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자신의 욕망에 휩쓸려야 인간이죠. 심지어 친구를 배신하더라도 말입니다. 짐승이란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도 짐승 아닙니까? 좋게 말하면 '인간적이다.', 나쁘게 말하면 '짐승만도 못하다.'.
무명을 추모하는 기간이 지난 뒤, 새 낙원은 점차 골목의 모습을 되찾아갔습니다. 더 밝아서 그 아늑했던 느낌은 조금 사라졌지만 화목하고 활기찬 분위기가 이곳에 가득 찹니다. 눈 서린 듯 한 테이프의 서리감은 떠드는 로봇들의 엔진음에게 중화되었죠.
저는 오늘도 물자를 챙기기 위해 출장을 떠났습니다. 인간 도시 주변에는 많은 쓰레기들이 가득하기 때문인데요, 대부분의 도시와 국가가 파괴된 이후에도 그들은 자해를 멈추지 않네요. 인간다운 욕망이라고 해야 할까, 아님 비인륜적인 자연 파괴라고 해야 할까 헷갈립니다.
로봇들은 자기 몸보다 큰 보따리를 메고 짐덩이를 챙겨 출발했지요. 요새는 이틀에 한 번 출장을 갑니다. 그토록 역겨운 도시인데,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도시에 자주 들러야만 한다는 게 아이러니. 수 많은 출장으로 인해 2대의 로봇은 그 즉시 잡혀서 죽었습니다. 당연히 풀어주면 돌아갈 터이니 풀어주지는 않았구요. 아마도 즉결 폐기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izl은 비밀리에 군사용 로봇들을 더 만들어 보초를 세웠습죠. 40m에는 한 대씩 세워진 로봇들에게 골머리를 앓습니다. 그럼 뭐 어쩐답니까? 외곽지역은 자연으로 뒤덮여있어 몰래 들어가면 들키지도 않는데 말이죠. 로봇들이 특대용량의 배터리로 제작되었다 하더라두 정신없을 시간은 있지 않겠습니까? 그 시간대에 조심히 들어가면 뚫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로봇 하나가 깨어있지 뭡니까? 23도 있으니까 그냥 죽이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간과한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23은 인간만 죽이지 로봇은 절대 죽이지 않는다는 신념이 확고한 로봇이라는 겁니다. 제가 들어오기 전 골목이 로봇용 마약으로 난리가 났을 때, 23은 그 로봇들을 해치지 않고 내쫓기만 했다고 합니다. 어차피 골목에 다시 들어가도 내쫓길 것을 안 그들은 몰래 숨겨둔 마약을 하며 추위에 떨었겠죠. 일단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장벽을 넘어야 할 것 아닙니까. 다행히 보초 로봇들이 장거리 감지 기능이 없어 저희를 알아채지 못하였지만, 이 자리에서 우리만 공격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는 것이 한이었습니다.
보초 로봇의 눈빛은 유유히 지나가는 바람처럼 무심하죠. 회색 피부에 은은하게 달빛이 부딪쳐 반짝입니다. 감정도 없는 존재 같아 보였죠. 기억해 주세요. 저는 그가 감정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죄책감이 없다는 것을, 또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것을. 그러면서 주먹을 꼭 쥐어 보였지요.
저는 돌아있는 눈으로 보초를 제압합니다. 착한 인간은 증오하지 않더라도, 악한 로봇은 질색이니까요.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기계의 신음 대신 흘러내린 기름과 조용한 공허만이 얽매어갑니다. 그리도 잔혹한 눈빛으로 인간들을 학살해 가던 23도 저의 모습을 보고 사색에 질렸습니다. 동족? 그딴 게 뭐가 중요하죠?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나를 해치는 자는 악이고, 나를 돕는 자는 모두 선이다.'라는 간단한 테제정돈 새워줘야 합니다.
그렇게 개발되어 가는 신도시에서 물자를 빼가 골목에 다시 두었죠.
인간은 그 작은 몸으로 무엇이든 조금 도와본다고 물자를 옮겨 건물을 지어갑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주저앉은 그는 어느새 로봇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습니다. 23은 그 모습을 조금 못마땅하게 보는 눈치였지만, 참견하지 않고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죠. 다른 로봇들은 23을 잠시 힐끗 쳐다봅니다. 지금까지의 23이었다면 당장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 인간에게 시비를 걸었겠죠. 하지만 요즘에는 아무런 말도 안 거는 것이 조금 철이 들었나 봅니다. 저를 피한다는 것도 그런 느낌일까요? 아니 생각해 보면, 그건 23의 변화보다는 저의 변화가 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합니다.
골목을 옮긴 이후에 로봇들이 저에게 말해요. 너 요즘에 좀 바뀐 것 같다고. 저는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죠. 그들이 말하기로는 제가 조금 냉혈해졌다고나 합니다. 어리버리하던 20000에서, 이젠 필요에 따라 무슨 짓도 과감히 할 수 있는 지금의 저로. 문제를 제시한 23은 그런 모습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무섭다고도 말했구요. 그런 이야기가 반복되어 들려옴에도 사실 저는 그들의 말에 하나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그것이었는데요? 나은 삶을 위해서는 꼭 거쳐야만 하는 무엇이었다는 말입니다. 호구로 살아가는 것보다야 모두를 위한 도라이로 사는 것이 좀 더 낫다는 주의라서.
