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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의 늦사랑 <5> 포기할게요

by 루서

밀당하는 연애는 해 본 적이 없다. 좋으면 고! 아니면 스탑! 명료하고도 선명했던 선택이 마음 편하다. 좋은데 아닌 척하고, 아닌데 괜찮은 척하는 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 호감이 가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 보다가, 마음에서 '아닌 것 같아.'라는 신호가 잡히면 관두는 게 내 방식이다. 호감이 있다고 가볍게 콜! 하지도 않는다. 그랬다면 연애 경험 없이 첫사랑과 결혼했을 리가 없다. 어릴 적에 혼자서 짝사랑한 경험은 어렴풋하게 있었는데,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는 일은 애들 말로 쪽팔려서 싫었다. 그 시절에는 호감보다 자존심이 소중했다.



마음 나이는 거꾸로 먹어가는가 보다. 좋은 마음을 감추고 아닌 척 하기가 사춘기보다 어렵다. 좋으면 누가 봐도 훤히 보이는 꼬마라도 된 것 같다. 어쩌면 삶이 평안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연애 고민이 아니면 크게 신경 쓸 일이 없거나, 신경 써봤자 달라지지 않으니 오히려 스스로에게 더 집중이 되는가 보다. 내 마음의 동요를 모른 척할 수는 없는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몰라 가까운 절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썸의 꽃은 설렘이고, 설렘의 핵심은 밀당이잖아. 먼저 연락하지 말고 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며 그 시간을 즐겨. 나라면 연락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언니들의 조언을 들으면 그 말이 정답 같았다. 연애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도 아니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연애인데 내가 적극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언니들 말을 듣고 그래야겠다고 결심은 했는데, 참 이상하지, 고민이 끝나지 않는다. 역시 밀당은 내 방식이 아닌 걸까.


사는 일도 벅차서 빠듯한 친구에게 염치도 없이 연애사를 물었다. "나는 재고 따지는 연애 못해. 밀당하는 거, 피곤하지 않냐. 우리 나이에 연애하면서 피곤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대놓고 물어보는 게 마음 편하지 않겠니?" 친구의 말에 마음이 좀 더 기울었다. 감정으로 편들어 주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와서 그런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보다 적극적으로 풀어내는 게 나아 보였다. 안정적이지 않은 관계에서는 최악을 먼저 헤아려 보게 되는데, 내가 생각한 최악은 거절이었다. 거절, 아프지만 견딜만할 것 같다. '그래, 인생에서 한 번은 대시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한 번 차여 보는 것도 인생 경험이잖아? 안 해보고 후회하느니, 해보고 창피한 것도 괜찮지. 그리고 대시가 창피할 일도 아니잖아?"



방식을 고민했다. 맞는데 아닌 척도, 아닌 데 맞는 척을 못하니 솔직할 수밖에 없다. 솔직에도 수준이라는 것이 있는데 어떻게 드러낼까. 결론은 대시라고 해도, 방식은 내 스타일이어야 했다. 톡을 하면서 가장 마음 쓰였던 부분을 질문하기로 했다. 미리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정말 물어보고 싶었다. 사회생활을 오래 하면서 길러진 사회성이 연애 감정에도 스며들었을까? 내 마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강박이 우선이었나 보다.



"잘 지내셨지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안부의 톡을 보낸 후에 하고 싶은 말을 건네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듯, 손가락이 망설여졌다. "오늘은 시간이 많아요. 물어보고 싶은 거 못 물으면 화병 나요. 뭐든 물어봐요." 그의 말에 용기를 내렸는데 톡으로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통화할까요?"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뭐든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저는 호감이 없는 이성이 자꾸 연락을 하면,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거든요. 카페도 사회생활인데,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르는 사람에게 딱 잘라 거절하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전화번호를 가능하면 알려주지도 않지만, 어쩌다 톡이 오거나 연락이 와도 잘 대응하지 않아요. 그런데 눈치 없이 계속 연락을 하면 피곤해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니 제가 당신에게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연락 오는 게 싫은 사람인데 타인에 대한 예의나 배려 때문에 응대를 해주는 건 힘든 일이란 걸 잘 알면서 내가 민폐녀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연락하지 않았어요. 제가 연락하는 게 싫으시면 말씀해 주셔도 괜찮아요.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민폐는 싫으니까, 부담스러우면 알려주세요. 제가 연락을 하지 않을게요. 포기할게요."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거든요. 내일 모임에서 만날 테니 만나서 이야기해요." 한참 지난 후에 그는 그날 속으로 웃음이 났다고 한다. '시작도 안 했는데, 뭘 포기한다는 거지? 뭘 해보고 하는 게 포기 아닌가'



