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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서 Nov 03. 2024

한강 작가 작품 다시 읽기 : 소년이 온다 희랍어 시간

독서 리뷰


#노벨상 #한강 #한강작가 #소년이온다 #희랍어시간 #흰 #작별하지않는다 #채식주의자 #보르헤스



소설은 서사에 집중해서 주로 사건을 기억하게 된다. 작품이 신선하거나 느낌이 좋았다면 작가에 대한 인상도 또렷하게 남아서 그 작가의 작품을 발견해 읽곤 한다. 한국 최초의 노벨상 작가 한강을 알고 좀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었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꺼냈다. 다른 소설에 비해서는 공들여 읽은 책들이지만, 기억이 단단하지는 못하다. 작품보다 오히려 작가를 분석하고 싶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다시 읽은 한강작가의 문장은 요즘 책들과 달랐다. 정확하게는 내가 즐겨 읽는 소설들과 달랐다. 서사 위주의 소설은 집중하지 않아도 문장을 읽는 것이 어렵지 않은데 한강 작가의 문장은 집중을 해도 어려웠다. 요즘처럼 산만하고 몽롱한 정신상태로는 왜 이런 문장이어야 하는 건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속내라니, 스스로도 가소롭다. 표면에 드러난 단순한 의미조차 부여잡지 못해 동동거리는 나의 어리석은 한계만 명확하게 보였다.



어쩌지.



한강 작가의 책을 읽었던 과거와 지금의 나, 둘 사이 독서 간극이 커져서 느끼는 어려움도 있겠지만, 요즘 트렌드 도서와 온도가 다른 문장에도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한강 작가를 '혼자 낡아 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요즘 작가들이 이렇게까지 글을 쓸까? 의문이 들 정도로 다른 그녀는 내가 명명한 '요즘 작가'와는 달라 보여서 그녀의 책을 읽어가는 일이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밖의 일인 듯도 싶다.  책을 읽으면 가볍게 휘리릭 리뷰를 적었던 나 같은 사람은 감히 그녀의 책에 대한 감상을 가볍디 가벼운  문장으로 적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나불거려도 될까?



'왜 아픔과 슬픔에 이토록 천착할까.'라는 질문에 '아픔과 슬픔을 유난하게 체화하는 작가'라는 답변만 잠정적으로 내려 보았다.


우리 시대의 아픔에 온전하게 접속해서 자신이 직접 겪은 것처럼 똑같이 아파한 후에 문장으로 드러내는 작가가 한강이다. '개인의 아픔과 고통은 겪는 자의 몫이라서 타인과 공명할 수 없다.'라는 명제는 한강 작가 앞에서 무력해진다.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서 공명한다. 하나가 된다. 마치 빙의된 무당이 작두를 타는 것만 같다. 혼과 하나가 된 무당의 영험함 앞에서 혼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가 손을 모아 조아리듯 그녀의 문장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게 된다.  그녀의 문장에 접속하면 그래서 진이 빠지기도 한다. 나도 신병이 든 것처럼 같이 아픈 것도 같고,  작두탄 무당의 춤을 구경하며 온몸이 긴장되어 함께 지치듯 그렇게 지치기도 한다.



아픈 역사를 파헤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독자가 어설퍼도 무슨 의미인지 감은 잡을 수 있다. 객관적 진실을 알고 있기에 보편의 영역 안에서 이해는 가능하다. 미처 몰랐던 역사의 그늘까지 안고 가는 그녀라서, '역사를 안다'라고 하기엔 스스로가 미안해지는 순간도 있지만, 그래도 알아는 먹어서 함께 울어줄 수 있다. 눈물을 흘리며 내가 왜 슬퍼하는지는 자각하고 운다.



역사적 이슈가 거세된 개인의 서사는 문장이 시려서 눈이 시큰거리는데 이유를 모른다. 주인공의 상태는 알겠는데 왜 이런 감정인지는 가늠되지 않는다. 명확하게 공감하지 못한 감정이 그녀의 체화를 거친 승화된 문장을 만나면 단순한 내가 작아져 버린다.  '희랍어 시간'을 읽는 내내  난감했다. 주인공의 고통과 아픔이  어떤 종류의 아픔인지, 어떤 수준의  강도인지 머리속에 물음표만 가득했다. 알 것도 같은데 몰라서 그냥  느껴야 했다. 언어를 잃은 여자와 시각을 잃은 남자의 인생에서 고요하게 발산되는 고통의 농도를.



