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감은 틀리지 않았다
캠퍼스 커플이 헤어지면 이럴까?
"취미가 일치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나니 모임이 겹쳐서 문제야." 언니에게 하소연을 하자 "캠퍼스 커플 같겠구나."라는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치는 기분이었다. 생활이 겹치는 공간에서 이별한 남녀가 같이 머무를 때 생기는 불편함을 겪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골프 모임도 있고 봉사활동 모임도 있고 술 모임, 여행 모임도 있는 온라인 공간에서 내가 유일하게 활동하는 영역은 독서 모임과 공연 모임뿐. 독서 모임에서 공연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활동 영역이 겹치는 건 당연했다. 당연함은 당연하게도 불편했다.
"왜 요즘 공연 보러 안 오세요?" 저렴하게 공연 티켓을 구해주는 지인의 연락이 올 때마다 "바빠서요."라고 같은 핑계를 대는 것도 힘들어서 거짓말이 어려워진 순간에 "전 남친이 먼저 신청을 했더라고요."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가 먼저 신청하면 자연스럽게 내가 피하고, 내가 먼저 신청을 하면 그가 피하는 방식으로 서로 모임에서 얼굴 볼 일을 만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호감남의 2차 강의에 나보다 먼저 신청을 하다니!
'막상 얼굴 보면 불편할 텐데, 가지 말까? 호감남이 모임에 자주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만나기도 어려울 텐데 기회를 놓쳐? 모르는 척 뻔뻔하게 신청을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친한 동생에게 물어볼까도 생각했다. 물어본다 해도 이미 답은 정해놓고 지원군의 응원을 받는 꼴이겠지만, 내 생각을 강화시켜 줄 힘이 필요했다. 그냥 내 스타일대로 해결하기로 했다. 내 스타일이란 거짓말이나 둘러대는 일 없이 직접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것.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강의 모임에 신청을 하셨던데 어쩌죠. 제가 1차 모임 후에 2차 모임도 꼭 가겠다고 구두로 약속을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가야 할 것 같은데 불편하실까 봐 미리 알려드려요. 저는 마주쳐도 상관없지만 불편하실까 봐 죄송스럽기도 하고요...." 카톡도 연락처도 지운 상태였지만 온라인 채팅으로는 연락이 가능해서 톡을 보냈다. 죄송하고 미안하지만 가야만 한다는 강한 의지를 어필했는데, 본인도 다른 일정이 생겨 고민이었다며 쿨하게 부탁을 들어주었다. '휴...'그제서야 겨우 숨을 내쉬었다.
애쓴 보람에 비해 2차 모임은 평이했다. 강연은 더 재미있었는데, 특별히 가까워질 일은 없었다. 타인에게 예의를 다 하는 사람이라서 나에게 특별한 호감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개인 간의 거리감이 좁혀지지는 않았지만, 좀 더 편해진 것 같다는 느낌에 의미를 두어야 했다. 글만 보면 까칠하고 예민할 것 같은 내가, 모임에서는 밝고 유쾌하면서도 발랄하며 술이 한 잔 들어가면 애교가 차올라 귀여워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아봐 주길 기대하는 작은 바람만 남았다.
안 되겠다. 관심이 있어야 그 사람의 숨은 특징이 보이는 법인데 그 짧은 시간에 나의 다른 면모가 보였을 리 없다. 모임에서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거리라도 유지해야 할 것 같다. 연락처는 이미 주고받았으니, 카톡을 먼저 보내보기로 했다. 10월 연휴에 지인과 강릉에 놀러 가자며 KTX를 예매해 두었으니, 핑계 삼아 연락을 시도했다.
"강릉에 놀러 갈 건데, 맛집 잘 아시죠? 좋은 곳 추천해 주세요."
"마침 제가 일이 없으니 가이드해드릴게요. 몇 시에 도착하는지 알려주세요." 주거니 받거니 카톡으로 가볍게나마 대화를 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시도했는데, 이게 웬일! 혹시 이 사람도 나에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닐까. 말로만 듣던 그린라이트가 이런 걸까. 몸이 마음만큼이나 가벼워지며 공기 중을 유영하는 기분이다. 스치듯이 들은 "가이드해드릴게요."가 진짜일 줄은 몰랐는데 빈 말 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아침 일찍 지인과 KTX를 타고 강릉으로 출발했다. 도착하자마자 역에 마중을 나와 반갑게 악수를 하는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엉뚱하게도 손을 내미는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끌림은 처음이거나 오랜만일 것이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욕망이 스스로도 낯설었지만 느낌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안겨보고 싶은 감정이 존재했다는 것도, 그런 감정이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자각되는 것도 새로웠다. "뭐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도 알 수 없다는 답만 맴돌았지만 좋은 느낌은 선명했다.