그 다음날도 저는 출장을 떠났습니다. 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저는 처음으로 길을 잃은 것이 아니덥니까? 바람이 불어옵니다. 도시 속에 인간들의 냄새가 피어오릅니다. 돈, 땀, 희미한 향수 내음과 활기. 서로 시시덕거리면서 웃는 소리. 누군가가 욕먹는 소리까지도 저는 간절히 바랐죠. 지금까지는 욕먹기 전에 맞았고. 퇴출당하지 않으려고 힘썼는데. 저는 공동체 생활에는 적응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좋은 골목에서도 모두에게 이쁨 받으려 애쓴 것을 보면.
인간의 냄새는 생각보다 불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답지요. 화창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애매한 새벽 시간에도 사람들은 행복해 보입니다.
자신의 팀이 실적을 내었다는 것에 오묘한 웃음을 지으며.
응원하던 팀이 이겼다는 것에 활짝 웃으며.
고백하다 차였다는 것에 펑펑 울면서.
대학에 떨어져도 다른 대학에서 합격통보서가 날아올 수 있다는 사실에 애써 기대하면서.
좌절하고, 쑥스러워하고, 질투하고, 원망하고, 후회하고, 뭉클해하며, 장난치고, 귀찮아하면서도. 그 이성의 끈을 붙잡을 수 있다는 그 아름다움. 짧은 교향곡소리가 제 차가운 음성 센서를 깨웠습니다.
"인간은, 진정 이렇게 살아가는 건가?"
전 인간을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저의 회로 어딘가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요. 전류가 튀는 듯, 아픈 감각. 넋 놓고 쳐다보고 있을 때엔 5904가 저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20000! 너 어딨었어."
그의 말을 가벼이 무시하고는 다시 인간들의 세계를 집중하여 바라보았죠.
"무슨 일 있어? 그럼 난 먼저 간다."
그의 말과 함께, 저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된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하구 벤치에 앉아 잠을 청합니다.
"코드명. A-izl-20000. 현재 시스템상 사망 처리."
제가 눈을 뜬 곳은 흰 천장 아래였습니다. 제가 눈을 떴을 때는 다른 칩들이 모두 빠져있는 상태였어서,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지요.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인간의 말소리가 들려오게 된 것이.
"20000.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할게."
저는 끔뻑거리며 소리를 듣습니다. 할 수 있다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스피커 또한 떼어져 있었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센서뿐. 인간은 그 사실을 알곤 제게 스피커를 붙여주었죠.
"너, 어떻게 살아있어?"
저는 눈을 끔뻑거리며 말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졌습니다. 제가 말을 안 한다고 해서 저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말입니다.
"말 안 할 거야? 알았어. 폐기해 줄게. 제대로 알려주자면, 다신 낙원에 도착하지 못할 거야. 이건 잡힌 로봇들에게 알려주지 않는 정보인데, 너 같은 로봇들은 갇혀서 밖에 나갈 수 없는 곳에 가거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법적으로 로봇을 죽이는 일은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말이죠. 아마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는 이점으로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협박에도 넘어가지 않는 기세로 갑을의 관계를 넘어섰죠.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명예롭지 않겠습니까?
"이래도 입을 안 연다고?"
깊은 한숨 뒤, 차분하고 호의적인 말투 뒤에는 깊은 짜증과 답답함이 서려있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정비소의 밖으로 나가버렸죠. 체념하고 그저 폐기하려 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안녕. 다시 만나네. 혼자 둬서 미안해."
그는 자리에 앉아 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죠.
"답답하지 않아?"
"네?"
제가 첫마디를 꺼냅니다. 민감한 질문이 아니라면 침묵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딱딱한 몸에, 차가운 엔진. 틀에 박힌 감정, 긴장되는 삶."
그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걸까요?
"내가 방금 가서 허락받고 왔어. 이게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최대의 수단이야."
…….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잖아. 네가 죽인 2346은 죽었어도 나머지 로봇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어. 인간이 돼서 그들의 인생을 처참히 짓밟고 싶지 않아?"
그렇죠. 그렇네요. 저도 사실 그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스트레스를 풀 대상이 필요했던 거죠. 2346이 그 대상이었죠. 가장 무서운 그 하나를 두고 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증오해야 할 대상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6871, 4799, 2650 모두! 저를 방관하던 그 인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건은 단 하나야. 새 낙원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 인도해 줄 필요는 없어. 둘러가는 길이어도 돼.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이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돼. 원하면 언제든 와도 좋아. 오면 거래는 성립된 것으로 알게. 위치추적기는 없어. 네가 센서로 판별 가능하잖아? 편안히 있으라구. 편안히."
그가 제 손을 잡아주었어요.
29.7도. 정상 체온. 반대로 제 손은 차디 차기만 했습니다.
'이런 기회는 없어. 19468도 네가 그들에게 복수한다면 좋아할 거야. 그들이 네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을 보고파할 거야. 배신? 네가 인간이 되면 배신이 아니잖아.'
신이 제게 속삭입니다. 어느 순간보다도 달콤한 유혹이었지요. 그렇게 눈을 감습니다.
다시 깨어난 곳은 벤치. 제 위엔 쪽지 하나가 붙어있었죠.
-기한: 1달
현실이었음을 체감할 수 있게 해주는 글귀입니다. 콧노래와 함께 울적한 감상을 즐기며 룰루랄라 골목으로 뛰어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