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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서 Sep 21. 2024

언니는 점쟁이

방황하는 갱년기

인생은 공식에서 벗어난 수식. 예상대로 흐를 때 보다, 예상에서 벗어날 때가 다 많다. 1과 2를 더하면 3이 되어야 하는데, 제로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정해진 공식대로 문제를 풀면 문제가 풀리는 줄 알고 남들이 말하는 매뉴얼대로 했다가 후회하는 일도 많다. 우여곡절이 많은 복잡한 인생은 아니라서 경로대로 사는 줄 알았더니, 예상 이상으로 경로 이탈이 많아서 정신을 차려줘야 한다. 듣고 보고 배운 대로 살면 어긋남이 없을 줄 알았는데 직접 부딪히는 세상은 생각과 다르다. 인생은 어쩌면 교통사고 같다. 나만 잘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이미 일은 벌어져 있다.



수식에서 벗어난 인생이 가끔은 수학과 닮아 보인다. 문제가 풀리지 않아 밀어두었다가 한참 후 들여다보았을 때, 갑자기 머릿속에 전깃불이 켜지듯 생각나는 해결 방법. 하루 종일 맴맴 돌던 문제가 순식간에 풀어지는 수학 문제처럼 어느 날 갑자기 해결책을 알게 되어 버리는 때가 있다. ' 어려운 게 아니었는데, 내가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어이없도록 쉽게 풀려버린 수학 문제처럼 '내가 왜 몰랐을까?' 싶은 순간이 찾아오면 꽁꽁 묶여서 풀릴 줄 몰랐던 매듭이 어처구니없게 쉽게 풀리는 기분이다. 


불어오는 바람이 덥지만은 않아서, 높은 구름을 맘껏 자랑하는 하늘이 예뻐서 우린 야외에서 와인을 마셨다. 취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와인을 마시며 적당한 취기에서 나눈 우리들의 대화는 늘 비슷하다. 그 드라마가 그 드라마 같은, 똑같은 소재의 연속극 같은 대화가 우리들이 나누는 수다의 주제다. 대화라는 이름을 붙여주기에도 민망한 우리들의 아무 말, 아니 나의 아무 말이 맥락 없이 오간다. 겉과 속이 투명해서 심장을 드러내는 사람이라 ‘속 없는 말’ 이 더 어울릴 법할 아무 말이 밤공기를 따라 흐른다. 열 길 우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한 길 사람 속은커녕 한치도 안 되는 마음 깊이를 가진 사람이라서 그게 뭐든 숨기기가 어렵다. 그 세월이 길어서일까? 언니들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기분이다. 내가 뱉은 아무 말은 잘못 출제된 문제였는데, 언니들과의 수다를 거치며 수학 해설집의 풀이처럼 정확한 정답이 된다.



"그 남자, 언니들 말이 맞는 것 같아.." 

"우리가 예전부터 말했잖아. 그 사람, 별로라고. 여자 친구 외모에 대해 잔소리하고 여행 비용 따지는 남자는 누가 봐도 별로인데, 넌 자꾸 귀엽다고, 괜찮다고 하더라. 마치 엄마가 아들 챙기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모성도 사랑일까? 널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어. 속으로 계산하고 있었으니, 갑자기 이별 통보를 했겠지"


나를 잘 아는 언니들의 관찰과 판단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문제 출제자는 틀렸고 언니들이 맞았다. 풀려고 애쓰다가 더 꼬여서 뭉쳐버린 실뭉치를 언니들이 쉽게 풀어버린 기분이다. 인생의 적중률이 높은 언니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끔은 사람의 신기가 무당에게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지나고 보면 언니 말이  맞았다. 당시에는 알아듣지 못했던 점쟁이의 말이 지나고 나서야 이해되는 시간이 오는 것처럼. 



언니 덕분에 정육점에  포장된 살코기처럼 칼만 대면 쓱. 상처가 날 것 같은 심장이 잘 건조된 육포인 듯 단단해지고 질겨진다. 던진 건 축축한 가슴의 옹이였는데, 빛나는 조언이 굳은살로 만들어 준다. 이제 손을 대어 조몰락거려도 괜찮겠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해결해 주는 건 난도 높은 공식이 아니라, 쉬워서 미처 보지 못한 계산 실수였던 것처럼 가벼워진 기분. 종종거리던 문제를 일시에 풀어버린 수험생처럼 ‘드디어 해결했어’ 라며 외치고 싶다. 30년을 보아온 사람들이 주고받는 아무 말에는 서로의 삶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적확한 온도의 언어가 있다. "언젠가는 헤어졌을 거야. 이번이 아니면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라도." 예언처럼 들리는 언니의 말은 위로가 된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 조금 빨리 벌어지나 늦게 벌어지나 같은 결과였을 테니까. 미련이 썰물이 되어 빠져나간다. 



와인 잔을 부딪히며 나눈 아무 말은 감정의 찌꺼기를 거두었다. 이어진 아무 말은 비워진 마음에 이른 가을바람처럼 신선해서 나를 자극하기에 적당했다. 언니들의 현재를 들으며 나의 가까운 앞날을 설계할 수 있었다. '지금보다 나이 들면 못할 일'을 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과거의 문제들보다 더 어려운 수학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수학을 잘하려면 복습이 필요하니까, 인생도 비슷한 문제들을 겪다 보면 능숙해질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다시 한번 문제를 제출하려고 한다. 어떤 문제를 낼지 아직은 떠오르지 않는다. 문제는 의도와 다르게 교통사고처럼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출제해 놓고 해결을 못해서 쩔쩔맬 수도 있고, 예상을 벗어난 문제는 끙끙대기만 하고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다. 



소화를 잘 시키고 나서 먹는 음식이 맛있고, 청소를 깨끗이 치우고 나서 꾸며야 이쁘다. 삶도 비우고 나서 채워야지, 채우기만 하면 먼지만 쌓인 장식품처럼 눈길조차 가지 않을 거다. '챙' 부딪힌 와인 잔의 청명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퍼져버린 아무 말처럼 속이 비워졌으니, 다시 채워보려 한다.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비우고 채우고 또 비우다 보면 수학자의 공식처럼, 나의 이름을 붙인 인생 공식 하나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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