이혼 후에 남자들에 대해 직접, 간접적으로 많은 학습을 했다. 이혼율이 높아서 주변에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돌싱인데도 막상 이혼녀에 대한 인식이 고리타분한 사람들도 있어서 경계해야 했다. 이혼하고 성실하게 아이를 키우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알고 싶지 않은 유형의 돌싱 남녀들도 있기에 알아서 주의를 해야 한다.
나도 이혼을 했기에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면 안 될 텐데, 편견을 유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날만한 시간과 장소는 완벽하게 피했다. 사건사고 발생률 제로를 위해 독서 모임을 하거나, 술 모임은 친한 사람들과만 하며 11시를 넘기지 않는다는 철칙을 만들어 지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무례하게 선을 넘는 사람들을 겪곤 한다. '이래서 이혼한 사람들이 욕을 먹는구나.' 작고 사소하지만 타인으로 인해 스스로의 자존감에 상처를 내는 일도 있었다. 같은 영역에 속했다는 것이 기분 나빠서 싱글 모임을 회피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속을 터놓고 지내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며 여태껏 머무르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다.
"루서는 스트레스를 받는다면서도 왜 계속 싱글 모임에 나가는 거야?" 언젠가 받은 질문에 대해 할 말이 없긴 했다. 꼭 이성 간의 만남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로맨스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싱글 모임이 숨통 트이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남들이 재미있게 읽는다는 사건이나 이슈를 읽지도 않고, 남의 연애사가 궁금하지도 않아 올라오는 글들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누군가의 가십에 흥미를 느끼는 타입이 아니다.
그런데도 싱글 모임에서 하는 독서 토론이 더 재미있다. 직장인으로서 느끼는 스트레스나 유부녀라서 겪어야 하는 남편이나 시댁 스트레스보다 싱글들의 이야기가 더 와닿는다. 아빠가 있는 온전한 가정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이야기보다 아등바등 혼자서 온 힘을 다해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마음을 울린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이혼을 했어도 나의 정체성은 유부녀가 아니라 이혼녀인가 보다.
직장에서는 이혼했다고 커밍아웃을 하지 않아 유부녀인척 동료들과 가족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머리털 쭈뼛 서도록 불편하다. "여행은 자주 가시는데 그때마다 남편분이랑 가세요? 공연 많이 다니면 남편분이 싫어하지 않으세요?" 물어볼 만한 일들을 물어볼 뿐인데 거짓말을 하려니 소름이 돋는 기분일 때가 있다. "여행은 언니들 하고 가요. 공연 자주 간다고 싫어할 남편이 없어요." 대답하고 싶어서 이혼했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없어도 상관없다는 미운 남편이 있는 현재 진행형 유부녀와 과거에는 남편이 있었지만, 현재에는 없는 이혼녀와의 온도 차이를 혼자 느껴야 하는 것은 외롭다. 거짓말은 사소해도 불편한데, 불편함을 혼자 조용히 삭여야 하니 외로운가 보다. 결국 싱글 모임에서 노는 것이 언젠가부터 편안해졌다.
싱글 모임에 사건 사고가 많은 건 선입견이라고 불평하고 싶고, 유부남 유부녀들이 더 위험할 때도 많다고 투덜대고 싶으면서도 감당해야 할 위험도가 올라가는 것은 맞다. 살아온 배경이 비슷해서 성향이 유사한 사람들과 지내는 것은 안전하지만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있다 보니 삶의 편력이 전혀 다른 사람들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많아서 내가 나를 잘 보호해야 한다. 방어벽을 단단하게 만들며 오히려 사람에 대한 믿음이 낮아졌다. 단 기간에 친밀해진 사람은 오랜 시간 겪어온 사람들과 다르긴 달랐다. 친한 줄 알았는데, 그만큼의 정이 가지 않고, 안 봐도 그만이라 소중하단 생각이 안 든다. 믿을만한 사람이 맞는지 헷갈려서 안으로 들이는 일은 시도하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은 꿈을 꾸듯이 호감을 품는 내가 얼마나 어이없던지. 그동안 겪은 경험만으로도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는 일은 바보스럽다는 것을 잘 알면서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가까워질 만하면 이래서 떠나고 저래서 떠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어이없고 싶으니 어쩔까. 나는 대책이 없는 사람인가.
강릉에서 가이드를 해준 그는 나의 호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하루를 같이 있었을 뿐이고, 둘이만 같이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그동안 잠깐이나마 했던 '사귐'은 뭐였을까? 나는 몇 개월 동안 연애를 한 게 맞나? 몇 개월 동안 여친으로 지낸 기억보다 이 사람과의 하루가 더 값지다는 느낌이었다. 특별하지 않은 타인에게조차 이렇게 마음 써주는 사람도 있구나. 신기하고도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