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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의 늦사랑 <3>

관계의 첫 단추

by 루서

그의 차로 강릉 여행을 시작했다. 앞문을 열어주며 앉으라는 신호에 지인을 뒤에 혼자 앉히는 게 미안하면서도 호의를 거절하기가 어려워 시키는 대로 했다. 앞자리 앉기를 바라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가까워지길 바라는 속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우쭐했다. 좁은 차 안이니까 세 명이 함께 나누는 대화가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종일 앞자리에 앉아서 그랬는지 기분이 묘했다. 호감 있는 사람이 운전하는 차 옆자리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는 일이 얼마만인지. 데이트의 꽃은 그 남자가 운전하는 옆자리에 앉는 것이지 않던가.



나는 지인과도 잘 아는 사이고, 호감남과도 통할만한 대화 소스가 있지만 지인과 호감남의 만남은 처음이라 셋 사이 대화를 내가 조율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이 되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함께 공유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잠깐 이었다. 스스럼없는 대화가 편하게 오갔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처음 보더라도 같은 공간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전혀 다른 영역의 대화가 아니라서 그랬나 보다. 싱글이라는 정체성이 있고 건너 건너 아는 사람들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니 기운 자체가 산뜻하고 맑아서 그랬을 거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이드하는 일은 에너지품이 많이 든다. 사람에 대한 정보도 없고 취향도 모르는데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가.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다. 친해서 편한 사람 가이드도 마음에 차지 않을까 봐 눈치가 보이는데, 단체 모임에서 두 번 본 사람의 가이드는 신경 쓸 일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을 그가 해주고 있으니, 꼭 호감은 아니더라도 나에 대한 느낌이 나쁘지는 않기에 자처했을 거라며 혼자 그린라이트를 켰다. 그렇게 믿어도 되지 않을까.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고 하면서 데리고 간 음식점이 소박해서 좋기도 했다. 노부부가 함께 하는 작은 가게는 그가 자주 가는 단골집이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의 티격태격 싸움이 재미있어서 구경삼아 간다고 했다. 두 분은 손님이 계셔도 여전히 감정 전을 하고 계셔서 웃음이 났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마음에 안 드시는지 연신 타박을 하시면서도 할아버님의 심부름을 다 해주고 계셨다. 오랜 부부 사이의 정이란 이런 모습일까. 미우면서도 애틋해서 결국 챙겨주게 되는 내 옆 사람. 노부부의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들른다는 그의 이야기에 정이 뭔지를 아는 사람 같았다. 그래, 뭔들 마음에 들지 않을까.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감동스러우니.



감자전 먹는 모습을 보고 양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겠다며 음식 시킬 때 적당하게 조절하는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자기 위주로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함께 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잘 알아채서 맞춰주는 사람으로 보였다. 나이 든 남자들이 눈치 없고 고집 세단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실제로 자기주장이 강해서 타인과 공감이 안 되는 사람들도 보아온 터라 친절하면서도 타인을 세심하게 살피는 그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현지인만 아는 바다뷰를 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보트를 타러 갔더니 사장님이 친구란다. 서울에서 손님이 오셨다는 소개에 친구끼리는 돈 받는 거 아니라며 공짜로 태워주셨다. 세 명 가격이면 꽤나 비싼데 1원도 안 받으시길래 어쩌냐고 하니 나중에 술 한 잔 사주면 된다나. 친구도 챙기면서 일행에게 부담 주지 않는 여유에 마음이 보드라워졌다. 친구 손님이라고 돈 안 받는 모습을 보니 어떤 태도로 살아왔는지 예상되어 호감이 더 늘어나 버렸다. 그러면서 음료 한 잔 챙겨주면 된다며 센스 있게 일러준다. 맞은편 공차로 가서 얼른 음료를 사 와서 감사하다며 건네 드렸다.



