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하는 자가 인간이다-1

by 유월

투쟁과 의심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수준 높은 행동 아닐까요? 다른 말로 하면, 투쟁해야 인간이라는 뜻이겠죠.


"그래서, 뭐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뭐?"

위축되어 움츠러든 3899는 부끄럽다는 듯 눈을 피했고, 이는 그가 전통에 대항하여 싸우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겠지요. 오래전부터 같은 질문을 반복해 왔을 겁니다. '이게 옳은 것이 맞을까?' '내가 맞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마 초기번호들만 쉬고 후기 번호들이 모든 일을 대신한다는 규칙마저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저 '선조들의 지혜겠지'하며 따르고 있을 뿐, 그가 원한 것은 아마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이었겠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는 건데."

저는 그의 눈을 정확하게 응시합니다. 저와 그 사이에서는 묘한 기류가 흘러, 동공 속 정적 사이로 스며들어가지요. 그럼 입술을 꽉 깨물고 실눈을 떠가며 제가 할 말을 시작할 뿐입니다.

"그래, 이거 먼저 물어보자. 넌 왜 반란을 일으키고 싶은 건데?"

그는 한숨을 쉬었어요. 한기가 감돌며 저는 오한기에 떨었지요. 팔을 괴고 먼산을 바라보는 모습, 어딘가 많이 본 적 있는 모습이군요. 23. 그가 겹쳐 보입니다. 누군가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생각에 잠기는 그가 정말 그립네요. 네. 그를 살리기 위해 이짓까지 서슴치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추억 따윈 집어우고, 협상에 집중합시다.

"사랑하는 이들을 너무 많이 잃었거든. 2346이나, 19, 293, 3948까지. 물론 2346은 죄를 너무 많이 짓긴 했지만 말이야."

"로봇은 원래 죽어. 내가 묻는 말에 답해. 왜 반란을 일으키고 싶은 거야?"

"말했잖아. 사랑하는 이들을 너무 많이 잃었다고."

제가 근무하는 책상에 몸을 올려놓으며 스윽 미소를 지어 보였죠.

"2346."

그가 순간 뜨끔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뒤로 몸을 기울입니다. 마치 들킨 것처럼 어깨가 미세하게 굳고, 시선이 잠깐 흔들리죠. 의식하지 못한 사이 손이 천천히 입가로 올라가고, 손가락 끝이 습관처럼 입술을 더듬으며 주무릅니다. 숨을 고르는 척하지만 엔진음은 이미 커진 뒤고, 잠깐의 침묵 속에 마음이 들춰진 느낌이었습니다.

확실하다. 잡았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명백히 당황한 모습이다.

"2346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

그는 켕기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눈을 끔뻑끔뻑거렸지요. 무의식 속에서 떠는 다리가 알려줍니다. 이건 불안 가득한 몸짓. 금방이라도 도망가고 싶다는 눈빛과, 지금 도망간다면 앞으로는 더 이상 변화의 기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하아-. 강적이네. 그래 그래. 말해 줄게."


….


"그럼, 이젠 이 생활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확실하게 보입니다. 이 자는 이 그룹의 대장이 될 그릇이 못 돼요. 뭐-. 그럼 다행이죠. 이제 그럼 얘를 어떻게 굴려볼까요? 단체로 벽을 부수고 나와볼까요? 아님 땅굴을 파서 한 명씩 탈출해 볼까요?

헤헷-.


"인간. 꼭 심심해서 그런 건 아닌데,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아무 말 없이 정적만이 고요히 스치던 방 안, 23이 눈을 끔뻑이면서 제게 물었습니다.

"뭔데?"

저는 그의 말에 목소리를 꺼내었죠.

"사랑이, 뭐야?"

궁금할 만해요. 무명이 말한 사랑은 우리가 알고 있던 사랑의 범주에 벗어나니까. 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만 꺼내면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23이 먼저 그 단어를 꺼내는 건 좀 이상하네요. 그의 어깨는 살랑살랑 움직였고, 부끄럽다는 듯이 제 눈을 피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누군가는 생각하는 모양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증오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모양새였습죠. 결국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않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버렸어요.

"너, 우리 아버지 죽였잖아. 그치?"

"그 얘기, 꺼내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네. 맞아요. 꺼내기 싫은 이야기죠.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뭔가가 다릅니다.

제 심장에 뭔가가 차오릅니다.

