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우울증을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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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탐구
성취와 성공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던 자기계발서들이 언젠가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괜찮아, 애쓸 필요 없어' '지금 그대로도 충분해' 뉘앙스를 전하며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쪽으로 달라졌다. 유행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행도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니 '요즘 사람들' 의 트렌트는 확실히 '소확행' 혹은 '아보하'에 방점이 찍혀 있다.
살아보니 맞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막상 그렇게 했더니 별 거 없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해서 타고난 체력 이상으로 노력하는 모범생으로 살았는데 고작 이 정도밖엔 안된다.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고 해서 20여 년 간 자아의 정체성을 온통 '엄마'에 두고 살았는데, 막상 키워놓고 보니 굳이 그리 키울 필요가 있었나 싶다. 좋은 먹거리 먹여야 한다고 유기농만 먹이고, 가공식품을 먹이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 했건만 언젠가부터 아이들은 패스트푸드에 익숙하다. 사교육의 폐해를 줄인다며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가입하여 원동력을 얻으며 '자기주도학습능력'에 올인했지만 과연. 내 젊음을 바쳐가며 엄마 노릇에 교사 노릇까지 하느라 고생할 일이었는지 물음표가 가득하다. 출근하며 모유먹인다고 내 몸이 내 몸이 아닌듯 고생하고, 체력 생각하지 않고 밤새 아이들 끼고 잤던 세월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엄마로서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지만 무리는 맞다. 허망하다는 표현은 아니다. 노력한만큼의 보람과 뿌듯함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유난떨 필요는 없었다는 뒤늦은 결론이다.
부모님이 아이를 키워주셔서 육아를 직접 담당하지 않은 동료들의 자녀와, 엄마가 악착같이 끼고 키운 자녀들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관련 연구나 논문을 찾아보지는 않았으나, 양적 밀착보다 질척 밀착이 더 중요하고 주양육자의 마인드나 태도가 아이의 성품을 좌우하는데 더 큰 영향을 미칠거라 예상한다. 악착같았던 과거의 경험이 ' 다 쓸모없는 일'은 아니겠지만, 무리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법칙은 아니었을텐데 스스로에게 깐깐해야 해서 힘들었다. 힘든만큼의 성적을 거두었는지 수치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객관화를 해본다면 글쎄. 인풋대비 아웃풋이 별로라 해도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엄마의 유난함을 감당해야 하는 가족도 힘들었을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있다.
남들처럼 살기위해, 학교생활에 충실한 모범생으로 살다가, 남들 다 하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해서 자녀낳고 키우다보니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했다. 하필 선택한 직업도 남들 보기에 반듯해야 해서, 생각할 틈없이 붙여진 책임감에 더 완벽하기를 스스로 강요했다. 그렇게 30년 즈음 지내고 나니 쉰.
아직도 아이들을 키우느라 자유롭지 못한 또래도 많은 50대. 온전한 마무리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역할에서 벗어나는 시기가 되자, 나를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나란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아이를 위해 공부를 시작했던 사주를 스스로에게 도입해서 분석해 보기도 하고, 크게 의미두지는 않지만 MBTI 에서 설명하는 나를 탐색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이 가끔 말하는 내 모습에서 ' 맞아 내가 이런 사람이지.' 깨달는 순간도 있다.
'잘 몰라서' '나는 나를 잘 모른다' 제목의 책을 읽기도 했는데, 아직도 잘 모른다. 명확한 에고가 있어서 내면에 감추어둔 무의식을 파악해야 한다는 명제보다 '인간은 변한다' '페르소나도 내 모습이다.' 쪽에 마음이 기울어서 나를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선명한 내가 궁금해진다.
나는 I보다는 E성향이 맞을까. 사주에서 설명하는 독립적인 사람인가. 삶에서 가장 비중이 큰 부분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어서 타인이 나를 책임져 주면 모르겠지만, 오롯이 스스로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니 앞으로의 인생은 누구의 영향보다 나의 영향력이 가장 크지 않을까. 그러니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나'를 파악해긴 해얄 것 같다. 웃음이 나기도 한다. 특정 고유명사로 살아온 세월이 50년이 넘는데 왜 아직도 잘 모르는 건지.
나를 증명하는 증거는 '경험들에 대한 감정의 축적' 생각에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지를 떠올려보았다. 활동에 깃든 내 의도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도 헤아려 보았다. 사람은 일단 선택을 내리고 행동을 한 후에 이유를 붙이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반복되는 선택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을테니까.
