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삶은 편안해 보이는데, 누군가의 삶은 참 힘들다. 얼굴빛만 봐도, 피부의 윤기만 봐도 알 것 같다. 몇 년 전 까칠했던 내 얼굴을 떠올리니 그때의 나도 가까운 지인들에게 참 힘들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늘 만나는 언니들은 고민이나 걱정이 없어서인지 얼굴이 편안하다. 미인의 이목구비는 아니지만 웃는 표정이라 주름도 자연스럽다.
오랜만에 보는 언니는 내보내지 못한 고인 물이 몸 안에 차 있는 듯 무겁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상만큼이나 힘든 일이 언니를 괴롭히고 있다. 젊어서 고생을 시킨 배우자가 나이 들어 철이 든다고 해도, 벌려놓은 일들의 수습은 남는지 지속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 행복이란 사람 사이의 일, 관계라는 생각이 강렬해진다. 모르고 하는 결혼이지만, 한마디로 결혼을 잘해야 된다. 연결된 인연이 삐그덕 거리면 유지가 되어도 힘들고, 끊어져도 힘들다. 가족으로 묶인 인연이 한순간에 정리되는 것은 아니니까.
배우자의 잘못은 아니더라도 자꾸 일이 꼬이거나, 가족 간에 문제가 있으면 아내의 역할은 과도하게 부담스러워진다. 가까운 타인과 밥 먹고 차를 마셔도 친절한 사람의 에너지를 만나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지만, 반대일 때는 감정에 이입되어 불편하기 마련인데, 일생을 같이 하는 배우자의 기운은 얼마나 중요한가. 내 인생은 가장 가까운 옆 사람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살아가며 좋은 일에만 엮일 수는 없지만, 좋은 일로 만들어 가려고 애쓰는 사람을 만나긴 해야겠다. 꼬인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득일지 실일지, 약일지 독일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좋은 기운이 좋은 일을 부르지 않을까. 좋은 일이 생기는 사람과 관계를 맺다 보면 나도 좋은 기운을 받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다.
살다 보면 헤어질 수도 있는데 이별도 좋은 사람과 해야 힘들지 않다. 만나는 사람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인생을 나누는 사람도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어야 인생이 편하고, 행여 인연이 끝나서 헤어지더라도 고통이 덜하다고 믿는다. 꼭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려워도, 좋은 일이 생기고 좋은 기운을 불러오는 사람과 인연을 맺을 필요는 있겠다.
착한 언니에게 자꾸 힘든 일이 생겨서 나도 마음이 아픈데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들어주고, 언니의 마음이 단단해지도록 응원의 기운을 보탤 뿐이다. 다음에 만나면 좋은 소식이 들리길 기대하며. 잘 풀기길 기다리며.
유난히 추워서 체감 온도가 20도인 날, 오랜만에 지인과 홍대에서 술 한 잔을 했다. 사는 게 고민스러운 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오십을 넘기며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고는 있지만, 사는 게 힘들거나 고민스럽지 않은 나는, 이런저런 일들이 힘에 부치거나 피곤해도 기본적으로 재미는 있다.
사람은 복합적이라서 성격을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겠으나 내가 판단하는 나는, 여린 것도 맞고 예민한 구석도 있지만 남성스러운 성향도 있어서 작은 일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잘 삐지지 않는 무심함도 있다. 잔 감정의 변덕은 있으나, 삶에 대한 인식이랄까, 큰 감정이랄까. 크게 왔다 갔다 하지 않다 보니 사는 일이 기운 빠지지는 않는다. 감정이 고일 때는 글로 휙 써두면 금방 비워져서 또다시 재미있어진다. 어쩌면 나를 둘러싼 지인들과 가족들이 나의 기운을 빼지 않아서 그런 것도 같다. 고마운 환경, 고마운 인연이다.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을 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인의 이야기에는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 감정이란 얼마나 복잡한가. 그 복잡함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자녀를 키우다 보면 기쁘기도 하지만, 버거워서 힘에 부치면 웬수가 따로 없다. 미움이 누적되어 나도 모르게 잔소리를 퍼붓다가도 어느 날은 언제 이렇게나 컸는지,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마운 생각이 든다. 소중한 사람, 가까운 사람에 대한 감정은 비슷할까. 좋으면서도 서운하고 그런 것.
누군가에 대한 감정이란 한 가지 일리가 없다. 인생에 대한 평가만큼 자주 변덕을 부리겠지. 긍정과 부정 사이를 넘나들며 변덕스러운 감정이 정리되지 않을 때, 누군가와 공감 섞인 대화를 나누다 보면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랬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뒤통수 맞듯이 깨달아지는 때가 있었고, 한참 지나고 나서야 선명해지기도 했다. 지인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상충되는 감정 속에서 진짜 감정을 알아챈 느낌이 전해진다. 그렇다면 추운 날의 술자리는 보람이 있는 시간이다.
사람들과의 대화는 내 인생에도 도움이 된다. 배우는 지점이 있다. 딱 잘라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알지 못했던 인생이란 녀석을 알아 버리게 된다. 소설 주인공의 삶은 나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재미가 있듯이 타인의 삶은 나와 다르지만 또 비슷하기도 해서 와닿는다.
꼭 교훈은 아니더라도 겸허해 진다. 나를 돌아보며 마음을 챙기게 된다. 저축한 기분이기도 하다. 내 삶에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왔을 때, 하소연이 하고 싶어질 때 그들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