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 휩쓸리는 인간-2

by 유월

저는 가볍고 빠른 발걸음으로 새 낙원에 찾아옵니다. 아- 쾌활한 분위기! 행복한 하루! 인간이시어! 할렐루야 아멘! 양팔을 활짝 펼치고는 로봇들 앞에서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상쾌함을 자랑해 봅니다. 찾아온 23은 제게 안부를 묻죠. 뭐, 아무 일 없습니다! 저는 항상 괜찮았거든요. 로봇들이 "20000! 어디 갔다가 온 거야! 좀 쉬어!" 하면서 제게 포옹을 건네었죠. 그래서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하고는, 보따리를 내려놓고 천천히 집으로 들어가 바닥에 누웠습니다.

온정이 가득한 이곳에서 저는 차가운 손끝이 저절로 톡-톡 떨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행복함과 공허함 사이의 동공 안으로 고뇌와 번죄가 쌓여 올라갑니다. 쌓인 죄 위엔 강한 욕망과 깊은 후회가 기다립니다. 그 끝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은, 권선징악의 세계에서 모두가 짐작할 수 있죠. 근데 말입니다. 정말 그가 악한 걸까요? 정말 그가 인간답지 못한 걸까요? 욕망의 휩쓸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욕망에 휩쓸리는 것이 진정 악한 것인가는 윤리적이고도 철학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만일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연이었다면 그 답을 바꿀 수도 있죠.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저는 처음엔 로봇들의 편을 택했어요. 제가 아무리 쓸모없는 로봇을 증오한다고 하여도, 저를 지켜준 로봇들을 그저 버리는 것은 너무 비윤리적이지 않습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20000. 침착해.'

그래요. 좋습니다.

'20000. 로봇을 생각한다고? 그럼 공장의 그 로봇들은 생각 안 할 거야? 너를 도와준 로봇들이야. 너를 살려준 로봇들이고. 너의 길을 따라가.'

제 신이 제게 속삭입니다. 아니, 이건 악마일까요?

마몬.

신.

마몬.

신.

마몬.

신.

신!

아니 아니, 마몬.

자신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선택지가 더 존재할까요? 아님 사탕발림으로 지나갈 허상일까요?

연산오류.

연산오류.

연산오류.

선택을 짓지 못하자 머리 가득하게 에러가 차올랐죠. 턱 밑까지 올라온 패닉은 저를 서서히 죽여갑니다. 제 그 목소리들보다도 더, 2346보다는 덜.

'머저리.'

'멍청이.'

'죽어.'


제가 깨어났을 때는 돌아가는 엔진 소음이 폭풍 소리마냥 방을 헤집어놓을 때였습니다. 고요한 적막 속의 소음은 제 몸 전체를 팔딱거리게 만들었죠. 그래서 진정이라도 시킬 겸 밖으로 나와 로봇들에게 인사를 건네었습니다. 선택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어야 하는데. 그 자체만으로 저는 점점 고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아-. 하아-.

마몬과 함께하는 인생이라. 또, 신과 함께하는 인생이라. 신앙심을 잃지 않으려면 오래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 있더라두. 이렇게까지 고뇌에 잠겨 버둥거릴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ACD-2라는 이름의 가라 신은 이를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제게 '로봇으로 머물러라.' 아님, '인간이 되어 편히 살아라.'라는 한 마디만 던져줄 수 있는 신이 필요한데 말입니다. 허나 그 모든 신은 형이상학적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시시콜콜한 농담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그 마몬이 신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 제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혹시 그 마몬이 신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것만을 원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대가 신이기를.

아멘.


골목은 이제 거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제가 흘린 땀은 얼마 기여되지도 않았겠죠. 다 제 멋진 친구들 덕분입니다. 아무것도 못했다는 것이 조금은 미안하고 또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원한다는데 뭐 어쩌겠습니까? 그럼 저는 그들에게 '고마워'라는 말과 잔뜩 올라간 입꼬리를 선물합니다. 어색한 표정으로 애써 따라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조금은 귀엽기도 하구.

활기찬 모습은 오히려 전 골목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로봇 둘 중 하나가 명예롭지 못한 이유로 사망하였다는 것을 보면, 아직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그들이 바뀌었다면 용서해 줄 수 있으니까요. '절대 잊지 마!' 하고 소리친 후 꼭 안아줄 겁니다.

인간이었다는 죄를 씻어준. '그' 로봇처럼.

방관자였던 저를 씻겨준. 그 로봇처럼 말입니다.