총알을 맞으면  가슴 앞에 남은 총탄 구멍은 작지만,  총알이 돌고 돌아 등판에는 큰 구멍이 남는다고 하던데 '희랍어 시간'에 등장한 주인공의 아픔을 나는 고만치만 눈치챈 것 같다. 그와 그녀의 아픔은 회복할 수 없는 커다란 상처인데 나는 가슴팍의 총알구멍만큼만 들여다보며 갸우뚱거리고 있을 뿐이다. 시각을 잃은 남자와 모국어를 잃은 여자의 고통을 다 헤이릴 수 없어서 미안해졌다. 작가는 그녀가 만든 주인공들의 아픔을 다 겪은 후에 신께 제의를 드리는 마음으로 향을 피우듯 문장을 피워낸 것 같은데 말이다.



그녀의 모든 작품에서 등장하는 '꿈'은 한강작가가 실제로 꾸는 꿈들이 대부분이라는 인터뷰를 보았다. 고통을 직접 체화하고 싶어 하는 작가의 소명의식이  꿈으로 발현되는 걸까, 짐작해 보기도 했다. 꿈으로 경험하는 고통의 체화는  작품에서 '혼'으로 드러난다. '소년이 온다'가 그랬다.  생명을 잃어 감정을 전하지 못하는 넋까지 접속하여 혼의 입장도 헤아리고 싶어 한다. 소멸한 존재와 마주할 수 없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지켜보는 자의 부채를 혼으로 갈망한다.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은 하늘과 땅을 잇는 눈이나 새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리는 눈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지만 순수하고 깨끗한 결정체는 사라지고 만다. 순수한 모든 것들이 지상에 자리 잡 못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그래서 그녀는 하얀색을 유독 좋아하는 것도 같다. '흰'것들만 모아서 작품 '흰'으로 깨끗하고 순수한 것을 추앙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순수보다 시릿한 것이 더 맞을 것도 같다.  유난히 순수해서 마음이 시려지고 마는 '흰'에 대한 그녀의  애착이 느껴진다.



하늘과 지상의 공간에서 자유로운 새에 대한 애정도 남달라 보인다. 하늘과 땅의 소통이 잠시 닿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서러운 표상이 눈이라면, 하늘과 땅 사이를 유영하는 새는 지상의 혼이 자유로이 머물 수 있는 생명체로써 적당해 보인다. 내가 읽은 한강 작가의 작품 중에서 새는 다치거나 죽었다. 소멸하지만 눈처럼 쉽게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우리의 곁에 잠시 머무르는 존재로서 소중해 보인다.  '희랍어 시간'에서도 새를 구하려다 다치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가 나오고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존재 사이를 잇는 매개체로서 새는 중요하다.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었다. 재독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오롯이 집중하지 못했다. 제목부터 막혔다. 광주를 말하는 이 책의 제목이 왜 소년이 '온다'라는 진행형일까. 잊힌 아픔이 잊히지 않길 바라는 작가의 염원일까. 읽어내리기도 힘들도록 묘사가 뛰어난 상황은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인데 현재로 표현한 이유에 작가의 소망이 있을 것 같아 한 문장 한 문장 공들여 읽고 싶었지만 마음만큼 되지는 못했다. 80년 광주 이야기는 오래되었지만 낡지도 못한 채 현재로 놓여 있어서 마음이 힘들었다. 그래도 '소년이 온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온도를 함께 보듬고 싶었다. 소년은 가지 않았기에 지워져서는 안 된다는 작가의 마음이 읽혔다. 소년은 온다. 오고 있다. 우리는 그를 잊어서는 안 된다. 몸으로 체화할 수조차 없어서 혼마저 불러낸 작가의 염원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가장 무거운 작품은 '희랍어시간'이다.

보르헤스의 묘비명 '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부터 막혔다. 왜 보르헤스는 묘비명에 이 문장을 적은 건지 원초적으로 궁금했다. 어디선가 보르헤스의 칼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나서 내 블로그를 뒤졌다.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에 보르헤스의 이야기가 있었다. 아일랜드 대왕이 스웨덴과의 정쟁을 승리로 이끈 후 업적을 시로 남기기 위해 시인에게 시를 창작해 오도록 했다. 합리적인 규칙에 의해 풍요로운 수사학의 기술이 빛났던 처음 시는 은으로 보답했고, 아방가르드 형식의 자유로운 시는 금을 상으로 내렸으며 마지막 숭고미를 담은 시는 감히 읽을 수도 없을 정도였는데 미를 알게 된 죄를 치러야 한다며 검을 내렸다고 한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검으로 상징된다. 보르헤스는 그 숭고함이 무엇인지 알았던 걸까.




