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 휩쓸리는 인간-3

by 유월

이제는 선택해야만 해요. 배신자이자 친구로 남을 것인가. 아님 친구이자 배신자로 남을 것인가. 마음 가는 한 선택지가 있기는 한데, 제 윤리성이 납득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윤리성이 제 모든 것을 대변해주지는 못하죠. 그런데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떠오르네요. 저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이 만들어낸 로봇인 걸까요? 인간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갖도록 코딩된 걸까요?

혹시, 제가 인간에게 놀아나고 있는 걸까요?

터벅-터벅.

출장로에 오르는 느낌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인사도 못했는데. 저는 그저 사고사로 죽은 로봇 1로 남겨지겠죠. 장례식 정도는 치러줬으면 좋겠지만, 그건 너무 말도 안 될까요? 제가 인간이 되고 실종되면, 그 누구도 저를 기억하지 않아 줄까요?

혹시 인간들 사이에서도 도태되면 어떡합니까? 그 어떤 인간도 저를 기억하지 않아 준다면 별로 인간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괜한 걱정이네요. '최초로 로봇에서 인간이 된 자.'라는 타이틀은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텐데. 골목의 '인간'처럼, 누구는 저를 손가락질하고 누구는 저를 찬송하겠죠. 그런 시선이라면 나쁘지 않습니다.


엔지니어는 해맑은 얼굴로 저를 반겼습니다.

"20000! 왔어?"

저는 정중하게 웃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했죠. 정말 어이없는 부탁인 거 알아요. 근데, 그 인간이 떠오르는 걸 어떡합니까? 죄책감에 시달려서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데.

"어-. 알았어."

무언가 시무룩해진 표정. 내려앉는 말투. 반가워하는 묘한 기류. 인간이 되면 저도 전 걸 가질 수 있습니까? 뭐랄까 음-. '아날로그 감정'을?

"저기 들어가 있어. 빨리 갈게."

"아 네. 알겠습니다."

"차 마실래?"

자연스럽게 나온 말에 저는 고개를 까딱 흔들어봅니다. 그도 예상하지 못한 경우였나 봐요.

"아-. 그렇구나. 미안. 이전까지는 사람들밖에 상대해 본 적이 없어서."

뻘쭘한 표정은 저를 한층 더 설레게 만들어줍니다. 더 빨리 인간이 되고 싶다. 더 빨리. 더 빨리.


외로운 취조실. 저는 방 안에 갇혀서, 언젠가는 제게 다가올 사람을 기다립니다. 로봇들과 함께한 추억은 저를 울컥이게 만들었죠.

괜찮아. 괜찮아. 모두 다 잘되겠지.

괜찮아. 괜찮아. 모두 다 잘될 거야.

무언가가 남아있는 듯 한 느낌.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 듯 한 느낌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저는 잊어버린 게 없는데 말이죠. 착한 로봇들이라면 이해해 줄 겁니다. 그렇죠. 제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걸 수도 있잖아요? 혹시 모르죠. 그들도 인간이 되어 제 앞에 나타날지.

우중충한 빗물 속에 홀로 남겨져 다른 이를 기다리는 감상. 그가 언제 나타날지는 모릅니다. 그게 아까 그 엔지니어일지, 아님 19468 일지. 아님, 또 다른 누군가 일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모르죠. 저는 그저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제는 세상이 밝아요! 하핫-! 제 미래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밝은 빛일 겁니다!

"얼씨구나! 조-쿠나!"

의자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춰댑니다. 풀린 다리 때문에 주저앉아 땅에 몸을 비비적댑니다. 떨리는 아래턱. 새어 나오는 웃음. 알 수 없는 공허함과 함께 밀려오는 만족감. 파르르 떨려오는 몸. 지진난 듯 흔들려오는 동공.

19468. 네가 원한 게 이거였잖아. 사랑에도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 거잖아. 아 참, 너는 나마저 사랑하니까. 이런 내 모습이라도 사랑해 줄 수 있지? 또, 왜 로봇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거야? 인간 입장에선 내가 영웅이야.

"내가 영웅이라고!"

엎드려서 크게 호통쳐봅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내가 맞잖아. 그렇죠? 안 그래요? 말 좀 해보세요. 저기요?

아무나 좀. 제발 누구라도. 신, 마몬, 그 누구라도 좋아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데.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 건데. 왜 내 인생만 이렇게 뒤틀려오는 건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저는 진이 빠져서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올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저를 더 비참하고 쓰리게 만들었죠.

"아, 오래 기다렸어? 미안. 내가 확인할 게 있어가지고."

"아, 네. 괜찮습니다."

그는 제게 이것저것을 물었어요. 사상검증에, 진짜 골목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신원은 확실한지. 숨기는 구석은 없는 건지 등등 말입니다.


취조가 끝난 이후, 저는 약속된 대로 특별 친인권을 받았어요. 친인권! 친인권이라니! 원래대로 살았다면 꿈에도 못 꿀 친인권인데 말이죠. 이렇게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왜 몰랐던 걸까요? 이것만 있으면 저는 바라던 그 무엇이든 할 수 있겠죠?

