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섣부르다고 생각한다. 사람 사이의 일은 어느 정도 지나고 마음을 담는 것이 맞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풋과일 급하게 베어 무는 맛보다 익힌 후에 먹어야 달콤하다는 것을 잘 안다. 지나고 나서 마음을 돌이켜 봐야 정확하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사람도 한참을 겪어봐야 한다. 조급한 판단은 틀리기 쉽다. 그래도 내가 겪은 일이고, 겪고 있는 일이다. 지나고 나서 떠올리면 많은 부분들이 잊힐 수도 있다. 순간에 떠올랐던 내 생각과 감정은 떠나버린 버스의 뒤통수처럼 어렴풋해서 기억의 왜곡이라는 조미료가 더 가미될지도 모른다.
사람의 일은 장담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짧은 경험으로 끝날 수도 있다. 이미 그런 인연을 겪기도 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경험은 약하더라도 트라우마로 남아서 관계에 대한 확신은 더욱 어렵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날 수 있는 사이가 남녀 관계란 걸 호되게 배웠다. 그래서 글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글이 감정을 강화한다는 진실을 시험해 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어떤 능선을 넘어가며 글을 쓰기 어려워진 이유도 있다. 글 쓰기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각 잡고 쓰는 건 아니더라도 글쓰기를 좋아하는데, 요즘은 글쓰기 습관을 지켜 나가기가 어렵다. 더 이상 방치하다간 한 번도 글을 써 보지 못한 사람처럼 퇴화할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상상해서 창의적으로 글을 쓰는 작업은 내 몫이 아니다. 현실주의자의 글은 현실에 대한 고찰에 있다. 내가 겪고 있는 지금을 남기는 것 말고는 글을 쓸 방법이 없다.
성급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다. 어떤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고 결론은 어찌 될지도 모르겠다. 나도 나를 잘 모르고 나의 글은 더더욱 모른다. 막연하게나마 써 보기로 한 것은 새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새해에 결심 하나씩 하듯이 올해도 글을 꾸준히 쓰자는 약속을 하고 싶은데, 마땅한 이야깃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겪은 일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 말고는 쓸 수 있는 글이 없는 나에게 선택할 수 있는 소재는 작년 가을부터 새롭게 시작한 연애뿐.
겁도 없이 시작했다. 450KM 떨어진 롱디 연애를. 팔팔하게 기운 넘치는 시절에도 해보지 못했던 장거리 연애를 오십도 한참 넘은 나이에 하는 중이다. 경기 북부와 남부의 거리, 서울 서쪽 끝에서 동쪽 끝도 멀어서 연애를 끝내는 사람들도 보았으니 경기 북부에서 경남까지의 먼 거리는 충분히 겁이 날 만한데, 아무 생각이 없었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했다.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는 걸림돌도 아니라면서.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라서, 먼 거리 연애를 하는 오십 대 커플의 이야기는 당사자에게만 재미있다는 것도 잘 안다. 남의 연애에 누가 관심이 있을까. 방송 프로그램처럼 조미된 맛도 없는 개인사를 누가 궁금해할까. 그래도 혼자 알고 있는 것보다는 남들과 함께 읽어가면 글쓰기에 도움은 되리라 판단했다. 이야기는 타인에게 도움을 주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라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타인을 의식하는 글쓰기는 나에게 필요할 테니까.
재목을 고민했고 잠정적으로 정했다. 감정적으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거리지만 물리적으로는 꽤나 먼 둘의 이야기라서 '두 도시의 사랑'이다. 늦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서 '두 도시의 늦사랑'이라고 할까도 싶다. 진행 중이니 언제든지 수정하면 된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중년의 롱디연애, 혼자 조용히 사부작거려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