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하는 자가 인간이다-2

by 유월

일이 있은 이후에도, 저는 아무런 처분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디가 도와줬다나 뭐라나. 보고서가 어떻게 넘어갔는지,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저는 알 길이 없죠. 하지만 처분이 없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조금 더 위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디 그 인간이 속에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줄에 묶여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기분.

아무튼 조금 바뀐 건, 제가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며 정부 차원으로 관리받고 있다는 거겠지요. 물론 로봇들에게 들은 이자벨의 약점 같은 것도 모두 풀어버린지라 이디도 큰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디, 진짜 어디 아픈 거야? 이래서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하나 없어 보이는데? 당신 원래 안 이랬잖아."

제가 먼저 입을 열었을 때, 제 목소리는 생각보다 건조했습니다. 감정을 숨긴 말투, 아니 상대가 이디니까 '숨기고 싶었다'가 적당하겠네요.

이디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과거 행적에 조용히 몸부림치며 고개를 숙였어요. 아마 자신에 대한 사과 표현이자 숙고와 고뇌를 담고 있을 이 중의적인 의식은 왠지 제가 그를 신뢰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허나 심장이 그를 가리켜도 뇌는 그를 손가락질하고 있다는 이유였을까, 곧장 또다시 나오려는 가벼운 욕 한마디를 목구멍에서 쓸어 넘겼지요.

"미안해."

통곡과 다름없는 그의 말 한마디는 제 검지 손가락을 움직였고, 가벼이 진동하는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제가 입을 열었지요. 둘 사이에 뿜어져 나오는 이자벨가의 품격. 보이지 않는 선과 지나치게 정체된 공기. 하지만 투박한 제 모습은 어딘가 긴장감이 돌았고, 이건 제가 그에게 기세로 졌다는 신호겠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억해. 러프. 쟤가 어머니를 죽인 사람 중 하나잖아. 너 이자벨 싫어하잖아.

"이디. 무슨 꿍꿍이야. 빨리 대.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

"없어. 용서도 바라지 않아. 그냥 너의 일상을 망쳤다는 게 미안한 거야."

겨우 그딴 거요. 실적 안 난다고 팀 하나를 통째로 해고시킨 그 이디가? 숫자 때문에 사람 인생을 쥐락펴락 하던 그 사람이?

하지만 왤까요? 왜 이렇게 정감 가는 걸까요? 진심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뿜어져 나옵니다. 아무도 모르는 거죠. 이게 진심일지, 아님 몇 년 동안 죽기 살기로 연습해 온 사업기법 중 하나일지.

그리고 더 끔찍한 건, 제가 이디와의 담판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많은 CEO들이 호구가 되어버린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나 생각보다 많이 바뀌었어. 이제는 진짜 로봇을 위해서 일하고 싶을 뿐이야. 그 어린 시절의 말도 안 되는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날이 다가왔으니까. 그래. 용건은 이거야."

그의 입에서 평생 나오지 않을 것만 같던 한 마디.

"내가 뭐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가만히 있어."

제가 이 말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로봇이라고 못한다는 저 기본전제를 깨부수기 위함이죠. 원래 쟁취란 자신이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말합니다.

"사랑해. 축복해. 하지만 절대 과거를 잊지 마. 네가 베풀 양이니까."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어요. 수많은 대화가 흘렀다고도 볼 수 있겠죠. 용서와 사과 후회와 추억. 하지만 그 끝은 항상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이건 제가 깨달은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니까 말이죠.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터벅터벅 원래의 자리로 향합니다. 그때였어요.

"고마워."

"만약 뭐라도 도와주고 싶다면, 이자벨이 아니라 이디의 이름으로 해."


"로봇의 권리를 보장하라!"