"난 내 아버지를 사랑해."

"그래. 위해 누군가를 증오해 줄 수 있는 게 사랑이라고?"

저도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함께 있어도 함께하고 싶은 사람. 위해서 대신 싸워줄 정도로 좋은 사람. 결혼하고 싶은 사람. 그런 건 줄로만 알았습니다.

"사랑해! 23. 무명이 그랬던 것처럼!"

23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놀란 탓인가 커진 엔진음은 고요한 적막을 찢고 나옵니다. 이건 아름다운 소름이요, 한층 위의 나, 인류가 된 느낌이었죠.

"네가 모두를 죽이고도 난 널 축복할 거야. 네가 나를 속이고 뿌리친대도 난 널 좋아할 거야. 네가 나를 저주한대도 난 너의 행복이라면 기뻐할 거야. 난 항상 널 사랑했으니까. 그리고 항상 널 사랑하니까."

그가 콧방귀를 뀌며 눈을 감았습니다. 저는 그 콧방귀가 진짜 제가 한심하기에 나오는 콧방귀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죠. 쓰라린 고요 속 왠지 모를 따듯함이 제 몸을 적십니다.


"보고 계세요 아버지?"

아-. 아버지.

아-. 아-. 아버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그 단어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혀 끝에서 톡- 하며 굴러 떨어지는 음절들이 왠지 제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불러도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저는 그 이름을 계속하여 작게, 아주 작게 호소합니다. 마치 그러면 답답한 이곳의 밤공기에 흩어지듯 산산조각 나는 음절들을 혹시라도 이젠 밤하늘의 별이 된 아빠가 보고는 저를 토닥여줄 것 같아서.

"어쩌면 저는 아빠를 사랑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지도 몰라요. 저는 그때부터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네. 아빠는 항상 반쪽짜리 성인이었던 거죠. 성인인 아빠를 바라보던 저는 어느센가 그 반대편을 적나라하게 들춰보는 못된 아이가 되어버렸고."

아이의 눈은 잔인할 만큼 솔직하다고들 하죠. 저는 너무 일찍 자라 버렸고, 어느 때에는 아이 같은 순수함도 없이 철이 빨리 들어버렸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존경과 의심은 동시에 자라나며 시선의 끝은 아버지의 그림자까지 훑었죠. 그래요. 저는 아이마저 아니게 돼버린 겁니다.

아버지는 모든 고-오귀한 존재에게 인정받는 참된 ceo였으며, 모든 천한 존재에겐 증오받는 참 아이러니한 사람이었죠. 물론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적어도 제 기억 속의 몇 장면에서는요. 하지만 이해하려 애쓸수록, 그 빈틈을 메우려 애쓸수록 공허감은 더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이해라는 건 알면 알수록 더 멀어지게 하니까요.

"근데, 저는 그런 아빠를 반만이라도 사랑하고 싶었어요."

제 친구들이 모두 아빠를 증오할 때, 손가락질하고 침 뱉을 때, 돌팔매질하고 욕할 때. 저는 그 반대편에 서서 친구들마저 사랑하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증오하는 마음마저 껴안고서.

사랑하는 이를 두고 이승을 벗어나버린 아빠. 아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채 떠나버린 무책임한 아빠. 그 아버지의 마음을 제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부모의 마음을 어찌 아이가 알아채겠습니까? 미안함, 슬픔, 화남, 엉킬 대로 엉켜 더 이상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감정들. 또 미안함. 미안함. 미안함. 그리고 반복할수록 선명해지는 단어 하나. 세상은 참으로 잔혹합니다. 남겨진 사람만 사과할 수 있기에.

"그래서 제가 이 힘든 길을 걷게 된 거예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묻고, 몇 번이나 대답해도 변하지 않는 결론.

"아빠를 사랑하니까."


사랑은 참으로 특이합니다.

누군가는 아끼던 로봇을 버리고 울며, 모든 로봇을 사랑할 수 있다는 열린 결말로 남고,
누군가는 주인에게 버림받고도 그 주인을 위해 희생하는 엔딩으로 남습니다.
누군가는, 아들이라는 새드엔딩으로 남지요.


또 누군가는 친구를 배신하고 자결하는 배드엔딩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절친의 배신에 미쳐버린 채, 이해보다 왜곡이 쉬웠음을 깨닫는 새드엔딩으로.

