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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단 한 번의 삶
꽃구경보다 책구경이 끌려서 서점에 오니, 소문대로 김영하작가의 신간 에세이가 있다. 분량이 많지 않아 온 김에 다 읽고 가도 되겠다 싶어서, 앉은자리에서 후딱 읽었다. 묵직한 소설이 아닌, 작가의 삶이 담긴 에세이는 쓰기는 어려웠을 텐데 읽기는 쉽다. 68년생으로 86학번인 김영하 작가는 나보다는 앞선 세대가 맞지만 '폭삭속았수다'의 금명이를 내 세대라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시대인'으로 여겨서 그런지 우리들의 이야기, 혹은 '우리 또래가 인생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어떤 지점'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김영하 작가의 팬으로서 오래전에 읽었던 작품들은 김영하를 증명하는 작가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소설을 전공하지 않았는데 이른 나이에 뜬 이유를 알 것 같은 남다른 감각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좋아했다.'검은 꽃'에서 발견했던 놀라움은 '살인자의 기억법'까지 이어졌고, 알쓸신잡에 패널로 나오는 그는 소설의 이미지만큼이나 괜찮아 보였다. 앞뒤가 다르지 않은 진솔한 사람이란 생각에 팬심을 가지고 활동을 지켜보기도 했다.
지난번 소설 '작별인사' 에서부터 내가 알아왔던 김영하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이번 에세이를 읽은 후에 작가로부터 받은 느낌은 ' 작가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무난해졌구나'였다. 읽으면 알아볼 것 같은 그만의 개성이 에세이에서 흔히 느끼는 보편화된 감정으로 원만해 보였다. 그의 문장대로 그는 달라진 것 같다. 그가 달라졌다기 보단, 살아온 경험치가 비슷해지며 사고의 틀이 우리와 유사해진 것 같다. 상상이 아닌 현실의 삶은 작가건, 보통사람이건 대체로 비슷한가 보다. '여행의 이유'를 읽으면서 느꼈던 편안함이 '단 한 번의 삶'에서 한 번 더 평범해졌다는 인상은 누구나 살아가는 삶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것도 같았다. 누구나 단 한 번만 사는 것처럼.
부모로부터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가장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상처받고 이해받지 못해서 서운하다가도, 마음 쓸 수밖에 없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김영하 작가도 똑같이 겪었음을 알았다. 그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자각이 반가웠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지나고 보면 예전의 나와는 다른 나를 발견하면서 평생 탐험해야 하는 존재는 타인이 아닌 '나'라는 사실을 자주 인정하게 된다. 작가도 같았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는 사실을 적절한 예시와 유려한 문장으로 설명해 주어서 깊이 공감하며 읽었다. 특히 소설가는 집중력이 무척 좋아서 하루 종일 글만 쓰는 줄 알았는데, 산만해서 이 일 하다, 저 일 하다가 일을 바꾸어한다는 부분에서는 위로도 받았다. 집중력이 부족하고 끈기가 없어서 뭐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내가 가소로웠는데,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 평가하는가 보다.
그래서 더 쉽게 읽었나 보다. 훌륭한 작가라서 범접하기 어렵다고 여겼는데, 드러난 삶의 속살이 나와 비슷한 부분도 있어서 '그도 평범한 면모가 있구나.'라는 인상이 원만하고 무난한 책이라는 느낌을 준 것도 같다.
삶이 그렇지
과한 부분도 있고, 부족한 부분도 있으며 잘난 부분도 있지만 모자란 부분도 있는 것. 그 삶이란 게 단 한 번만 주어지니, 어쨌든 잘 살아야 하지 않겠나....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며 단 시간에 떠오른 느낌이 그랬다. '잘 산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흔히 최선을 다하는 것인지, 성실한 것인지, 아니면 행복의 의미를 주관적으로 부여해서 행복하려고 애쓰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작가의 책 제목처럼 삶은 단 한 번뿐이니 어쨌든 잘 살긴 해야 할 것 같다. 작가도 앞으로의 삶을 더 잘 살고 싶어서 과거를 다시 들여보는 작업을 섬세하게 했을 것이다.
테세우스의 배
처럼 내부의 재료들이 달라져도 테세우스의 배로 인식하듯이, 나의 세포들이 바뀌고 내 생각이 달라져도 나는 나이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미래의 나는 다르지만 같은 존재다. 단 한 번뿐인 미래를 위해 현재를 직시하고 과거를 반추하는 작업은 누구에게나 필요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무난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예리한 칼이 될 수도 있겠다.
김영하 작가가 살아온 인생, 삶의 의미를 문장으로 만나보자.
어떤 아이도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사소한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기억하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이해하면서도 아쉬워한다. 그렇지만 그게 부모를 증오하거나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도 않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실망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실망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대도 함께 돈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탭도 작다.