보르헤스를 오마주 하기 위해 쓴 '희랍어 시간'에서 우리 사이의 칼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언어를 잃은 여자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 같다. 그 둘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 사멸된 언어인 '희랍어'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논리가 담긴 언어는 숭고할까? 작품에는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이 등장하며 숭고한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본질적으로 숭고하다는 시 구절도 눈에 띈다. 숭고함을 담은 언어를 가르치는 남자와 그 언어를 배우는 여자의 시간은 지나치게 아파서 단순한 독자는 충분히 공감하기 어렵지만 작가의 뜻은 헤아리고 싶어 진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국어를 잃어가는 여자는 본질적인 상실은 아니다. 여자의 상실은 남자처럼 물려받은 유전이 아니다. 모국어를 사용하는 모국의 환경이 그녀를 상실하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어릴 적 상실했던 언어를 불어로 되찾았다. 불어로 말문이 다시 트였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혼을 하고 양육권을 얻지 못하며 그녀는 다시 언어를 잃었다. 아이와 모국어는 동일해 보인다. 사라지는 아이를 되찾고 싶은 서러움이 희랍어를 불러왔다. 불어로 말을 할 수 있었던 기억이 희랍어를 배우게 했다. 사멸되어 쓰지 않은 희랍어로 소통에 의미를 부여한 작가의 역설이 궁금해졌다. 결국 소통은 불가능한 걸까. 아이를 잃어버린 그녀에게 말은 의미가 없듯이 소통은 희랍어 같은 걸까. 존재의 소멸. 우리 사이의 칼은 넘을 수 없는 것일까.



본질적이 상실 앞에서 무기력한 남자는 숭고한 희랍어를 붙들고 산다. 유전으로 인해  잃어가는 시력에도 살아가는 이유는 희랍어를 가르치기 때문인 것도 같다. 사멸된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이다. 혈연은 그에게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을 주었지만,  독일에서 공부한 희랍어는 그를 세상과 소통하게 했다. 희랍어에만 존재하는 중간태. 그 중간태의 어느 지점처럼 서로 영향을 받으며 존재한다.



언어를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은 남자의 교감이 시작되었다. 교감의 시작은 사건의 발단이 된 '새'였다. 새를 보려다가 계단에서 구른 남자는 세상과 미약하게나마 접속 가능했던 안경을 잃었을 때, 그녀와 소통이 가능해진다. 언어를 잃은 여자는 결국 모국어로 소통을 한다. 시각의 교감도, 언어의 교류도 아니다. 그와 그 사이에는 촉감이 있다. 언어를 잃은 여자는 시각을 잃은 남자의 손바닥에 모국어를 써서 의미를 전달한다. 몸의 언어. 우리 사이의 칼을 넘어서게 하는 것은  숭고한 언어가 아니라 결국 몸일까. 독자는 궁금하다. 맞닿은 심장과 맞닿은 입술이 칼을 넘어서는 숭고함이 될 수 있을까. 작가는 심장과 입술이 영원히 어긋난다.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이의 칼은 변함없이 자리한다는 의미일까. 마지막 문장에 독자는 헷갈린다.



문장을 좀 더 세심하게 읽어야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채식주의자'도 다시 읽었어야 했다. '흰'도 다 읽지 못했다. 손 가는 대로 책을 펼쳐서 한강 작가에게 접속을 시도했지만 독자의 정성이 부족해서 깊이 있게 닿지 못했다. 스스로가 안타깝다. 노벨문학상 보유국가의 시민으로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내공이 부족했다. 독자로서의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계획을 다시 세웠다. 이번에는 읽는 행위에만 그치지 않고 문장 하나하나를 고민해 보며 읽는 것이 중요하겠다.  그녀의 작품을 모두 다시 읽기로. 아픔과 슬픔에 천착해서 다 겪어 본 후, 체화해서 만들어낸 문장들. 참다 참다 죽기 직전에 토해낸 숨처럼 한이 서린 문장에 대한 예의는 갖추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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