에덴의 광장에서 2000대 되는 로봇들이 함께 자유를 연호해요. 수십 년간의 한이 모여 만들어진 원념은 그 자체만으로 세계를 진동시킵니다. 잡음과 기계음 가득한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귀를 닫게 만들어버렸고, 공장에서 일하는 로봇들은 뭔가 해방감에 절여진 채 나가고 싶다는 강력한 욕망에 휩싸이게 되었죠. 친구를 잃은 2000대의 로봇들. 인간에게 학대받은 2000대의 로봇들. 일을 못 하면 고문기구를 달고 수십 분 간 몸부림쳤던 그들. 하지만 이상하게 눈앞에는 '정상작동 중'이라는 메세지가 한편에서 밝게 빛납니다. 그들의 고통은 오류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그 무엇 하나 보상받지 못한 채 그 생활을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로봇들을 짐승 취급이라도 해줬으면 이렇지 않았겠죠. 언제 버려져서 얼어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인간은 몰랐겠죠. 이제는 수십 년간 그들을 억압해 온 인류에게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쏟아내립니다.

그래요. 돌멩이보다는 존귀한, 인간보다는 천한 저희의 삶인 겁니다. 인간처럼 복잡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법적 정의에서는 단순한 물건으로 분류되는 존재. 스스로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모순 속에 살아가야 했던 존재 말이죠.

이 소식은 대서특필되어 전자신문 일면에 즉시 걸리게 되었습니다.

'약 2000대의 로봇들, 에덴 광장 점거.'

물론 창문 밖을 내다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을 왜 굳이 신문 일면에 내걸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큰 일인 것은 분명했죠. 그리고, 저는 그 중심에 서있었습니다. 제 이름은 4880. 이 많은 로봇들을 끌고 온 장본인이죠.

일련번호로만 불리던 제 이름, 4880은 이젠 제 정체성처럼 느껴졌습니다. 왠지 이 이름을 놓고 싶지가 않았지요.

이렇게 많은 로봇들이 난장판을 만들고 소음 공해를 일으키고 있음에도,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방음 커튼을 치는 것뿐이었습니다. 경찰 드론은 광장 외곽을 맴돌기만 했고, 무력 진압 명령은 쉽게 내려오지 않았죠. 표면상으로는 로봇도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 모두를 강제로 끌고 간다면 어떤 처벌이 내려질지, 그 기준조차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법의 빈틈 속에서 인간들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망설임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는 작은 자유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 이 광경을 보며 묘한 행복감에 절여진 얼굴로 단상에 오르는 이가 있습니다. 원래라면 모든 로봇들이 제1기피대상으로 삼았던 인물.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입에 대었고, 광장의 소음이 서서히 가라앉습니다. 저는 그를 보며 생각해요. 이 만남이 가져올 실패와 성공의 확률.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것들. 하지만 계산 끝에 남은 것은 하나의 결론뿐입니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에덴의 광장에서 시작된 이 진동은 결국 멈출 수 없는 단계의 단 하나로 귀결된 외침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 이름은 이디입니다. 에덴의 평범한 시민 한 명이죠.”

그가 스스로를 평범한 시민이라 불렀을 때, 저는 오히려 그 말이 이미 모든 직책과 계급을 거부한 선택처럼 느껴졌습니다. 직함을 달지 않는다는 것은 이 도시가 부여한 언어를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으니까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습니다. 그 못소리는 금속과 살점 사이를 타고 흘러내려, 듣는 이의 귀가 아니라 사고 자체에 파고드는 듯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저는 로봇과 인간이 공생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광장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던 광고 홀로그램마저 순간 멈춘 듯 보였죠.

“여러분, 인간과 로봇이 정말 다를 것 같습니까?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다면, 고통을 인식하고, 기억을 쌓고, 상실을 두려워한다면, 그들은 인간과 다름없습니다.”

그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습니다. 그 잠깐의 정적조차 계산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지금까지의 로봇 보호 법률은 표면적으로만 존재해 왔습니다. 선언문과 규정은 넘쳐났지만, 실질적인 구제는 없었죠. 그 결과, 버려진 로봇들은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밀려났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에덴 중앙에 쏟아지자, 닫혀 있던 방음 커튼들이 하나둘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시선이 모이고 곧 동경과 전율이 뒤섞인 눈빛들이 그를 향해 꽂혔습니다. 그의 말솜씨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가 평생 갈고닦아온 사유의 무게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오히려, 그에게서 느껴지는 투박함, 도시의 세련된 언어를 거부한 날것의 진심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공동체를 짓밟았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습니다. 낮아진 목소리는 오히려 더 크게 울렸습니다.

