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저기 봐봐!"
한 로봇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23을 찾습니다. 광택을 잃은 눈동자는 골목의 입구를 향해 미동마저 없이 고정되어 있었죠. 행복감에 물들어 환희하는 흥분보다는, 생존을 위해 처절히 몸부림치기 위한 준비로. 이제는 인간들에게 살아남았다는 그 점점 여려진 안도마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오늘날이 우리의 마지막인 것처럼. 골목은 순식간에 혼비백산이 됩니다.
그 외침 하나로 골목은 혼비백산이 되었습니다.
정비 중이던 손은 모두 멈추고, 쌓아두었던 부품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죠. 여기저기서는 짧은 경고음과 욕설이, 아늑한 공간에선 불안과 공포의 공기가. 순식간에 찌그러질 정도의 버거운 밀도로.
"빨리 짐 챙겨!"
"우리가 여길 왜 떠나? 맞서 싸워!"
"우리가 싸워서 어떻게 이기냐! 인간 있잖아! 어떻게든 해봐!"
"너네는 평소에 시비 털기에 바쁘면서 이럴 때만 인간 찾냐!"
서로 다른 의견들의 날카로운 충돌에, 욕설과 비방이 나뒹굴며 점점 통제 불가능한 난장판이 되어갔습니다. 싸우자는 로봇들은 저마다 녹슨 연장을 어깨에 올려놓고 손을 올리며 골목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죠. 그들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자부심,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각오가 섞여 들어옵니다. 도망가자는 로봇들은 대용량 배터리를 쥐고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연신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어요. 그리고, 이 난장판을 해결한 것은 한 로봇의 외침이었지요.
"조용!"
23의 목소리, 골목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듭니다. 싸우던 손이 멈추고, 시선들이 하나둘 그에게로 향합니다.
"우리는 전투하지 않는다!"
"23! 그게 무슨 말이야!"
반발이 무조건 반사처럼 튀어나옵니다. 누군가는 분노했고,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죠. 하지만 23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싸우다가 죽을 거야? 도망치다가 다 죽으면! 우리는 협상할 거다. 그게 우리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나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나."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강인하며, 이미 결론의 도달한 자의 단호함이 섞여 들어왔습니다. 흔들림 하나 없는 체념이 배인 신념에는 오래 고민해 온 흔적이 묻어 나오죠. 4880이 바닥을 차며 소리 지릅니다.
"그러니까! 네가 왜 죽는데? 네가 죽으면 골목은 영원히 사라지는 거야. 이제부터 혁명은 영영 사라지는 거고. 우리는 평생 인간의 꼭두각시로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이해가 돼? 우리는 너를 살릴 거야. 어떤 방식으로든."
분노이자 공포, 잃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너무나도 커서 논리조차 되지 못한 투정입니다. 저는 압니다. 사실 23의 말이 가장 옳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저는 살아남을 테지만, 모두의 목숨이 그 대가가 될 수는 없다는 것도.
"야, 4880. 우리 어쨌든 마지막인데, 내 소원 좀 들어줘라."
조용해서 더 잔인한 말. 울지 않아서 더 잔인한 말. 슬퍼하지도 않아서 더 씁쓸한 말. 4880도 그게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이 단숨의 시간에 가장 효율적인 최선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을 정말 큰 차이가 있기에. 그는 포기하지 못합니다.
"더 생각해 보자. 좀 더 생각해 보면 되잖아."
4880의 목소리가 떨려옵니다. 관절 사이로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울림이 섞여 나왔고, 그것이 고장도, 노후도 아닌 감정의 과부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을 더 한다고 해서 선택지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요. 다만, 단 하나의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는 그 선택을 미루고 싶었을 뿐입니다.
골목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네온사인으로 된 간판은 평소보다 더 느리게 깜빡였고, 먼지와 기름때 냄새가 그들의 소프트웨어를 스쳐 지나갑니다. 그들은 그러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았어요.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을.