경험의 반복으로 내려본 결론은 정확하지 않다. 데이터의 구성 자체가 주관적이서 그런지, 본인에 대한 판단이건만, 타인에 대한 시선처럼 두루뭉술하다. 누군가를 설명할 때 할 수 있는 착하구나, 너그럽구나, 활동적이구나, 내향적이구나, 급하구나, 느긋하구나. 와 비슷하지만, 명확하게 짚이는 지점도 있긴 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
일단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바빠야 한다. 유전자에 박혀서 나온 성향인지, 살면서 길러진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 여유가 많아지면 괜시리 외롭다. 관계에 의존해서 꼭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외부의 일이 있거나 내가 정한 일거리가 있어서 시간틈업이 사는 걸 좋아한다. 게을러지는 순간, 답답해 한다. 혼자 계획을 세운대로 움직여야 마음 편하다. 책을 읽거나 글이라도 써야 마음이 평화롭다. 정신없이 살아가는 블로거 리쌤이 결국 나다.
그렇다면 이른 명퇴가 독이 될 수도 있겠다. 여유있게 시간을 누리는 것이 좋은 사람은 명퇴를 하고 놀멍쉬멍 지내는 것이 좋겠지만, 나는 해당되지 않을 것 같다. 바쁘려면 건강해야 한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 바쁠 수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니 일과 취미, 놀이와 관계를 병행하려면 우울할 틈이 있어서는 안된다. 힘들어서 퇴직하는 순간을 늦추려면 일도, 스트레스도 부드럽게 감당해야 하므로 체력도 심력도 잘 길러야 한다. 건강관리를 잘 해두어야 한다.
남편도 자식도 없어서 자신만 신경쓰면 되는데, 우울증 때문에 힘들었다는 언니 집에 놀러갔다.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며칠 출근을 못했다는 언니는 이제 다 나았는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먹거리를 내어 주었다. 웃으면서 그랬다.
"아무것도 신경쓸 게 없는데 아프더라고.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우울했던 것 같아."
우울증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잘 나가는 남편에 성공한 자식이 있는 사람도 우울증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큼 잘 살아가는 사람도 우울증이 있다고 한다. 성공한 사람들,연예인의 우울증만 봐도 맞는 이야기다. 모를 때는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막상 우울증이 생기니 무기력해서 무척 힘들었다는 언니말로는 주변에 생각보다 우울증이 아주 많단다.
어쩌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탐색보다, 같은 또래인 언니들에게서 우울의 징조가 전해질 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아니 그보다는 겁이 나서 미리 '나만의 맞춤형 우울증 예방법'을 살펴보는 중인가 보다. 닥치고 나서 힘들어하기 보다 미리 예방을 해두는 것이 내 성격이기도 하니까. 내 또래가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사건들을 미리 준비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바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하다. 건강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아서, 에너지가 강하지는 않지만 활동적이라서 아낌없이 쓴다. 닥쳐서 하기 보단 미리 예상하고 움직이려 한다. 좋아하는 일에 한정해서지만 계획 세우기를 좋아한다. 꼼꼼하지는 못해서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큰 틀을 생각하고 움직인다. 꼬인 구석이 없어서 사람에 대한 감정 갈등이 적은 편이다. 섬세하거나 민감하지 않다.
나를 탐색하고 내린 결론이란 바로. 체력이 허락하는 한 일을 해야하는 팔자인가보다.
우울해서 힘들었다는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책임에서 벗어나 단촐해진 인생을 고려하여 내린 결론이 이거라니! 믿고 싶지 않지만, 어쩌랴.
결론을 생각하며 과정을 떠올렸다. 어떤 태도여야 할지를 고민했다. 나이들며 확연하게 깨달아 가는 것은 "중용의 중요성"이다.
일을 오래 하려면,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몸의 균형을 잃지 않으며 스트레스 관리를 하며 느슨하게 일하는 것이 좋다. 기대한만큼 실망하듯이, 열정을 불사르면 어느 순간 허망하다. 일에 나를 갈아 넣은 사람들의 결말이 모두 행복은 아니었던 기억이다. 자식을 잘 키우려면, 사소한 일에 간섭하기 보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며 마음으로 믿어주어야 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대체로 그러하다. 감정만큼 밀착하고 애착하면 오히려 건강하지 않다. 감정의 밀당은 타인의 관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건강을 위해 마음 환기를 잘 하는 용도로 써야 한다. 몸도 건강하게 늙으려면 무리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챙겨야 한다. 과한 의지와 열정이 중독을 만들어 내기도 하니 모든 일에는 '적당히'가 필요하다.
적당히 먹고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운동하고
적당히 놀고
적당히 자고.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기대하고
적당히 내려놓고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조절하며 살아야 몸과 마음에 병이 찾아와도 적당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