맨발 걷기를 해보자며 솔숲을 걸을 때도 벗은 신발을 정리해 주고 발이 아프지 않을까 세심하게 살핀 후, 발 닦을 수 있도록 수건을 미리 준비해 주는 모습에서 아빠 생각이 나기도 했다. 딸을 대하는 자상한 아빠 같은 잔정이 듬뿍 전해졌다. 아주 작지만 챙김 받는 일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아서 멸종했던 연애 세포가 새로 생기는 기분이었다.



안목 해변이 보이는 가장 좋은 뷰에서 커피를 마시고,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날리는 보트 타기를 하고, 맛있는 순두부찌개를 먹으며 하루 종일 웃었다. 연결 고리가 희박한 사람들, 한 번도 함께 어울려보지 않은 사람들끼리 시간을 같이 보내는 건, 신경 쓰이는 일이기도 한데 기분 좋은 설렘과 함께 편안하고도 즐거워서 신기했다.



모든 일은 마음이 시킨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마음이 즐거우니 무얼 해도 다 좋기만 했다. 익숙하고 친근하지 않아서 날이 서고 예민할 수 있을 텐데 날이 좋아서, 사람들이 좋아서, 여행 장소가 좋아서 모든 게 괜찮았다. 긴장은커녕 내 마음에 주단을 깐 것처럼 보드라우니 그 느낌을 즐기면 되었다. 보들보들 매끄러운 새 옷을 입고 신이 난 아이처럼.



일몰 보기 좋은 해변이 있다면서 이동을 했다. 커피와 맥주를 사러 간 사이 캠핑 의자를 꺼내어 세팅을 마친 그는 기타를 꺼내와서 엠프에 연결하고 노래를 부르며 연주를 해주었다. 패드에 폴더별로 차곡차곡 저장된 악보가 얼마나 많던지, 평소 정리 습관을 알 것 같았다. 차 내부나 트렁크 정리도 아주 깔끔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트렁크에는 야외 연주를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캠핑의자, 기타, 엠프, 추울까 봐 챙겨둔 여벌의 옷까지. 바닷바람은 춥다고 느끼는 순간 몸이 안 좋아진다면서 굳이 점퍼를 챙겨 와 덮어 주는 따스함도 갖춰져 있었다. 원피스 하나만 입은 나에게 점퍼를 입게 하고 담요를 주며 무릎에 덮도록 했다. 아빠 옷을 입은 아이처럼 또 웃음이 났다. 깊이 있는 따스함을 전하는 사람과 함께 한 시간에는 티끌 하나만큼의 부족함도 없었다.



대학시절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를 했다는 그의 기타 실력 또한 일품이었다. 뮤직 페스티벌에 자주 가서 꽤나 퀄리티 높은 밴드의 연주를 들어온 내 귀에 취미로 할 뿐이라는 그의 대답은 어울리지 않는 겸손함이었다. 우리의 대학 시절 인기 있었던 흘러간 옛 가요를 연주하며 익숙한 가사를 따라 부르다 보니 몰랐던 잘생김이 보이고 없던 정도 샘솟을 지경인데, 이미 마음에 호감이 꽉 찬 나는 아마도 눈에 하트가 가득 차서 그를 향해 발사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강릉에서 보낸 하루가 유치한 꿈같으면서도 완벽하게 행복해서 나를 많이 흔들었다. 잘 모르는 타인에게 이렇게 까지 친절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정말 특별한 사람 같단 생각이 하나, 나에 대한 호감이 전혀 없다면 이렇게 해주지는 않을 것 같아서 나에 대한 호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하나. 커다란 생각 두 개가 머릿속에 가득 찼다. 간단한 호의에도 갚을 일이 생기는데 다양한 친절을 누렸으니 차차 갚을 일을 만들어 가면 될 것 같다. 자연스럽게 연락할 일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이어지지 않을까? 인연을 이어가도 괜찮을 이유가 무궁무진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강릉을 가기로 한 건 참 잘한 일이었다. 관계의 첫 단추를 잘 꿴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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