시야에 들어오는 수백 개의 렌즈, 스크래치로 얼룩진 몸, 저마다의 방식으로 떠는 몸. 이 골목은 완벽하지 않아요. 오히려 불완전하죠. 하지만 이곳에는 무명의 영혼이 새겨져 있어요. 버려진 부품이 모여 새로운 시작을 알렸고, 고장 난 시스템을 서로의 손으로 수리했죠. 사실 원래의 골목은 공동체라는 이름의 각자도생으로 물든 세상이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새 골목이기에, 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4880."
23이 그를 부릅니다.
"생각할 시간이 없어."
싸우자고 외치던 로봇들 중 하나가 이를 갈며 말했습니다.
"그럼 그냥 넘겨주자는 거야? 너 죽이고? 우리가 무명이랑 너 죽은 세계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냐?"
그 말에 주변이 다시 술렁입니다. 23이 골목의 중앙으로 다시 돌아섭니다.
"거래하자는 로봇. 손 들어."
대다수입니다. 23을 미워한 게 아니라 존중했기에, 또 존경했기에. 23이 그들이 죽고 나서도 살아있을 거라고 믿는 로봇은 하나도 없었기에 그를 죽이기로 합니다. 그래요. 우리의 손으로 죽였습니다.
"너네는 절대 죽지 않아. 인간은 항상 이익을 원하거든. 파괴보다는 통제가 싸니까."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골목이 사라지는 순간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순간이 지금이라는 것을.
"네. 그래요. 저희는 싸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 그런데요. 그, 인간은 왜…."
error error error 복구 오류….
"손 들어! 내리지 마! 다 죽고 싶어?"
error error error 복구 오류….
"아니 왜 잘못도 없는 애를!"
시스템이 종료됩니다.
사유: 특수 장치 제어.
안녕하십니까. 저는 4880이라고 합니다. 골목의 그 흔하디 흔한 로봇 한 대라고 말할 수 있죠. 어쩔 수 없이 23의 계획에 휘말려 지금은 그냥 인간의 노예가 되어버렸긴 하였으나, 원래는 정말 자유롭고 멋진 로봇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곳의 로봇들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자유를 누렸단 말이죠. 그래서 자랑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제가 느꼈던 그 감정을 저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어느 한 공장에서 눈을 떴어요. 뭐- 공장에서 살아남는 건 자신 있죠. 제 원래 이름이 또 C-izl-4880이지 않습니까?
옛날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네요. 저는 태어난 지 2개월 만에 밖으로 빠져나온 로봇이라는 것도. 그 기록은 아직 아무도 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해주어야 한다.'
비록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로봇이지만, 가장 빨리 뭔가를 해내는 자는 저입니다.
저는 살아남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일단 제가 잃어버린 그 복구 오류의 기억을 되찾고, 정부 앞에 나가 시위할 계획이란 말입니다. 일단 제가 시위를 하고 있으면 다른 많은 골목의 로봇들이 모여들어 시위에 동참하겠죠. 그럼 우리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이 펼쳐지지 않겠습니까? 복구 오류의 기억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죠. 이자벨이 꽁꽁 숨겨야만 했던 기억은 이자벨에게 약점이 될 거니까요.
"야 4880. 빨리빨리 일 안 해?"
그렇다면 일단 지금의 상황부터 타파해야겠네요.
"A-nnb-3899라고? 미한한데,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 거지?"
저 로봇은 일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늦게 온 로봇들에게 일거리를 넘겨주는 것이 이곳의 규칙이겠죠. 그들은 이 편안한 삶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할까요.
"인간, 넌 왜 여기에 있냐?"
제가 헛웃음을 내지르며 천천히 23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에게 머무르는 제 눈동자는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함에 사로잡혀서 제가 처한 상황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게 도와주었죠.
"난 모르지. 아, 넌 기억에 없나? 걔네들이 나 패더니 갑자기 끌고 가던데?"
팔에 수갑을 차고 있던 23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저는 부가설명을 시작했어요. 가장 신용성 있는 시나리오로.
