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떠나 있었다. 떠나도 그만인 온라인 공간이었다. 지겨웠던 기억이 시간이 흐르며 흐려진 걸까. 어떤 끌림인지 모르겠지만 이유 없이 돌아가고 싶어졌다. 떠나온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는데, 돌아갈 이유는 찾지 못했다. 눈 길이 머무는 자리에 발길이 향하듯이 움직였다. 익숙한 길만 다니다가, 문득 새로운 길이 궁금해진 아이처럼 떠나온 곳을 두드렸다. 떠나기도 쉽고 돌아오기도 쉬운 자리였다. 놀이터에 조건이나 규제는 없으니까.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나 불편한 닉네임을 검색해 보았는데 괜찮을 듯했다. 과거의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이름으로 머문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단 보이지 않아서 마음이 놓였다. 나도 2년 전의 글을 모두 지우고 새로운 닉네임으로 다시 찾았으니, 나를 쉽게 발견하지는 못할 터였다. 호되게 당한 것도 아니고, 있을 법한 일을 가볍게 겪었을 뿐인데 다시 휘말리고 싶지 않은 마음은 강한가 보다. 그동안 끼리끼리 어울려서 비슷한 사람들하고만 교류를 해오다가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기운이 빠지긴 했었다. 이제 겨우 회복을 했는데 혹시 같은 일이 반복되면 어쩌나, 걱정이 도졌다. 예상 범위를 넘어서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두렵다. 이번에는 좀 더 조심스럽게, 내 필터를 거치며 검증된 사람들과 인연을 이어갈 텐데도 조심스러웠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사람이기도 하기에. 나도 나를 잘 모르므로.
"오랜만이에요, 언니. 이번에 강의 신청 하셨더라고요. 이번에 강의해주시는 분이 좋은 분이시거든요. 그래서 언니한테 소개해주고 싶었는데, 제가 다쳐서 강의 참여를 못하게 되었어요. 언니 스타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잘 살펴보세요."
한참 알고 지냈던 지인이 봄바람 일렁이듯 소개팅을 해주고 싶었다는 말만으로도 설레는데 좋은 사람 인증을 해주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물론 남녀 간의 일은 예측에서 벗어나기 마련이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소개를 해줘도 당사자의 마음은 다를 때가 많아서 소개를 해주는 일도 쉽지 않은데 마음 써 주는 사람이 고마워서 마음에 담아두는 정도랄까. 나도 나를 잘 몰라서 내가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지도 알지 못하고, 새로운 인연을 이어가는 일에 대한 마음 자세도 명확하지 않기에 덕담으로 듣고 말아도 그만이다.
2년 만에 만난 지인들이 반갑기도 하고, 새로운 분들의 인상이 좋아서 생각보다 조금 더 들떴다. 눈여겨보라고 했던 그는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다. 조리 있게 내용을 전달하는 목소리가 외모보다 더 끌리는 기분. 강의를 마치고 뒤풀이 자리로 이동해서 첫자리를 잡아야 할 때 다른 때보다 많이 망설였다. 어디에 앉아야 그 분과 좀 더 가까이 앉을 수 있으려나. 강의를 했던 그와 주최자는 정리를 하고 느지막이 올 텐데 어떤 자리가 좋을지, 복잡한 계산이 머릿속을 스쳤다. 처음 보는 사람도 많은 모임이라 친분이 있는 사람 가까이 앉고 싶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와 가까운 자리에 앉고 싶다는 욕망에 미적분 보다 복잡한 계산이 순간 머리를 흔들었지만, 예측 불가의 계산을 미리 해둘 수는 없었다. 그저 운에 맡겨야 했다.
결정이 어려울 때는 구석이 최고다. 중심에서 벗어나 테이블의 가장 끝자리에 앉았는데, 내 자리 옆으로 그가 왔다. 자리가 없어서 의자를 가져와 테이블 모서리에 앉은 꼴이었다. 반대편에 자리도 많은데, 없는 테이블에 의자를 가져와 앉는 그를 보며 잠깐 설렜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니 담배를 피우러 나가기엔 그 자리가 가장 수월해 보였다.
" ㅇㅇ 사신다면서요. 안 그래도 연휴 기간에 놀러 가고 싶은데, 좋은 곳 많죠?"
" 놀러 오시면 가이드해드릴게요. 모임 사람들도 휴가 기간에 놀러 오면 저희 집에서 1박 하고 가기도 했어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며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초면에 연락처를 알려주는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와는 당연한 일 같았다. 잘 아는 지인이 보증한 사람이고, 3년 넘게 모임을 해오며 다들 친분이 있어서 그랬는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닉네임도 아닌 실명으로 연락처를 저장했다. 알자마자 바로 실명을 발설하지 않는데, 이 모임은 다른 모양이었다. 서로 알아가는 일이 별 거 아니라는 듯 편했다.
