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가수는 우리 곁을 잠시 스쳤다 사라진다. 어떤 가수는 한 시대를 풍미하며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 어떤 가수는 시대를 따라 꾸준히 존재하며 음악의 역사가 되기도 하고, 한 세대를 표상하는 인물로 세대의 역사와 함께 공존한다. 이적은 그와 같은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역사 같은 가수다. 90년대 초반 학번에게 '패닉'으로 등장한 이적의 노래는 혁신적이었다. 느리지만 바다를 건너겠다는 '달팽이'의 신화와 작정하고 고정관념을 깨어 버리겠다는 '왼손잡이'는 그동안 가요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노래였다. 시대를 읽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철학 없이는 태어나지 않을 법한 노래를 이십 대에 불러 제꼈다
김동률과 카니발을 결성해서 불렀던 노래는 20대부터 어른이어야 한다는 우리들의 섣부른 성숙을 달래주었다. 나에겐 그랬다. 속이 여물지 못한 채 어른이 된 청춘에게 '그땐 그랬지'는 특별했다. '벗'과 '거위의 꿈'으로 아직은 꿈을 꾸어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받았다. 어른이어야만 했으나 한참 덜 자라 여물지 못한 속내를 이적과 김동률의 카니발을 들으며 다지곤 했다.
때론 시대를 앞서는 혁신적인 음악으로, 때론 뒤늦은 후회와 미련을 달래는 발라드로 우리 세대를 대표했던 이적의 노래는 장르의 구분이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에 위치하면서도 이적이 아니라면 만들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개성이 가득하다. '거위의 꿈'과 '하늘을 달리다'를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했고, 출중한 가수들의 훌륭한 버전이 많이 있지만, 원작자의 감성이 나에겐 최고다.
이적의 보이스는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개성이 있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분석할 수는 없지만, 선명하고 날카로운 소리는 공기를 직선적으로 뚫고 나가면서도 가볍지 않은 톤은 무게가 있다. 공기를 먹은 둥근 곡선의 소리는 아닌데 열려 있다. 힘 있는 발성으로 터지는 소리는 직선 운동으로 나아갈 것 같은데 포물선 운동을 하듯 넓게 퍼지며 공간을 가득 채운다. 꺾는다고 해야 할까? 적절한 스킬은 이적만의 개성을 업그레이드한다. 독창적이며 유니크한 소리. 누구도 이적처럼 노래할 수 없다.
소화할 수 있는 음악 장르에는 한계가 없다. 록페스티벌에서 불러도 좋은 노래, 작은 소극장에서 의자에 앉아 기타 연주로만 들어도 좋은 발라드도 많다. 하나의 색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는 가수다. 장르를 넘나들어도 되는 천재성이 특별하다. 다른 가수들과는 달리 음악의 활동 범주가 매우 넓은데, 장르를 넘나드는 노래들은 이적이 아니라면 소화하기 어렵도록 '자기화'를 거듭한다. 이적만의 시그니처는 30년이 넘어도 여전하다.
가수 이적을 무대에서 직접 만났다.
나선형의 라운드 계단으로 무대는 나뉘어 있다. 관객 입장에서 오른쪽엔 건반과 첼로, 바이올린등의 현악기와 코러스가 자리를 하고 있고, 오른쪽엔 드럼과 일렉기타, 베이스 기타 등 밴드가 있다. 딱 필요한 연주자들과 적당한 악기의 구성을 갖추고 있는 고퀄의 콘서트라는 것이 눈으로도 보인다.
바닷속인 듯 입체감 있는 그래픽 영상이 황홀하게 펼쳐질 때, 이적은 Whale song 을 부르며 등장했다. 환상적이고 신비한 분위기에서 시작한 그는 대표곡을 차례차례 들려주었다. '반대편'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빨래' 등 인기곡과 더불어 드라마 OST로 잘 알려지지 않은 '천천히'와 고 김민기 선배님을 추모하는 의미로 '아름다운 사람'을 들려주기도 했다.