어려서부터 생활기록부에는 집중력이 없다, 주의가 산만하다는 평이 빠지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하루동안 하는 활동을 빠짐없이 적어본 적이 있었는데 서른 가지가 넘었다. 소설을 쓰다가, 책을 읽다가, 머핀을 굽다가, 커피를 내리다가, 뉴스를 보다가, 잡초를 뽑다가, 요리를 하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새해에 세운 그 거창한 계획들을 완수하기에 열두 달은 너무 짧다. 그러나 십 년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띄엄띄엄해나가면 어느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십 년이 여럿 쌓였다. 할 줄 아는 것만 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도 변했다.
기준은 비행기를 탔을 때 제공되는 공짜 술을 거절할 수 있느냐다. "와인 한 잔 하시겠습니까?"라는 승무원의 질문에 "아니요"라고 말했을 때 내면에서 차오르는 힘을 느꼈고 테스트를 통과한 기분이었다. 술이라는 숨은 조종자는 내 안에서 힘을 잃었다.
좋아하는 작가도, 자주 듣는 음악도, 즐겨 먹는 음식도 모두 달라졌다. 새벽까지 깨어 있는 저녁형 인간이었는데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나는 이십 대의 내가 만났다면 재수 없어했을 사람으로 변한 것 같다.
테세우스의 배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 17의 원작 미키 7의 주요 논제가 테세우스의 배이기도 했다. 복제되는 인간은 다른 존재인가, 같은 존재인가. 봉준호 감독은 원작과 다른 결말을 내린 것 같지만 말이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흔히들 하지만 사람은 평생 많이 변한다. 노력으로 달라지기도 하고 환경에 적응하기도 한다. 생물학적 수준에서는 인간의 몸이란 테세우스의 배와 마찬가지다. 세포들이 끊임없이 죽고 다시 생성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세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행동도, 마음도, 습관도, 조금씩 달라지다가 그 변화가 누적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되어 버린다. 인간은 평생에 걸쳐 테세우스의 배보다 더 큰 변화를 겪는다.
엄마가 너무나 자신 있게 한 말이 그렇게 많이 틀렸다는 것에 아내는 놀라곤 했다. 그러면서도 아내가 엄마의 말에 매번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그 '앎'의 정확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부모에게 부여한 앎의 권력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엄마는 자식을 정말로 잘 알았던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력', 즉 다른 사람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 힘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한병철은 '모든 고통스러운 상태가 회피되'는 '고통공포'로 진단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랑의 고통조차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아마도 고통 없는 삶을 일종의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처럼 생각하는 지구상 첫 번째 세대에 속할 것이다. 고통은 스캔들이다.
한병철에게 긍정심리학은 진통제이며 마취제이다. 오늘날 고통 경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고통이 무의마한 것으로 자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은 무의미하지 않다. 모든 진실은 고통스럽고, 고통은 결속이자 자아의 윤곽을 드려내며 고통은 현실이다. 이 현실의 반대편에는 '좋아요'가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악마와 함께 춤을 이란 책을 더 잘 읽어야겠단 생각이 든다.)
후회 없는 삶은 없고 덜 후회스러운 삶이 있을 뿐. -김중식-
언제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라는 질문에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무용의 용을 주창하는 장자가 있다. 장자는 쓸모 있는 나무는 그 쓸모 때문에 일찍 벌목이 되므로, 쓸모가 오히려 제 몸에 해를 입힌다고 말했다.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자르지 않는 나무꾼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잘라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나무라 자르지 않았다는 나무꾼의 말에 장자는, 이 나무는 쓸모가 없어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고 제자에게 설명하기도 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도 아니다. 살아남은 자는 그냥 살아남은 자이고, 그 이유와 방법에도 어쩌면 자신만 알거나 아니면 자기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지만 그들이 인생이라는 게임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와 있는지 속속들이 알 도리가 없다.
도덕성이라는 것이 일종의 운에 좌우된다는 것을 논증한다. 이른바 '도덕적 운'이다. 이들은 도덕적 평가는 운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과 무관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반박한다. 거칠게 말해 1930년대 독일에 살게 된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치의 악행을 방관하거나 그에 가담하게 되는데, 이는 도덕이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다른 사람에게 베풀게 많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고귀한 행위를 자주 한다.
행복은 완전한 삶을 통해 덕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인데, 덕을 갖춘 사람이 되려면 올바른 양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커피는 그렇다 치고, 사람의 좋은 성질은 처음에 우러날까, 아니면 최후에 우러날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물의 참된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믿었고 그 믿음에 따라 그리스 비극을 만들었다. 그들이 믿었던 것처럼, 상황이 좋을 때, 우리는 모든 좋은 사람이다. 상황이 나쁠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문제다. 모든 이야기는 거기에 집중한다.
첫인상이 전부가 아니며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최선과 최악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셀카가 남이 찍은 사진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가장 괜찮게 보이는 각도로 찍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꾸 말하다 보면 가장 먼저 자기가 속는다. 최선의 면이든 최악의 면이든 모두 내 안에서 나온 것이다. 나 역시 적당한 온도와 시간에서 최선일 것이고, 반대의 조건에서 최악일 것이다.
좋은 작가의 좋은 책. 좋은 책은 어렵지 않아서 쉽게 읽히는 것도 같다.
팬심으로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