놀랍게도 23이었어요.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인간이라면 치를 떠는 그가 저를 도와주는 일은 죽기 전에 한 번도 못 볼 것 같았는데 말이죠.

"야. 인간 그럴 애 아니야. 어차피 여기 아니면 갈 데도 없는데."

뭐-. 말하는 꼬락서니가 맘에 안 들긴 하지만 그게 어딥니까? 편이라도 들어준다는데. 감지덕지해야지 않겠습니까?

암튼 그게 무슨 일이든 결국 로봇 한 대가 박살 났다는 것, 인간들 사이에 무슨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네. 그래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른 곳으로 가야 할 수 있겠네요. 아님, 평생 동안 이런 인생을 살게 되거나 말이에요.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한이 닿는 대로 도망쳐서 그들 손아귀를 빠져나오는 숨 막히는 인생 말입니다. 최악을 꼽으라면, 그게 최악의 시나리오.

대장격인 23의 말과 함께 제가 주범이라는 이야기는 조금 잠잠해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이 모든 일해 대하여 그가 책임을 진다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더 큰 두려움의 서막이 골목을 감쌉니다. 지금까지 사라진 다른 로봇들이 사실 우리의 위치를 분 것이 아닐까? 하고요. 정말 심성이 강한 아이들이었으나, 인간들은 생각보다 더 잔인하고 끔찍한 족속들이니까 말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타이르면서까지 고문할 수 있는 이들. 그래서 출장에 가보기로 했답니다. 갑작스레 친인권을 받게 된 로봇 중 아는 로봇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출장에 간다는 것을 아는 이들인데, 자랑스럽게 그 명단에 로봇의 이름을 써놓을 수 있었을까요? 하아-. 몰라요. 우리는 그렇게 길게 생각하고 사는 자들이 아니니까. 잘 돼야 할 텐데.


결과적으로는, 없답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

우리가 생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 중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네. 그렇죠. 우리 로봇 중 하나가 붙잡혀 고문을 당하게 된 뒤에 친인권을 받고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는 시나리오는 면하게 된 겁니다!

하아-. 그거 면했다고 뭐 해요. 사실 별 의미 없는 출장이었다고 전부터 생각하긴 했으나, 로봇들은 출장의 결과를 가지고 위안하기에 바쁩니다. 그렇죠. 무서운 일이 있으면 일단 좋게 생각하려고 정신승리까지 하는 게 인간이니까. 인간이랑 비슷하게 코딩 자-알 됐네요.

무명이라도 있었으면 저도 위로받을 수 있었을 텐데. 성격상으로 이런 정신승리로는 살아갈 수 없는 몸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도 정신승리라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은데. 왜 저는 다른 이들에게 치이고.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인간 대우를 못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다른 인간들도 이렇게 살아갈까요? 아니, 그럼 저곳은 에덴이라고 불리지 못하겠죠.


검게 드리운 다크서클이 제 상태를 대변해 줍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골목이 어딘지를 알게 되었는데 기뻐하지도 못한다는 것은 지금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겠죠. 방전된 기계가 움직일 수 없듯이, 저는 오늘도 제가 하나의 로봇과 다름없다는 감상으로 삐걱거립니다. 제가 원했던 회장은 이런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또, 제가 원했던 진정 인간의 인생마저도.

알 게 뭐겠습니까? 회사 잘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인구도 이렇게 없는 곳에서 뭘 하겠어요. 제가 이 세상의 기초를 다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과로사로 하여금 이 세상은 저를 기억해 줄 거 아니에요? 그럼 됐습니다. '가장 로봇같이 살았던 사나이. 가장 몸을 아끼지 않았던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며 모두에게 존경받는 삶. 사실 제가 원했던 것은 돈보다도 그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오 발렌티나! 무슨 일이야!"

이 사람은 우리 회사의 최대 자랑이자 가장 일 잘하는 프로그래머인 메리 발렌티나입니다. 저와 동갑이긴 하나 이렇게 갑을관계가 되어버렸지요. 그녀가 오는 날이면 항상 무언가를 들고 나와 우리 회사의 매출을 끌어올려주는 데에 일조하기에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회장님 원래 군대 동원해서 그 로봇들 치기로 했지 않습니까?"

"그게 왜 네 입에서 나오지? 아무튼 그래서?"

"책임자를 맡기로 한 페르노트가 안 되겠다고 합니다."

페르노트. 지난번에 한 번 봤었죠. 왠지 모르게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는 여자. 웃는 얼굴이 매력적인-. 아니지. 사적인 얘기는 최대한 줄여야겠군요. 안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죠. 조금 미뤄야겠네요.

"근데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 사적으로 친합니다."

그렇군요. 아, 그럴 수 있죠.

"좀 만날 수 있나?"

에? 하려던 말은 아니었는데…. 제 마음에도 없었던 말이 성대를 거치고 빠져나와 정적만이 흐르는 회장실에 퍼졌습니다. 피로였을까요? 진담이었을까요? 아니면, 제가 뭔가에 씌이기라도 했다면 이런 말을 했다는 게 이해가 되기라도 하지만 말이죠. 위엄 있고 단호한 회장이라는 저와는 다른 말에 그녀는 저를 놀란 표정으로 쳐다봅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아…. 아, 아니. 회유라도 해보면 어떨까 해서. 지난번에 보니까 일처리 잘하던데."


그 한 마디의 말실수가 제 인생을 가장 크게 바꾼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디론가 숨고 싶었죠. 졸린 척하고 "아,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라 이야기했음 참 좋았을 텐데. 그리 대답하지 못했다는 과거에, 눈을 질끈 감고 깊은숨을 몰아쳐 쉽니다.

부조리가 인생인 것처럼, 실수도 인생이에요.


세상은 참 기계 같아요. 정해진 코딩대로만 움직이고, 좀처럼 잘 바뀌지도 않죠. 하지만 에러가 발생하면, 작은 것 같아도 미래의 모든 것이 요동칩니다.

무명이 사라지고 난 뒤, 로봇들은 이렇게 생각했지요.

'아-. 바뀌려는 기미조차 꺾여버렸구나.'

'이젠. 가망이 없어.'

허나 무명이 사라졌기 때문에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나비효과. 이제는 진정한 인류가 세상에 등장하려 합니다. 무명조차는 비교도 안 될 '진짜 인류가.' 그게 이디가 될지, 23이 될지, 인간이 될지, 또 다른 누군가가 등장할지. 몰라서 더 어렵고 신비한 게 세계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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