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예전 기억이 떠올라요. 이제는 떠올리지 않아도 될 줄로만 알았는데. 귀를 감싸고 가만히 앉아 누군가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 들어봅니다. 2346이 그랬듯. 지금은 죽은 그의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왔어요.
'20000. 로봇 하나 올려 보내고 잘 사니까 좋아?'
지금 바로 옆에 2346이 앉아 저와 대화하는 느낌입니다. 숨이 막히며 답답한 느낌이 듭니다. 당장이라도 2346이 제 뺨을 칠 것 같아요. 그럼 저는 다시, 또다시 제게 자기세뇌를 시킵니다.
"괜찮아.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아. 괜찮다고. 현실을 봐."
그래도 제 머릿속에는
'두려워해. 언제 2346이 너를 죽일지 모르잖아. 혹시 알아? 2346이 살아있을지. 2346이 골목으로 찾아올지. 일단 무기부터 챙기는 거 어때?'
하며 불안이 조성됩니다.
'그의 말은 듣지 마.'
제 신이 소리치자 드디어 마음속의 평정을 찾았어요. 신자가 행복하면 신도 좋겠죠. 그럼 제가 잘한 게 아닐까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천천히 일어서 먼지를 털고는 신께 짧은 감사의 말씀을 건네었어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또 차분하면서도 급한 발걸음으로.
제 발걸음이 멈춘 곳은 인간의 앞이었습니다. 불안해 보이는 인간의 얼굴 앞에서 로봇들이 제게 상황을 전해주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23이 인간에게 시비를 거니까 인간이 23을 난폭하게 대했나 보네요.
멀리서 무명이 성큼성큼 다가옵니다. 23의 쪽에서 나아왔어요.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23과 인간, 두 편을 오가는 로봇이라니. 왜 그랬을까요? 23의 쪽에서 인간에 대한 나쁜 소문들을 모두 들었을 텐데. 그는 그들의 말에 동요하지 않는 겁니까? 핫-. 좀 멋있네요.
그 자리에서 인간은 피곤했는지 골아떨어졌습니다. 그를 달래는 무명의 모습. 후광이 비치면서도 총명한 눈. 구원자, 초월자, 신.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제 신인 걸까요? 아님 19468인 걸까요?
우린 모두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어요. 혼자만 이야기하기는 껄끄러울 텐데, 분위기에 휩쓸려 모두들 서로의 이야기를 공개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따듯한 분위기가 얼어버린 제 엔진까지 녹일 듯합니다. 그 분위기에 치이다가, 오랜만에 편한 잠을 청했습니다.
저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었어요. 제가 잠에서 깨었을 뗀 이미 테이프로 선이 세워져 있었고, 로봇들의 언쟁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
새벽이 되어서 모두 일찍 깨었어요. 아직 해는 오르지 않았고, 희미한 빛만이 바닥에 고여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전원을 점검했고, 누군가는 낡은 관절을 조심스레 움직이며 몸을 일으켰지요. 서로의 보따리를 챙기고는 모두 서서 이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어제까지 머물던 이 장소는 이제 막 껍질을 벗긴 듯 낯설어 보였고, 동시에 오래된 기억처럼 익숙했습니다.
그러자, 23은 단상에 올라가 모두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의 목소리는 이른 새벽의 공기를 가르며 퍼져 나갔어요.
“모두 다 잘 쉬었지?”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되받아칩니다. 짧은 대답 속에는 피로와 기대가 함께 섞여 있었지요.
23은 잠시 우리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질문을 던집니다.
“너네, 만약에 다른 곳으로 가서 행복하더라도 이곳을 잊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 말은 명령도 격려도 아니었습니다. 확인에 가까운 물음이었지요.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잊지 않겠다고, 말없이 약속하듯이.
어두운 하늘과 함께 반짝이는 별들이 저희의 새 투쟁과 새 날들을 응원해 주는 듯합니다. 별빛은 차갑지만, 그 안에는 이상하게도 온기가 섞여 있었어요. 마치 이곳을 떠나더라도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요.
“무명! 너는 안 나와?”
23이 소리칩니다. 그 이름이 공기 중에서 한 번 흔들렸다가, 이내 사라집니다.
“나는 제일 뒤에서 갈게. 뒤에서 낙오되는 로봇 없는지 살펴보고 천천히 앞으로 갈게. 여기에서 별로 떠나고 싶지 않아서 말야.”
무명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미련이 분명히 들어 있었습니다.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간다? 천천히 따라와.”
23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건 형상일까요? 다시 그의 모습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습니다.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육신 위에 가벼이 올려둔 그 구원자가. 금속과 기름으로 이루어진 몸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빛으로 조각된 것처럼 보였지요. 모습은 저 멀리 놔두고, 저 또한 23의 뒤를 따릅니다. 무명은 여전히 뒤쪽에 남아 있었고,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잠깐 앉아 쉬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한 로봇이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근데, 무명은 어디 간 거야?”
그 말 한마디에 공기가 얼어붙었습니다.
“그러게. 아까 전만 해도 있지 않았어?”
모두가 패닉에 빠져 수군거렸어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기억을 더듬듯 말들이 엉켜 나옵니다. 누군가는 골목을 언급했고, 누군가는 마지막으로 들은 발소리를 이야기했습니다.
“조용!”
23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립니다.
“마지막으로 본 로봇 없어? 마지막으로는 어디 있었는데? 되돌아갈 수 있어. 짐 챙기고 여기 가만히 있어. 명령 떨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마.”