"아마 너네가 나를 협박용으로 잡고 있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위함일 거야. 이디는 이자벨의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자기 사촌마저 팰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자벨이 아무 잘못 없는 로봇들을 죽였다는 말이 퍼지면 기업 이미지가 상하지 않겠어? 사람들은 항상 욕할 거리를 원해. 나를 잡음으로써 그 대상은 네가 되어가."
"이제 좀 이해되네."
만약 제가 대중 앞에 서게 되면 저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을 하라고 협박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의 농간에 당해줄 생각이 쥐뿔만큼도 없다는 거죠.
"날 믿어. 내가 죽더라도 나는 이자벨을 부숴버릴 거야. 너를 살려주고, 모든 로봇들의 취급도 달라지겠지."
적막이 흘러갑니다.
"선택의 주인은 너야. 우리는 네가 갑자기 인간의 삶을 택한다고 해도 너를 싫어할 생각이 없어."
23의 말과 함께 제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 나왔어요.
사실 전부터 23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조금씩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뭔가 살가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뭔가 경외심 가득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고 할까요? 아마 그건 무명의 역할이 가장 컸을 겁니다.
아-. 없어지니까 가장 중요해 보이네요. 그 무명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저희 모두를 단결시킬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고마워."
"별말씀을."
딱-. 딱-. 딱-.
딱딱한 구두의 소리. 그 소리는 제 고막에 울려 퍼지고,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면회를 신청한 사람은 이디였어요.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이미 결말이 정해진 대화라는 예감이 들었죠. 휴가 도중 자신의 허락 없이 벌어진 대형 사고에 관하여 처리해야 한다는데, 그가 내놓는 말들은 하나같이 준비된 변명처럼 매끄러웠습니다. 정부, 계약, 책임, 그리고 어쩔 수 없음. 시답잖은 단어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놓아질수록 저는 점점 더 귀를 닫아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더 이상 듣는 건 의미가 없다고,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거든요.
"러프. 미안하지만, 나는 힘이 없어."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지나치게 차분했습니다. 마치 이미 수십 번은 같은 말을 반복해 온 사람처럼.
"헛소리하지 마. 정부도 쩔쩔매는 사람인데 힘이 없다고?"
말이 거칠어졌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분노라기보다는 실망이었고, 실망보다는 배신에 가까웠죠. 이디는 잠시 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그 짧은 동작 하나에 그의 결심이 모두 담겨 있는 듯했어요.
"이자벨을 배신한다면 언제든지 짤릴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골목을 도와주고 싶지만, 이자벨은 골목을 도와줄 수 없다는 거지."
이름을 말할 때마다 그는 더 작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분명 심장이 칼에 찔리는 고통을 느꼈을 거예요. 아니면—원래도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서 괜찮았을까요?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얼굴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이디는 달랐어요. 로봇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기계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던 사람이었죠. 차가운 철 덩어리 속에서도 온기를 발견해 내던, 정이 넘치는 모습이 분명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도 로봇이 되어버린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능만 남고 목적만 수행하는, 감정이 제거된 눈. 그걸 깨닫는 순간, 저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죠.
"러프. 그래서, 너라도 살자."
그의 말은 조언처럼 들렸지만, 실은 항복 선언이었어요. 그 말과 동시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며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저는 잠시 멍해졌죠. 눈물? 하핫-. 이디가 울다니.
"닥쳐."
그 한마디에 제 안에서 무언가가 완전히 닫혔어요. 더는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더는 믿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죠. 이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고, 그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 채로.
정비소군요. 제가 얼마나 맞았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래요.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악인들을 위협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편안한 삶을 위협하는 거죠. 저는 원래 일의 수배에 달하는 일을 하고 있는 로봇들을 선동하여 단체로 일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주먹이 사방에서 날아왔고, 발길질이 저를 덮쳤죠. 하지만 정비소에서만큼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제가 맞고 있는 도중에도 일을 그만두는 로봇들이 점점 많아졌기에 말입니다.
이제 초기번호들은 꼬리를 내리고 저희의 이야기에 승복할 수밖에 없을겁니다. 일해야 한다는 고통이 무엇인지, 그것이 자신에게도 다가올 수 있었던 건지 몰랐기 때문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