"저, 그래서 유기물로 된 몸은 언제 얻을 수 있는 겁니까?"

"그렇게 바라?"

"당연하죠. 계약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게 그거였는데."

그는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내일. 바로."


일이 있은 후, 저는 곧장 숙소로 보내어졌습니다. 한 곳에서 모두 모여 개미떼마냥 누워야 했던 공장과는 다르게, 이 방에서는 혼자서 잘 수 있죠. 이게 얼마나 완벽한 대우입니까? 그럼, 모든 인간들은 한 방에서 한 사람만 잔다는 말입니까?

이제는 죄책감마저 없어졌어요. 누가 죽는다 한들, 그딴 게 무슨 소용이랍니까? 다시 말하는 건데,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나에 대한 호의는 선이고, 나에 대한 적의는 악이다.'라는 간단한 테제정돈 세워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이제 드디어 당일이 되었습니다. 만일 제가 인간이 된다면, 무엇을 먼저 할까요? 밥 먹어보기? 숨 쉬어보기? 아, 숨을 먼저 쉬어봐야 하는 건가요? 참 궁금한 것 투성이입니다. 남자가 될까요 아님 여자가 될까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지금 이자벨의 회장이, 골목에 있는 그 인간의 삼촌이라던데. 만나서 한 번 담소라도 나누면 어떨까요? '당신 아들 잘 지내고 있습니다.'하구. 아, 제가 인간이 된다면 그 인간은 다시 도시로 끌려와 우리를 만날 수 있겠군요.

인간은 저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반응할까요? 인간을 찌푸릴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게 뭐 어떻습니까? 인간 앞에서는 모두 평등한 곳이 이 도시인데 말입니다.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서서히 눈을 감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되겠죠.


제가 깨어난 곳은 폐기장이었습니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그냥 폐기장도 아닌 것 같은데요? 아-. 소각장이었군요. 그래요.

유리창 너머에는 한 남자와 그 엔지니어가 당당하게 서있습니다. 엔지니어는 해맑게 웃는 얼굴로 저에게 인사했어요. 컨베이어 벨트는 서서히 움직였고, 그 끝에는 당연히 열기가 가득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럼 약속은 어떻게 된 걸까요?

"이건 약속이랑 다르잖아! 인간으로 만들어준다면서!"

제가 절규하며 소리칩니다. 패닉에 빠진 목소리는 심하게 흔들립니다. 저는 죽기 싫었으니까.

"잘 가! 과거의 20000."

그 남자가 소리칩니다. 점점 상황을 파악했어요.

저 남자가 이제 20000입니다. 저는 사라질 운명인 거구요. 데이터 칩을 빼내어 저 남자에게 삽입하기만 한 겁니다. 그렇죠. 데이터를 기억화하는 기술도 신기술로 각광받는 추세인데, 어떻게 로봇에게 유기체로 된 몸을 선물한답니까? 현실적으로 생각했어야지. 멍청아.

반대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갑니다.

죽기 싫어.

난 죽기 싫어.

죽지 않을 거야.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제발 살려만 주세요."

하지만 그들은 그저 저를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버튼으론 손조차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죽이겠다는 확고한 의지는 그들의 게으른 태도에 새겨져 있었으니까.

"제발!"

"제가 저렇게 구질구질하나요?"

남자가 엔지니어에게 물었죠.

"원래 목숨이 달린 일에는 필사적인 법이야."

그들은 뭐가 저리 재미있어서 구경하고 있는지. 참 얄밉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끄겠지.' 하는 마음으로 쉴 새 없이 뛰었습니다. 살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그게 참으로 멍청한 생각이었다는 것은, 8시간 뒤에야 깨달은 사실입니다.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제발 살려주세요."

이제는 조는 모양입니다. 하아-. 더는 뛸 힘도 없어요.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없음이라는 상태는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는 걸까요? 아아-. 알고 싶지 않는데. 알고 싶지 않았는데. 복수도 못했는데. 사랑을 전해주지도 못한 것 같은데. 죽을 때가 되니까 별게 다 후회됩니다. 그리 담담하게 받아낸 무명이 멋지기만 했죠. 이리도 무서울 줄을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내가 만약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19468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가 그에게 좀 더 잘했더라면?

내가 자살하려는 그를 막았더라면?

내가 2346과 친해질 수 있었더라면?

내가 2346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내가 골목에 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골목에서 도망쳐 나왔더라면.

내가 인간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더라면.

내가 출장나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인간 세계에 홀리지 않았더라면.

내가, 내가, 내가.

20000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좀 더 행복했을 텐데.

이제는 원망할 힘도 없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이 빌어먹을 인생아.

아무튼 다 모르겠지만, 죽기 직전이 되니 사랑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런 과거에 얽매이지 말구,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랑 아닐까요?


그러니까. 새로운 20000. 엔지니어님.

"축복드립니다."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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