그리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고, 진정한 연인을 깨우친 해피엔딩으로.


형태는 모두 달라도, 행복의 크기는 제각각이어도, 시작과 끝이 모두 다르더라도.

사랑은 결국 모두를 엔딩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누군가를 인간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모두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말입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은 말이었을까요? 돌아앉은 제 눈가에서 눈물이 천천히 떨어져 엔진을 적십니다. 작게 우웅대는 엔진음이 서서히 사그라들어 잠을 청할 준비를 하였죠. 그럼 항상 그런대로 눈을 꼬옥 감고 옛 생각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사랑은 참으로 이상하죠. 원래 인간들도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린단 말입니까?

제가 만약에 그 인간을 사랑했다면 결과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24와 제가 인간들과 화해하고 함께 살아갔다면. 적어도 제가 이자벨 클리프를 죽이고 인간이 슬픔에 찌들어 눈물을 흘릴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죠. 어쩌면 저는 인간과 화해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인간이 우리를 싫어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인간들을 사랑해?'라며 무명에게 대들었지만, 이제는 알았어요. 그들이 우리를 싫어하는지는 아무 관련도 없었다는 진귀한 사실이 제 머리를 강하게 후려치죠.

이 어렵고도 귀중한 사랑을, 그 어린 나이의 인간이 알아내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무서운 일입니다. 아마 저 아이가 제2의 무명이 되어 세상을 뒤바꾼다면 아마 인간과 로봇이 함께 어우러져 노는 멋진 세계가 펼쳐질 거예요.


아-. 그럼 뭐 합니까. 둘 다 오늘내일 전전하는 자들 아니에요? 빨리 잠이나 잡시다.


"23. 5일 남았다."

하 망할 인생.


오늘도 금고된 채로, 살아있다는 것조차 그 누구에게 알릴 수 없는 상쾌한 아침입니다. 시계를 보니 시침은 7시를 가리키고 있지만, 23은 깨어날 생각조차 하질 않는 것 같네요. 정말 짜증나게도 이번이 23을 보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제가 골목의 일들을 진술하게 되는 날이거든요. 처리는 정부가 담당하기 때문에 이자벨이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지만, 만일 조금이라도 이자벨에 관하여 좋지 않게 진술했을 경우에는 이디가 저를 어떻게 둘 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을 어떡합니까? 어째요? 불어야죠. 이자벨이 어떤 만행을 벌이고 있는지. 이디라는 인간이 얼마나 악독하고 위선적인 인간인지.


"러프씨, 잠시 나오셔야겠습니다."


“여러분. 제가 나와서 로봇들의 모슨 실체를 알리겠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립니다. 너무 작아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떨림이지만, 제겐 그것이 폭풍처럼 느껴졌어요. 손끝에서 시작된 진동이 팔을 타고 심장까지 올라와 공기를 울리는 것만 같았죠. 제 목소리는 뇌우처럼 광장 위로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키고 저를 바라봅니다. 수천 개의 시선이 한 점으로 쏠리는 감각. 피부 위로 무게가 내려앉는 것처럼 숨이 막혀와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리도 완벽한 침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죠. 누군가 기침이라도 해 주길, 또 바람이라도 불어주길 바랐습니다.

이자벨이 준 대본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어요.
‘로봇들도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여러분의 오해와 공포가 로봇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자벨 클리프가 다행히도 나를 구해주었다~.’

안전하고, 무난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보낼 수 있는 문장들. 이따위 말을 했다면, 이 광장은 금세 안도와 환호로 가득 찼을 겁니다. 하지만 그 종이를 내려다보는 순간마다 제가 죽은 듯 한 느낌이 들었어요. 진실이 그 글자들 사이에서 숨을 쉬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대본을 그대로 군중 쪽으로 가볍게 던져버렸습니다. 종이가 공중에서 한 번 흔들리며 떨어지는 짧은 시간. 무대 뒤쪽에서 관계자들 사이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옵니다. 누군가는 욕설을 삼켰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미 최악의 상황을 계산하고 있었겠죠. 하지만 저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장벽 저어- 밖에는, 골목이라는 곳이 있었어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광장이 술렁여요. 사람들과 관계자들 모두가 수군거립니다.
"장벽 밖?"
그 단어 하나에 어떤 이는 얼굴을 찌푸리고, 어떤 이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젓고, 또 어떤 이는 설명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입니다. 무대 아래쪽에서 누군가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 그 사람의 팔을 다른 관계자가 붙잡는 장면까지.