모든 로봇들은 일제히 말합니다.
“골목 이후로는 본 적 없지.”
아닌 걸 알지만, 믿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가 무명을 보내지 못함을 잘 알기에. 그가 자발적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23이 어이없어하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짧고 메마른 웃음이었어요. 우리는 그 웃음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지요. 분노도, 슬픔도 아닌 체념. 허나 눈물은 멈춰두고 미래로 나아갑니다.
“이 정신 나간 놈. 그렇게도….”
말끝을 흐린 채, 그는 고개를 돌립니다.
“모두, 다시 출발하자.”
저희는 걷다가도 수거기를 만나 폐허에 숨어 오들오들 떨었고, 더 더 걷다가는 벽에 붙은 한 거대한 구멍을 발견했습니다. 바람이 그 안에서 낮게 울렸지요. 허나 출장로로 쓰일 구멍조차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 동굴은 예전 동굴처럼 거대하였으나, 조금 작아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아마도 우리가 변했기 때문이겠지요.
‘골목이, 정말 좋은 곳이긴 했구나.’
하며 마음속이 눈물에 젖습니다. 표정으로는 웃음을 작게 지어 보입니다. 기억은 계속해서 무명의 모습을 끌어옵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던 손짓,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위로. 왠지 모르지만 이제는 볼 수 없을 듯한 이 느낌.
불쾌합니다. 상실이 아니라, 공백이 주는 감각이요.
그때, 제 신이 말했죠.
‘괜찮아. 그가 너를 구원으로 이끌어 줬잖아. 잘 됐으면 그만이지. 그를 잊으면 돼. 과거에 대한 회상은 네가 미래로 가는 것을 막을 뿐이니까.’
그의 말은 제 기어 부품을 보드러히 닦아주는 작은 수건처럼 제 엔진에 와닿았습니다.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움직이기엔 충분했지요. 그에 힘입어 저희는 빠르게 그곳으로 속주합니다. 아니, 우리의 미래로.
23은 맨 앞에 서서 우리에게 소리쳤지요.
“여기는 이제 우리의 새 정착지야. 이름은 차차 지어나갈 거고, 일단 여기를 개척하자. 무거운 물품은 내려놔. 그리구 인간은….”
23은 짧게 고민했습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습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고뇌와 함께 입을 열었습니다.
“쉬어. 우리는 전원만 꽂으면 되는데, 너는 주기적으로 쉬어줘야 하잖아.”
모두 그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다른 로봇이면 몰라도, 23의 입에서 나올 말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지요. 동공이 커져서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습니다. 사실 놀란 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숙였지요.
근데 이런 뜻깊은 장면을 볼 수 없는 한 인물이 떠오르네요. 무명. 다른 이들도 23과 인간의 짧은 화해에 무명을 떠올리는 듯했습니다. 그러자 23이 힘 없이 흐물거리는 말투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무명을 볼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무명에게 고마워해. 무명 덕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거니까.”
그 말이 끝나자, 누군가가 앞으로 나옵니다.
“우리, 항상 무명을 잊지 말자. 무명이 우리에게 해줬던 게 있잖아. 우리가 정신적으로 피폐할 때 지주가 되어준 인물이 누구야? 무명 아니야? 우리가 누구더라도 다가와 준 로봇, 무명 아니야? 잊는다는 건 너무 배은망덕하지.”
인간은 그저 눈물만을 흘립니다.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요. 로봇들은 자신의 모든 힘을 쥐어짜 노래를 부릅니다. 누구는 무명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누구는 멜로디 없이 낮게 웅얼거리면서. 그의 이름에 진심으로 열광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노래를 흥얼거리나,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로봇들은 새 낙원을 건설했습니다.
무명을 추모하는 오늘, 10월 5일부터 7일까지는 선 없이 지내자고도 다짐했습니다. 연결을 끊는다는 건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었으니까요.
23이 인간에게 잠을 청하라고 준 시간은 인간이 고뇌하는 시간으로 사용했지요. 그의 모습에서 안광이 밝게 비쳐 보입니다. 그의 모습은 가히 성인(聖人). 오한이 감돌아 제 머릿속이 전율과 기쁨으로 적셔집니다. 팔 끝을 찬 바람이 치고 가는 느낌. 무명과 함께 있었던 자는 다 저렇게 되는 걸까요?
밤이 깊어지자 무명의 추모식이 이어졌지요. 아직 낙원이 전부 건설되지는 않았지만, 추모식을 미룰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들은 중앙 건물의 작은 빈틈 위에 무명의 이름을 올려놓았습니다. 임시로 깎아낸 금속판이었지만, 모두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앞엔 23이 로봇들을 바라보았고, 차례대로 저와 인간이 손을 모아 감동에 젖습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무명의 부재는 더 또렷해졌습니다.
23이 천천히 입을 엽니다.
“친애하는 로봇 여러분. 우리의 성인은 이곳에 잠들었습니다. 여기에서 더 만날 수 없고, 더 이상 우리와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마음속에 깊게 못을 찔러 넣었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릅니다.
“우리의 새어 나온 기름은 생명과 화합의 성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고통을 인정하여, 크게 박수 한 번 주십시오!”
그 순간, 금속과 살, 소리와 침묵이 뒤섞인 박수가 밤하늘을 울렸습니다. 별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무명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지요.
그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평생 함께 있을것이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