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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의 늦사랑 <4> 자존심이 상한다

by 루서


국내 여행지 중에서 유난히 많이 갔던 장소가 강릉이다. 언니들과 여러 번 다녀왔고, 엄마와 짧게 나들이 삼아 다녀오기도 했다. 하필 전남친과 유일하게 다녀왔던 짧은 여행지도 강릉이었다. 안목해변부터 강릉시장, 허난설헌 생가와 오죽헌, 경포대와 박물관이 눈에 선한 곳이다. 6월 즈음 허난설헌 생가에서 보았던 수국의 화려함도, 카페에서 바라본 안목해변의 풍경도 잊히지 않았다. 강릉은 갈 때마다 좋은 여행지였다. 여러 번 또 간다 해도 가고 싶은 곳이고 지인도 언젠가 꼭 같이 가자며 약속해 둔 여행지였지만, 강릉에 사는 그가 궁금하지 않았다면 미뤘을 장소였다.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에 백 프로 동의한다. 갈 때마다 마음에 든 장소를, 호감 있는 사람이 가이드를 해준다는 기대감에 두근대는 심장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 밖으로 벗어나 버렸다. 들뜬 마음이 빚어낸 기쁨은 일상을 탈출한다는 만족보다 훨씬 강렬했다. 여행의 목적이란, 새로운 장소의 탐색일 텐데, 이번 여행은 사람에 대한 탐색으로 들떠서 풍선처럼 부풀었다.



나는 그의 음성이 참 좋다. 세미나에서 강의를 듣지 않았더라면 강렬한 호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도록 그의 목소리 듣는 걸 좋아한다. 처음 들어본 소리인데, 오래 들어온듯 마음이 편안했다. 급하지 않은 속도로 차분하게 전하는 목소리에는 따듯한 온기도 있고, 선명한 논리도 있다. 아이에게 차근차근 일러주듯이 명확하게 말하는 태도는 이성적이어서 명징한데, 목소리의 톤이나 말투가 포근하다. 혹시 강원도 사투리가 내 취향일까? 명확한데 날카롭지 않고 포근해서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니, 미친 게 맞나 보다.



그와 강릉을 함께 보고 걷는 사이, 호감의 크기는 더욱 커졌다. 맨발 걷기를 할 때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모습에서 깔끔한 남자일 것 같단 예상, 걷기를 마치고 미리 수건을 준비했다가 발을 닦을 수 있도록 미리 챙기는 모습에서 잘 챙기는 사람일 것 같단 기대감, 바닷바람 맞으면 추워서 안된다며 점퍼를 덮어주는 그에게서 섬세한 사람이겠다는 예감이 스쳤다. 작고 사소한 것들을 미리 챙기는 태도는 딸바보 아빠처럼 자연스러웠다.



짧은 시간에 그가 더욱 좋아졌다.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란 확신이 들었다. 세세한 항목을 나열해서 체크리스트 방식으로 평가하기보다는 두리뭉실해도 전체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판단이 나에게는 매력포인트가 되곤 한다. 돈 많이 벌고, 뛰어난 능력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그보다는 사람이 좋아야 한다고 여긴다. 이분법적으로 선택하라면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다. 그는 좋은 사람 같았다.



강릉을 다녀와서 자연스럽게 연락을 주고받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었다. 바람은 바람일 뿐이고, 꿈은 꿈일 뿐인가 보다. 내가 톡을 보내면 열심히 답장은 했지만, 먼저 톡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 '배려가 깊고 매너가 좋다고 하더니, 카페 회원 중 한 명에게 베푼 인간적인 접대였을까?' 생각이 많아졌다. 호감이 전혀 없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내 기준에서는 의아하기만 했다. 하루를 온전히 내어줄 정도라면 그래도 호감이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니냐고. 친분도 없고, 잘 모르더라도 섬세하게 챙겨주며 자기 시간을 할애하는 기준을 지닌 사람이 있는 걸까? 나한테 호감이 있어서 챙겨준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걸까?



마음속이 복잡해지면, ' 에라 모르겠다. 톡 보내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라며 먼저 톡을 보냈다. '덕분에 즐거웠어요. 감사해요.' 정도의 사심을 섞지 않은 간단한 안부 톡을 보내면, 그에 맞는 답이 오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기타 연주를 하는 모습이 멋있어서 사진을 찍어두었고, 그에게 보내주었다. 사진이 참 좋다면서 카톡프사를 바꾸는 그를 보며 점점 더 헷갈렸다. '나라면 머나먼 타인이 찍어준 사진을 카톡프사로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왜 내 사진을 카톡프사로 쓸까,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는 사람인가.... ' 물음표가 백만 개쯤 머릿속에 가득 찼다.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지만, 내가 연락하면 답장삼아 보내주는 톡에서는 친밀함이 전해졌다. 나의 대한 호감이 아니라 배려 깊은 사람이라는 인상이 점점 진해지며 포기할까를 생각할 즈음, 아이들이 생일을 챙겨주었다며 아이들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내주어서 더 미궁에 빠져 버렸다.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아이들이 나오는 영상을 보낼 것 같지는 않은데 나에게 보낸다는 건, 그린 라이트가 맞는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 나란 사람은 어떤 지점에 위치하는 걸까.



미궁에 빠져버린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성 관계에서 한 번도 내가 적극적인 적이 없었다. 적극적일 필요가 없었다. 내가 망설일 시간 없이, 늘 먼저 다가왔기에 감춰둔 속 마음을 꺼내 보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달랐다. 내가 찌르지 않는 한, 반응 없는 사람은 머리 털나고 처음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자존심을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고민인데, 막상 그랬다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마주했을 때 내 모습이 어떨지 그려지지 않았다. 꼭 진전이 없더라도 일상의 톡을 보내면서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게 나은건지, 애매한 관계는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게 나은건지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려울 때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다. 생각의 늪에 빠지면 처음 의도를 잃게 된다. 톡을 보내고서 그의 톡을 기다리다가, 진동이 오면 환하게 웃는 내가 느껴졌다. 그의 톡이 오면 자꾸 웃음이 나며 행복해졌다. 먼저 톡을 보내는 게 뭐 대수라고. 가끔 일상을 전하는 톡을 보내도 되냐고 물으니 좋다고 하여, 생각날 때면 안부 삼아 톡을 보내는 일이 세상 어떤 일보다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렇지, 매번 내가 먼저 보내냐.' 속이 없다는 생각에, 일주일 동안 톡을 하지 않았다. 역시 그는 톡을 보내지 않았다. ' 이 사람은 여성으로서 나에게 관심이 없구나.' 결론을 내려도 괜찮을 시간이 왔다. 그래서 카톡방을 나왔다. 매번 내가 톡을 보내서 안부를 묻는 건, 모양새가 빠지는 것 같아서 그만하기로 했다. 호감과 자존심이 비등해졌다. 자존심보다는 안 해보던 일을 하다 보니 낯설고 불편했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민폐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 누구에게나 베푸는 친절에 혼자 감동했던 모양이라고 내 마음을 다독였다. 이제는 그만해야 했다.



머리로는 그만하는 것이 맞는데, 마음은 한 여름의 날씨처럼 변덕스러웠다. 이렇게 흐지부지 되어야 하는 일인지 의문도 들었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마음을 품었는데, 표현도 못하고 접어야 하는 게 억울하기도 했다. 여자가 그 정도로 신호를 보냈으면, 여자의 마음을 알고 남자가 더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는 예상과 다른 패턴을 가지고 있거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어쩌지?" 여러 번 고민을 해도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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