바로 다음 날이 독서 모임이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해서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 멀리서 걸어오는 그가 신경 쓰였다. 어제의 통화에 살짝 기대감이 남았는지 반가우면서도 속 마음을 다 꺼내보인 내가 부끄러워 불편했다. 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간 후에는 긴장이 풀리며 나는 다시 발랄해져 있었다. 독서 모임에서는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지며 활달해져서 내 안의 E성향이 많이 발현되곤 한다.



뒤풀이 장소에서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고 싶었지만, 사람이 많아서 티를 낼 수 없었다. 멀리 앉게 되어 서운하면서도 다른 테이블에 앉는 것이 마음 편할 것도 같았다. 마음은 속일 수 없었다. 귀는 저 쪽 테이블에 두고, 같은 테이블에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건성으로 들었다. 반응은 어느 때보다 더 발랄했다. '내가 지금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태도를 일부러 보여주는 건가?' 스스로를 진단해 보았다.



술이 한 잔 들어가며 자리에 이동이 생긴 사이, 그가 내 앞으로 와서 앉았다. '내가 싫지는 않은 것 같은데?' 카톡으로 연락하는 사람이 싫으면 어떡해서든 피하려고 하지, 일부러 찾아와서 앉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활짝 미소가 지어졌다. 술 한 잔 들어가면, 없던 애교가 넘치는 내가 꽤 괜찮아 보일 거라며 여성스러운 몸짓을 마음껏 표출했다. 스스로가 가증스러우면서도 자동반응 가능한 내가 신기할 지경.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친근한 대화도 가능했다. 그에게는 또래 남성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깊이와 성숙함이 있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하는 태도에 신중함이 있었다.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며 속으로 셀프 칭찬을 남발했다.



자리를 이동할 때는 한층 친근해졌다는 표현으로 그를 툭툭 치며 대화를 이어갔다. 2차 장소에서는 같이 걸어갔기에 그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술을 잘 마시지 않은 그는 하이볼을 처음 마셔 본다며 기분 좋아했다. "내일 이야기해요"의 뒤편을 기대하며 옆 자리에 앉았지만, 단체 모임이라 개별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워 보였다. 친해 보이는 것만으로도 어떤 소문이 날지 모르기에 조심스럽기도 했다. 옆자리에 앉아서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 언니 잠깐, 나와 보세요." 밖으로 나오라는 지인의 전화에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를 나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다는 지인은 내가 나오자마자 톤을 높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저분이 테이블 이동해서 이야기하는 분도 아니고, 지금도 저렇게 옆에 딱 붙어 계시는 걸로 봐서는 강한 호감이거든요. 감정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세요. 사람들 많은데서는 두 분이 이야기 나누기 어려우니까, 따로 불러내서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두 분 사이 오가는 감정선이 남다르니까, 회원 중 한 분이 두 분 사귀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얼른 전화하세요."



사람들 많은 단체 모임에서 개별적으로 불러내어 대화를 하는 일은, 먹어 본 적 없는 곱창을 배민으로 직접 시켜서 혼자 다 먹는 일처럼 신세계의 일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 그런 거 못하는데, 어쩌지?" 라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니, 서울에 올라오는 일이 거의 없는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오늘 말고는 없을 것 같았다. 오늘이 지나면, 또다시 예전처럼 카톡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고민을 계속하게 될 게 뻔했다. "지난번 못한 이야기를 다시 해 볼까요?" 라며 내가 먼저 연락하는데도 수십 번, 수백 번을 고민할 테니까.



지인의 애타는 다그침에 힘을 얻어 전화벨을 눌렀는데 받는 기척이 없다. 술이 조금 들어가면 졸려하는 그는, 내가 없는 사이 잠이 들었을 것 같다. 속 타하는 지인 앞에서 또 "어쩌지?"를 반복하다가 다급해진 마음 사이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지인 남자 친구가 그와 함께 있었다. "동생이 남자친구에게 전화해서 그를 밖으로 나오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 기다려 보세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인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가 된 나는 1초가 1시간인 듯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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