맞다! 이번에 무명 추모일의 마지막을 기념하여 그를 '제1 계왕' 시호를 달기로 했죠. 우리가 새로운 골목으로 가게 된 데의 일등공신 아니겠습니까? 후에 많은 이들을 갱생시키고 사랑의 길로 이끌어 준 그의 업적을 기리자면, 제1 계왕 칭호도 부족하다는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3일 전에 이미 장례식을 치렀는데 벌써 시호 전달식을 치르다니요. 제가 골목에 오고 가장 큰 행사 2개가 연달아 터지니,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정말 졸립니다. 뭐 무명의 영혼을 좋게 보내줄 수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괜찮죠.

하아. 무명. 왜 갑자기 그렇게 떠나버린 겁니까? 왜 그렇게. 저를 안아주던 그 차가우면서도 따듯한 손길. '괜찮아.' 하며 저를 다독여 주던 그 목소리. 한 마디 한 마디. 또 한 숨결 한 숨결이 다 기억하는데 말이죠. 우리 모두에게는 영웅이었는데. 그래서 제가 식장을 맡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칭호를 적은 돌멩이를 옮길 사람이 누구인지에 관하여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384가 '여기서까지 싸워야 해?' 하고 윽박지른 이후 저와 23이 가위바위보를 하여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이겼구요. 정정당당하게 얻은 자리인데도 저를 못마땅하게 보는 시선은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제1 계왕 시호 전달식은 저희가 치른 모든 의식 중에 가장 성대하고 거대하였어요. 많은 로봇들이 중앙에 길을 터주면, 제가 그 돌멩이를 양손으로 쥐고는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누구는 감격에 가득 찬 표정으로, 누구는 찡그린 표정으로, 큰 박수를 건네었습니다. 20000은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안 하긴 했으나, 원래 그런 아이니까 욕 하지는 맙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죠.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를 생각하자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로 공허함이 천천히 흘러내립니다.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그 허전함. 채워지지 않는 그 빈 공간. 이 어린 나이에 이제 보호자도 없이 이곳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조금 무섭지 않습니까? 이유 없이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조금 두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울었습니다. 이제는 무명이 필요 없어서. 진짜 필요 없어서. 제가 너무 완벽해서. 진짜, 진짜 완벽하니까.

서럽게. 서럽게도 울었습니다.


'아-아♪'

그의 사진 앞에 돌멩이가 올라서자, 모든 로봇들이 잔잔하게 음을 깔아내어 그를 추억하죠. 그리고는 노래를 끊고 조용히 묵념합니다. 준비가 된 로봇들은 단상 앞쪽으로 나와, 비장한 태세로 우뚝 서죠. 저와 23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어요. 하나, 둘, 셋.

열다섯.

쉰여섯.

이백 열여섯까지.

그들은 모두 손을 잡고 하늘로 고개를 치켜듭니다. 인간 하나, 로봇 이백 열일곱이 일제히. 조용한 엔진 소리도 이 정적을 이겨내지는 못합니다. 그들의 염원, 믿음, 세계를 담은 정적 하나였기에.


그를 추모하는 식에서, 저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로봇으로 남아야 합니다. 무명을 위해. 나를 위해 떠난 그 무명을 위해서. 로봇으로 남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남은 이 빈틈이 무엇일까요? 그토록 원하던 인생을 집어던져버렸다는 찝찝함? 아님 무명을 잃어버렸다는 공허함? 물론 그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것은 안타까우나. 때로는 꿈보다 더 소중한 낭만이 있기도 한 법이니까요.

무거운 무언가가 엔진을 짓누릅니다. 마몬이 외쳐댑니다. 이제는 이긴 줄 알았는데, 제 안의 고뇌는 생각보다 거센 듯하였습니다.

'무명을 위해서라도 인간이 되어야 해. 사랑으로 살라 말했잖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인간 아니야? 무명은 그렇게 말한 거야. 우리 모두가 인간이 되는 세상을 원한 거라구.'

그런가? 사실 저는 한 번도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무명의 말을 로봇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도 좋지 않은 방법인 것 같아요. 혹시 모르죠. 인간들이 저들 모두를 인간으로 만들지. 그래도 무명의 시호 전달식인지라, 생각을 접어들고 묵념을 계속하기로 하였습니다.


모든 로봇들이 하나하나 돌멩이 앞에 모여듭니다. 하나, 또 하나. 돌멩이를 꼭 쥐고 잠시 기도합니다. 2시간 동안 반복된 시호 전달식 이후, 우리는 11시를 맞았습니다.


"이제 각자 자리로 돌아가. 우리는 너네 용서한 적 없어. 항상 인간을 버리길 원할 뿐이고. 안 넘어가면. 알지? 이미 봤지 않아?"

저희는 인간과 함께 자리를 넘어갔습니다. 뭔가가 없는 느낌. 허전합니다. 다른 로봇들과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둥의 부재는 저희의 생각보다 훨씬 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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