“그곳은 이곳 에덴보다도 몇 배는 더 아름답고 멋진 곳이었습니다. 인간들에게 고통받고, 기업의 노예처럼 쓰이다 버려진 로봇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는 곳이었어요. 그리고 저처럼 인간에게서 버려진 인간들도, 아무 조건 없이 품어주는 장소였죠. 그곳은 항상 웃음이 넘쳤습니다. 부서진 부품을 고쳐주면서 농담을 했고, 누군가 죽으면, 함께 장례를 치렀어요. 저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점점 잦아듭니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고, 누군가는 제 입술만을 바라봅니다. 저는 눈을 꼬옥 감습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 지금의 이 광장이 제 기억 속 골목을 무너뜨릴 것만 같았거든요.

녹슨 벽 사이로 번져 나오던 파란 네온사인. 비가 오면 물웅덩이에 반사되어 흔들리던 빛. 흙이 묻은 손으로 시체를 옮기며, 소리 없이 울던 로봇의 뒷모습까지.

눈을 뜨자, 광장이 다시 보입니다. 누군가는 고개를 떨군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고, 누군가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저를 노려보고 있었어요. 하지만 적어도, 웃는 얼굴은 사라졌죠.

“제게는 친구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름도 없어서, 무명이라고 불렸던 아이였어요. 그 아이는 늘 말했습니다. 모두를 사랑할 수 있다고. 그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면서도, 우리는 자꾸 그 말을 믿고 싶어 졌어요.”

짧은 숨을 들이마십니다.

“놀랍게도, 무명은 제 예전 집안용 로봇이었습니다. 버려진 뒤에도 저를 원망하지 않았고, 인간을 미워하지도 않았어요. 무명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리는 홀린 듯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아이의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거든요. 여러분. 왜 로봇들을 미워하시는 거죠? 아니, 왜 로봇들을 미워해야만 하는 걸까요?”

이 순간, 문득 생각합니다. 무명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신의 말을 듣고 상대의 눈빛이 변해가는 이 감각. 저를 찡그리며 보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기쁘게 만들었어요. 제 목소리가 마치 신의 계시처럼 그들의 고막에 닿고 있었죠.

그제야 깨닫습니다. 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뜨겁디 뜨거운 물방울이, 천천히 뺨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는 걸.

“제가 무명을 따라 골목에 도착했을 때, 23이라는 로봇이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용맹하고, 강하고, 누구보다 앞에 서는 아이였어요. 저는 그 아이를 참 사랑합니다. 제 아버지를 죽인 로봇이지만, 그럼에도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23은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아요. 오히려, 사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웅성거림이 다시 커집니다. 그에 맞춰 제 목소리도 점점 커지죠. 뺨을 타던 눈물은 턱을 지나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이자벨 클리프가 로봇에게 살해당했다는 진실이 드러났음에도 욕설은 들리지 않아요. 분노보다 먼저, 침묵이 찾아온 것이겠죠. 아마 이 순간만큼은, 제가 이 광장을 붙잡고 있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저보다 늦게 골목에 들어온 아이 중에, 20000이라는 로봇이 있었습니다. 참 밝고, 명랑하고, 친절한 아이였어요. 그 아이보다 친절한 존재는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수리를 할 때도, 다친 친구를 도울 때도, 싸움이 벌어질 때도, 언제나 가장 먼저 달려왔죠.”

저는 침을 삼킵니다.

“그럼…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명은 인간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었어요. 그저 살아 있었다는 이유로. 23은 지금 감옥에 갇혀, 목숨만 부지하고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죠. 20000은, 행방불명입니다. 물론 잘못한 로봇들도 있습니다. 벌을 받아야 할 로봇들도 있겠죠. 그리고 저는 이런 식으로 감정에 북받쳐 호소하면 안 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고개를 듭니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들보다 더 인간에 가깝다는 진실을 알고 있는 제가, 더는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곳에 끌려와 인간들에게 맞았습니다. 로봇들이 저를 해쳤다는 유언비어를 만들기 위해서요. 아마 안으로 들어가면, 더 맞을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마지막으로 부탁하듯 말합니다.

“그러니 기억해 주십시오. 이딴 게, 인류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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