셋리를 정리해 보자
Whale Song
반대편
빨래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숨
민들레민들레
물
아름다운 사람 - 김민기
걱정말아요 그대
그땐 그랬지 with 김동률
벗 with 김동률
거위의꿈 with 김동률
노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다행이다
미워요
천천히
Rain
달팽이
술이 싫다
그대랑
하늘을 달리다
압구정날나리
왼손잡이
가장 꿈같은 무대는 김동률과의 카니발이었다. 노력형이라서 1년 전부터 콘서트를 준비하는 김동률과 천재적인 즉흥성이 좋은 이적은 일하는 스타일이 달라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 뛰어난 싱어송 라이터로서 두 아티스트의 매력이 가득했던 카니발의 시대를 잊지 못한다. 선명한 이적의 소리와 울림이 좋은 김동률의 소리는 최적의 조합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고되었던 인생 시즌을 카니발의 노래로 위로받으며 달랬던 기억이 또렷하다.
김동률은 카니발을 만나지 못하는 팬들이 없도록 4일 동안 계속 게스트로 참여하겠다고 제안을 했단다. 사려 깊은 김동률 덕분에 요일에 상관없이 카니발을 만들 수 있어 다행이다. 직접 듣는 '그땐 그랬지'와 '벗', '거위의 꿈'을 들었으니 음악에 맺힌 한을 다 푼 기분이다. 그때 그 시절, 응어리가 뭉쳐 옹이가 된 상처가 있다면 노래를 따라 모두 씻기어졌을 것이다.
노래도 좋은데 둘만의 우정 어린 입담이 좋다. "요즘 김동률 씨는 뭐 하고 살아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며 올해 첫 공식 스케줄이 이적 콘서트 게스트 출연이라는 이야기에 빵 터진다. 김동률은 놀기만 한 것은 아니라며 조만간 신곡이 나올 예정이라고 했고, 콘서트에 참여하니 본인도 콘서트가 하고 싶다고 했다. 김동률 덕후는 아니지만 콘서트는 꼭 찾아오는 팬으로서 국내 최고의 콘서트라고 자부하고 싶은, 한국 대중가요 콘서트의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김동률의 콘서트도 곧 만나고 싶다.
이적이 피아노에 앉아 불러준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과 '다행이다' '미워요'에는 손목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반짝였는데 공연의 막바지인 '하늘을 달리다'에 이르자 오랜만에 록페스티벌에 온 듯 온몸의 에너지가 방출하기 시작했다. 일어나라는 이적의 신호에 따라 일어나서 방방 뛰었다. 다행스럽게 좌석이 좋아서 앞쪽이 계단이라 공간이 있어 괜찮았다. 소리 지르며 환호하고 뛰며 팔을 흔들다 보니 몇 년을 열정적으로 다녔던 페스티벌의 세포가 살아났다. 이적과 함께 소리 지르며 계속 뛰고 싶은데, 촬영 가능한 허락의 순간을 포기할 수 없어서 폰으로 영상을 찍는 내가 미울 정도였다.
믿을 수 없는 공연이었다. 활짝 웃다가 눈물 글썽이다가 소리 지르며 뛰는, 극과 극의 감정 표현이 모두 가능했다. 거짓말 같았다. 흔들림 없는 라이브는 강렬한 고음을 길게 빼도 안정적이었고 무게감 있는 저음도 안정적이었다. 음반인지 라이브인지 듣는 사람도 구분할 수 없는 김동률과의 무대도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콘서트를 내가 즐겼다는 것에 현실감이 없었다.
노래를 들으며 대학시절 고대에 가서 처음으로 만났던 패닉의 무대도 선명해졌고, 육아에 지쳐 졸다가 들었던 고단한 출근길의 기억도 떠올랐다. 마음이 연약할 때 듣는 그의 발라드는 아직도 내 곁에서 진행 중이다. 나만의 인생사를 그의 음악과 공유한 기분이다. 힘들고 아파서 음악이 필요했던 순간에 조용히 찾아와 준 이적의 노래, 한껏 들떠서 춤이라고 추고 싶을 때 크게 틀어놓고 즐겼던 그의 노래들은 기억의 파편과 함께 공존했다.
몰입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인생의 한 때가 영화처럼 흐르며 음악으로 위로받고 치유받은 시간은 잊히지 않는다. 오늘을 채웠던 '이적의 노래들'은 멋훗날, '그땐 그랬지'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아마도 내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