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로봇, 아니 인간이 되기 위한 존재들의 대 서사시.
로봇 측과 인간 측은 서로의 최선을 두고 협상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로봇들의 눈에 들어왔던 조항은 단 하나였습니다.
3. A-23의 처형을 본 예정 시일 내에 집행한다.
이건 그들이 놓을 수 없었던 마지노선이었겠지요. 우리는 그 조항 하나만 없으면 협상을 체결해 주겠다 하였지만, 정부 측이 그럼 결렬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버리는 탓에 끝내 23마저 동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 미래에 대한 위험보다는 '인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공생'에 대한 의식에 가까웠겠지요.
인간과 로봇의 공생을 의미하는 성대한 의식은 총 세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훈화, 23의 처형식, 선언.
로봇의 대표로는 특이하게도 인간이 선출되었어요. 인간의 얼굴과 인간의 언어를 지닌 존재가 로봇의 이름으로 단상에 오른 것이죠. 아마 많은 로봇들이 한눈에 그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판단했다는 거겠죠. 저희도 이미 인간이 거의 로봇과 다름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로봇의 대표로 선툴된 인간은 인간 대표와 함께 단상 위에 올라 훈화를 시작하였어요. 그런 인간이 하는 훈화여도, 지루한 건 매한가지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시간이 지나가지 않기를 간곡하게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지 않기를.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기를.
시간이 영원히 이곳에 멈추기를.
째깍.
째깍.
아무것도 없는 귀 속에서 시계 소리가 찢어질 듯 울려 퍼졌습니다. 마치 머릿속에서 직접 시간을 두드리는 것처럼요. 다음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골목의 로봇들은 점점 더 큰 엔진 소리로 웅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감정을 억제하려다 실패한 흔적이었을 거예요.
어떤 로봇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 없는 로봇들마저 주저앉거나, 훌쩍거리네요. 감정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설계되지 않았어도 결국은 흘러나오는 것.
아-.
저도 23과의 추억이 정말 많습니다.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떠올려야 할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요. 이럴 거라면 차라리 그때 싸우는 편이 그에게는 더 마음 편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그는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는 우리를 위해서 싸우지 않기로 결심한 겁니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죽이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겠죠.
이미 노쇠한 몸이라 해도, 원했다면 어떻게든 절반쯤은 작살내고 채 죽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 정도 힘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선택했습니다. 싸우지 않는 쪽을. 저항하지 않는 쪽을. 그리고 그 선택이야말로, 그를 처형대 위로 올려놓았습니다.
수많은 지도자들은 사소한 일 따위 모두 집어치우고 제 우월함에 빠져 폼만 잡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기억하는 23은 정 반대의 인물이었어요.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도와줄 수 있고, 사연 있는 로봇이 온다면 주인을 죽여주기도 하고. 물론 그 행동이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따름에서는 세상의 선이 되어주는 행동이었던 겁니다. 잘못된 믿음의 결과가 이리 나타난 것뿐이었지요.
제가 골목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가 없었을 때, 옆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어준 것도 23이었습니다. 별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서도, 제 인생에서 그렇기 기분 좋은 순간은 상상하기 힘드네요. 제가 넘어지고 다리가 빠졌을 때, 새 다리로 직접 바꿔준 것도 23이었습니다. 정비 담당 로봇을 부를 수도 있었을 텐데도 굳이 자기 손을 더럽히면서. 제가 아파할 틈도 없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저를 다독이던 목소리가 아직 코드 속에 박힌 듯 추억됩니다. 제가 로봇과 싸우고 미움과 질타를 받고 있었을 때 중재하고 위로해 준 것도 23이었지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지만, 항상 약한 쪽을 먼저 감싸 안았지요. 아마 4880 말고 많은 숫자들은 23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는 우리의 새 세상이자 미래였기에. 우리의 새 아비이자 어미였으며, 기준이자 마지막 신뢰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뇌 속에서 이 의식을 보고 있는 겁니다. 공생을 선언하기 위해 회개를 죽이는 장면을 말이죠.
'ACD-2. 당신도 그를 보며 생각나는 게 있지 않았습니까?'
또 제가 빕니다.
'ACD-1. 당신의 축복이 그에게 닿기를.'
23은 ACD-2보다 ACD-1을 더 닮은 자 아닐까요? 그래서 그의 이름을 빌려 기도했습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도록.