뒤풀이는 한창이었지만, 늦게 까지 자리를 바꾸어 가며 술을 마시는 건 부담스러워서 집에 가야 한다며 일어섰다. 그가 따라 나왔다. 잘 들어가라고 악수를 건넸다. 자신의 강의에 와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로 보였다. 매너가 좋고 배려심이 출중하다는 평판이 틀린 말은 아니었나 보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공짜로 강의를 하면서도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자료를 만든 걸 보며 보통 사람은 아니라 여겼는데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남달랐다.
그가 더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먼저 연락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나도 자존심 있지.' 한편에는 그런 마음도 조금 있었을지 모른다. 그보다는 얼글 한 번 보고 연락이 오거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친한 척해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강의가 한 차례 더 있을 거라 했으니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다. 그 사이 '온라인 책 읽기 모임'에서 조금씩 관찰해 보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깊이 있게 탐색할만한 조건은 아니었지만, 오가는 말들 사이에서 그가 보일지도 몰랐다.
"강의가 어땠나요?" 피드백을 원하는 그에게 간단한 소회를 이야기하며 먼지 날리듯 가볍게 연락을 이어갔다. 첫 강의에서 많은 내용을 전달하지 못해서 2차 강의를 준비 중인 듯했다. 활동을 잘 하지 않는 그를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소풍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신난 마음으로 강의날을 기다렸다. 무엇이 내 마음을 흔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마음이 부쩍 궁금해하고 있었다.
마음이 움직인 이유를 짚어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마음을 헤아려보는 방식은 과거 나와의 비교밖에는 없었다. 이십 대의 나는 사람에 대해 깊이 관찰하고 알아본 후에 마음에 품지 않았다. 생각 없이 둘러보다가 꽂히게 된 무엇처럼 마음의 추가 갑자기 움직였던 기억이다. 갑자기 좋아했는데 많이 좋아해 버렸다. 내가 많이 좋아하지 않으면 만남은 길게 가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회의감이 생기면 만날 마음이 조금씩 사라졌고 상대를 회피해 버렸다. 내 마음의 방식은 처음부터 강렬하게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스타일인가 보다.
전남편도 길가다 만난 듯,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은 아니었다. 주변에서 충분히 검증해 준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다면 의심하지 않는 것도 내 방식이었다. 가까이서 본 나보다 오랜 시간 지켜봐 온 사람들이 훨씬 잘 알 테니까. 괜찮은 사람일 테니 나는 좋아하기만 하면 되었다. 검증된 사람이라도 나와 맞을지 아닐지는 지켜봐야 하는데, 마음이 넘어가면 계산이 잘 되질 않았다. 그는 나보다 더 계산할 줄을 몰랐다. 어쩌면 어려서 그랬을 수도 있다. 잴 줄 모르는 마음이 사랑을 키웠을 것이다.
28 청춘의 뜨거운 시절도 아니고, 세월 따라 마음 근육이 단단해졌으니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오래전처럼 가슴 뜨거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안전한 구역에서만 지내다가 새로운 영역에서 낯선 사람을 겪어보니, 가까이하기엔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들도 많았다. 마음을 주는 일은 오히려 젊었을 때보다 더 어려워 보였다. 이래 저래 계산을 해 보다가 지레 마음을 거두는 일이 내 나이에는 다반사니까.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온전히 쓴다는 건 피곤하기도 하다. 안 그래도 흔들리는 나이, 사람 때문에 상처받는 일이 생긴다면 피하고 싶은 인생 시즌에 굳이 뭘 시도할까.
시큰둥할 수밖에 없다. 새로울 게 없는 나이라 크게 궁금할 일도 없지 않은가. 남녀 사이의 일이란, 뻔하디 뻔하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인생은 수학공식이 아닌데 남녀 사이의 사건은 수학공식 같기도 하다. 설렘의 기간을 거쳐 친근해지고 친근함이 편안해지면 권태기가 오며, 그 끝은 물리적 이별이 아닐지라도 정서적 이별을 마주하기 쉽다. 가열되면 온도가 오르고, 한계점에 다다른 이후로는 더 이상 온도가 오르지 않으며, 식을 일만 남는다. 쫄아들면 남는 것도 없다. 그저 빈 가슴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는 환상동화이기 때문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시간과 함께 축적되는 깊고 진한 사랑은 내 몫이 아닐 확률이 크다. 사랑은 수학, 혹은 열역학 법칙이라니까.
그래도.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향긋해서 따라가 보기로 했다. 두 번째 강의에서 그는 어떨지 궁금해하기로 했다. 티 내지 않으며 그를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이미 긍정적인 필터를 적용했기에 계산값은 뻔하겠지만, 자유로운 탐색은 가능했다. 그 사람은 나의 호감조차 모르고 있을 테니 내 맘대로 자유롭게 주판알을 튕겨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2차 강의 일정이 오픈되었다. 제일 먼저 신청을 하자니 너무 기다린 티가 나는 것 같아 시간을 두고 신청을 하려고 느긋하게 여유를 부렸다. 아뿔싸.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겨 버렸다. 역시 인생은 뜻대로 안 된다. 그를 만나기 전에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생겼다.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