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서 Nov 01. 2024

갑자기 떠난 가을, 괜찮고 싶다

추억 속으로


계획도 없고 생각도 없이 훌쩍 다녀왔다. 서울 서쪽 끝에서 동쪽 끝 잠실까지 가는 일도 힘들어서 나서지 않는데, '까짓 거, 뭐!'  강원도까지 동네 마트 가는 마음으로 나선 내가 낯설었다. 운전을 좋아하지 않아서 먼 길에 대한 스트레스가 유독 심한 편이라 아무 생각 없이 떠날 수 있는 에너지는 '덕질'말고는 없었는데, 사라졌던 덕심이 생기기라도 한 모양이다. 하현우에게 홀릭했던 그 시절, 3시간 거리에 있는 전주를 당일로 다녀오기도 했지만 그때가 벌써 7년 전이다. 지금과는 체력이 다름을 알면서도 마음이 강렬하게 동해서 시키는 대로 해보았다. 마음이 괜찮아서 그랬는지 먼 운전길이 피곤하지는 않았다.




홍천의 기억은 언니들과 다녀온 힐리언스가 유일하다. 힐리언스 가는 길은 멀지 않으면서 평탄해서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구불거리는 길을 얌전하게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남양주 지나 강촌 지나면 바로 나오는 곳이 아니었다. 정선처럼 깊은 강원도의 내륙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첩첩산중'이란 단어를 절로 떠오르게 했다. 첩첩산중의 길을 따라가는 일은 두려웠지만 그 이후의 시간이 기대가 되어서인지 마음이 보드랍고도 너그러웠다. 창을 열고 고갯길의 바람을 마음껏 맞으며 풍경을 감상했다.  서울의 가을과는 다른 가을 색채감은 모니터로만 보던 미술 작품을 실제 미술관에서 보는 기분과 비슷했다. 올해 날씨가 이상해서 가을을 가을답게 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는 산의 자태에서 가을의 기운이 물씬 전해졌다.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도착하니 '어서와요' 반가운 인사와 함께 벌써부터 고기가 구워져 있었고 자연산 광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티 하나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와인 잔을 부딪히며 먹기만 하면 되었다.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시골 주택 마당에서 직접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와인을 마시는 일. 전혀 해보지 않은 경험은 갑자기 새로운 세계에 빨려 들어간 동화, 새로운 세계로 접속한 영화처럼 재미있. 함께 하는 사람들이 좋으니 웃음이 솔솔 피어올랐다.



숯불향이 코를 간질이는 청명한 저녁 공기를 마시며 잘 구워진  고기를 와인과 함께 즐기니 '사는 게 별 건가.'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매콤한 공기가 추워질즈음 뜨근한 국물을 마시다가 입가심으로 맥주 한 잔 들이켜는 맛이 개운해서 몸의 기억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해가 진 후 하늘을 올려다보니 세상에! 총총 뜬 별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놀랍다. 찍어도 찍히지 않아서 남길 수는 없었지만 가득 떠오른 별, 가끔 별똥별이 떨어지는 하늘은 특별해서 가슴에 오래 남겠다.






모닥불 피워두고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가 즐겁다. 그럴 줄 몰랐던 일에 대한 각자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조각을 꿰어 맞추는 퍼즐처럼 재미있다. 대화 속을 흐르는 음악은 딱 필요한 만큼 분위기를 만든다,  배경이 되어 주변을 채우다가 흥얼거리며 같이 부를 때는 주인공이 된다. 음악 전문가 덕분에 라이브 연주를 듣는 일도 가능하다. 별이 총총 뜬 아름다운 마당에서 모닥불의 온기와 함께 음악의 선율을 호흡하는 경험이 내 인생에서 있었던가. 추억을 더듬어도 흔하지 않다. 모닥불이 있었거나, 와인이 있었거나. 음악이 있었거나. 하나씩 있긴 했는데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조합은 없었다는 자각. 내가 홍천까지 직접 운전해서 왔다는 수고가  '지금'을 인생의 가장 빛나는 때로 기억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자리한다.




아름다운 기억의 소환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추억과 함께 공존하는 현재가 영화로 만들어지면 이럴까. 서사를 입힌 소설이 되면 이럴까. 행복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실재는 현실이 아닌 꿈같아서 어렴풋하게 보이는 하늘의 먼 별빛처럼 아련하다. 깔깔대는 웃음소리, 시원하게 불러보는 그 시절 나만의 18번, 틀려도 좋은 어긋난 음정, 한 때 애정했던 디스코 음악에 흔들어보는 박자는 보일 듯 말 듯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장작이 타오르며 피워낸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밤. 불빛이 없어서 유난히 깜깜한 밤은 순수해서 깨끗하고, 그 밤 한가운데 있는 나는 마치 영화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하나쯤 이런 기억이 있었으면 좋겠다. 강렬한 추억 하나 남았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있었을지도 모를 소원 하나를 만들고 왔다.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내려가는 길보다 더 두려웠지만, 추억을 함께 만든 사람 덕분에 겁나지 않았다. 무섭거나 겁나는 일도 혼자가 아니라면 괜찮구나. 믿음으로 든든해졌다. 무턱대로 다녀온 먼 길의 피로는 깊은 숙면을 선물했고, 몸이 마음처럼 가벼워졌다.  




예상하지 않았기에 계산도 기대도 없었던 가을날의 '일탈'은 내게 인생의 어떤 징조 같다. 앞으로 펼쳐질 인생 사건의 전조증상.이라고 정의하고 싶어 진다. 그렇게 정해도 괜찮을 것 같다.

괜찮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