차가운 정적과 함께 두 번째 시간이 시작됩니다. 공기는 멈춘 듯 얼어붙었고, 인간들은 하품을 내지르며 눈을 비벼대었죠. 잠이 덜 깬 얼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한 표정. 로봇들은 하품하는 인간들을 환멸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마치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고 주저앉아버렸습니다. 그런데 뭐, 그럴 수 있죠. 각자는 각자의 인생이 있는 법이고, 각자는 각자의 감정이 있는 법이니까요. 누군가는 다름없는 오늘을 살뿐이고, 누군가는 지금까지 없었던 오늘을 살뿐이며, 누군가는 오늘로써 다할 뿐이니까.
쓰라린 눈물방울은 그와 저의 약속이라서, 정숙 따윈 잊어버린 채 코드 속에 박힌 '슬픔'이라는 감정을 괴기하게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23. 나도 너 싫었어. 나도 너 미웠어. 골목에 제 발로 찾아온 존재를 내쫓으려고 할 때부터 알아본 거지. 이런 결말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도, 이렇게 끝날 거라는 것도. 23. 23. 23.
저어- 멀리서부터 23을 포박하여 끌고 오기 시작하네요. 바닥을 긁는 소리, 쇠가 부딪히는 소리까지.
아아-. 왜 저리도 세게 묶어놨답니까?
아아-. 걷고 있잖아요! 왜 더 빨리 걸으라 재촉한답니까?
아아-. 왜 이리 처량하답니까?
온몸엔 맞은 자국이 가득하구, 흠집 사이로 기운기 다 빠져나가는 듯 보였습니다. 이젠 저희의 얼굴조차 쳐다보지를 않습니다. 눈길을 피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볼 수 없는 것처럼.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가 저희를 미워하고 있는 거라고. 그래 4880. 23은 너를 미워하고 있는 거야. 미워하고 있을 거야. 미워하고 있는데 너도 미워해야 하지 않겠어?
밉네요.
미워요.
미친 듯이 미워요.
….
역시 사랑은 숨길 수가 없다고 하던가요?
처형대에 오른 그의 뒤에는 후광이 비쳐오고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총명하게 빛납니다. 마이크를 대고 전해보는 그의 마지막 유언은 두려움도, 원망도 새겨지지 않을 채 적나라하게 '죽을 자의 심정'을 표현해 더 잔인했죠.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단정했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랑합니다."
약간 떨리는 숨소리와 긴장된 듯 강인함이 빠진 목소리. 그는 우리의 새로운 무명이었습니다. 죽었으니, 무명이 완성되는 겁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제 그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한답니까? 앞길이 막막하기만 하네요. 차라리 제가 죽는 길이 없었을까요? 제가 만약 공장에서 난동을 부려 광장에 나오지 않았다면 그가 살 수 있었을까요? 모든 게 제 책임인 듯,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그가 눈물을 흘리며 저를 토닥여주는 듯. 제 감상은 결국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현실로 변해갔습니다.
그가 있는 이 세계가 끝나간다는 현실로.
그가 없는 이 세계가 시작된다는 현실로.
그의 마지막을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제가 너무 두려워서 눈을 감고 센서를 손으로 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미안해. 23. 고마워. 23. 그리고, 항상 사랑해.
23이 처형된 이후에도, 골목의 모든 이들은 23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의 희생이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인도했으니까요. 능력이 있는 로봇들은 회사에 가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A계열 로봇들은 맞지도 않는 공장일을 하면서 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아 맞다. 저는 이제 러프-X-23이 되어 이자벨의 부회장이 되었습니다. 이름은 제 이름을 성으로 고치고, 제가 존경하는 모든 존재들을 이름에 담은 거예요.
이디는 페르노트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자벨에게 해고당하지는 않았고, 임원들이 꼬투리를 잡아 경고조치를 당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별로 무슨 감상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마 지난주에 에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1위로 선정되어 클리프의 자리를 빼앗은 이후, 해고당할 위협은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겠죠.
지금은 오후 11시, 매주 금요일마다 시작되는 '골목 로봇 모임'입니다. 오늘을 첫 모임날이라, 떠나보낸 로봇들을 회상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지요.
아무튼, 참 멋진 곳입니다.
3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