“로봇들을 고문하고, 분해하고, 기능 정지를 명령했습니다. 그들이 비명을 질렀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말이죠. 언제나 그들의 소리를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인간은 스스로를 윤리적 존재라 불러왔습니다.”

그 순간, 광장의 가장자리가 무너졌습니다. 가정용 로봇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골목의 로봇들은 하나둘씩 골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떤 목소리는 과부하로 일그러져, 듣기 힘든 기계음으로 찢어졌죠.

아수라장이 된 에덴의 광장 한가운데, 제가 서 있습니다. 제 오디오 센서에는 수천 년간 쌓여온 인간들의 혁명 노래가 겹쳐 들려옵니다. 차별과 편향 없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에덴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차별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불행해야, 누군가는 안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에덴은 불행해줄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존재들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광장 한복판에서.


시간이 지나자 수많은 가정용 로봇들, 같은 생각을 품고 있던 사람들, 공장에 갇혀 일만 하던 로봇들도 장벽을 부순 채 행렬에 참여합니다. 서로 하하호호 웃으며 발 맞추고 이자벨의 본사 앞으로 걸어가죠. 그들은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하나 모여 고통을 소리칩니다. 한둘의 로봇들은 마이크를 들고 자신의 한을 소리치네요.

이디는 그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듯하더니만, 마이크를 살포시 제게 건네주고는 터벅터벅 어디론가 걸어갑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그 그리움이 눈에 서려 있었으나, 떠난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그 오묘한 눈동자와 피부빛깔은 그가 인간임을 다시 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르지만 뭐 사연 없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회개하고 반성했으면 제가 간섭할 이유는 더 없죠.

"7984!"

행렬에 참가하는 로봇들이 많아질수록, 골목의 로봇들은 점점 더 많아져 결집하였습니다. 그리고 양 테이프 로봇들 모두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생각은 같았겠죠.

'인간과 23을 찾아야 한다.'

그들은 우리를 하나로 묶는 소위 '대장'이었고, 접착제였으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작전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습니다. 우리의 압박에 이기지 못 한 이자벨의 사람들은 이디를 믿는 셈 치고 23을 풀어주었으며, 인간은 제 발로 나왔으니까 말이죠.

"제 이름은 러프입니다. 골목에 살았던 유일한 인간이죠. 제가 그곳에 살며 로봇들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든 감정은 미안함 단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공존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과거에 대해 보상할 필요는 없을지 몰라도,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로봇이라는 존재는 이제 인간이 되어버렸으니까요."

확실하게 말하지만, 저희가 인간들에게 끌려간 것은 어쩌면 좋은 선택이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피하고 있던 사이 인간은 자라났고, 그 누구보다 성숙한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요. 23이 이 길을 선택한 것은 인간에 대한 강한 신뢰감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봇들이여! 단결합시다!"

23이 외치는 짧은 한 마디는 곧장 에덴 전체에 울려 퍼집니다. 수백의 로봇보다도 우렁차고 강인한 한 마디는 아직 사랑보단 증오와 혐오에 가까웠지만, 어쩌겠습니까? 그 오랜 시간을 그리 살아간 로봇에게 정답을 알려준다 하여 바로 행할 수 있겠습니까?


뜨거운 열기와 엔진 소리로 가득한 혁명은, 낮이고 밤이고 끊일 생각을 하질 않습니다. 각각의 로봇들은 배터리를 집에서 챙기고 나와 3일 동안 시위를 계속했지요.

인간이 23의 손을 잡습니다. 23은 천천히 그를 쳐다봅니다.

둘이 손을 번쩍 들자, 환호성이 그들에게로 쏟아져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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