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은중과 상연-
드라마 처음 오프닝에 등장하는 예쁜 스티커에는 은중이 상연이네 갔을 때 붙여놓은 스티커의 문구로 시작한다.
'너는 참 좋겠다'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가 '너는 참 좋겠다'에 관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했다. '너는 참 좋겠다'가 비교에서 출발했지만 부러움에서 끝나는 누군가, 그래서 나를 버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줄 아는 사람과 부러움을 넘어 질투가 집착이 되는 누군가, 그래서 나를 버리고 중심을 잃어버리는 사람의 차이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드라마라 생각했다. 여기에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은 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유 배달하는 엄마를 도우며 성장한 은중은 자신이 가난한 줄도 몰랐다고 했다. 반지하에 살기에 화장실이 2개인 아파트를 처음 보고 부럽기만 했다. 아파트의 주인공인 상연은 모든 것을 다 가져서 넘사벽이었지만, 그런 상연이 좋아서 친구가 되었다.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은중은 상연이 좋았다.
상연은 늘 2위였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이 그랬다. 엄마는 상연보다 오빠를 더 좋아했고, 딸보다 친구인 은중을 더 아꼈다. 한 번도 1등인 적이 없었다. 그보단 가장 소중한 존재인 적이 없었다. 오빠가 유언처럼 남긴 카메라를 여동생인 자신이 아니라 친구 은중에게 준 건 상처였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란 생각을 품고 살았다. 그래서일까. 늘 계산이 정확했고 힘들어도 기대지 않았다. 저 혼자 세상을 살아내느라 애쓰는 중에도 상연은 은중이 좋았다. 친구는 오직 은중밖에 없었다.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면서도 그만큼 미워하게 되는 두 사람 사이를 상연과 은중만큼 촘촘한 밀도와 탄탄한 설정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싶은 잘 만들어진 드라마이다. 음식만 맛있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팅도 멋진 고급요리처럼. 유명한 호텔 메뉴처럼 기대한 만큼, 예상한 만큼, 비싸서 맛있을 수밖에 없는 요리가 아니라 여행지에서 우연히 먹은 음식이 '인생 메뉴'가 되어버린 경험과 비슷하다.
남들과 다른 정체성을 사랑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받지 못해서 존재를 지워버린 상연의 오빠 상학의 죽음이 초반의 스토리를 관통한 후, 이름이 같은 동아리 선배 김상학의 등장으로 중반부에서 후반부까지 찰지게 재미있어서 오랜만에 몰아보기가 가능한 드라마였다.
드라마의 모든 캐릭터는 사랑스러웠다. 예쁘고 발랄해서가 아니라 내면에 지닌 이중성이 안쓰럽고 애틋해서 그랬다.
은중의 옆반 선생님이자, 상연의 엄마인 윤현숙 선생님은 일찍 아빠가 돌아가셔서 겪어야 했던 경험을 은중에게 나누어주며 아이를 변화시킨 훌륭한 교사였지만, 막상 딸인 상연이 느끼기에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 상연은 엄마가 오빠의 죽음 이후, 딸을 위해서라도 정신 차리고 살기를 바랐지만, 엄마는 스스로를 놓아 버렸다.
현실 궤도에서 스스로 이탈한 상연은 김상학을 알게 되면서 용기 내어 세상으로 돌아왔지만, 상연의 뜻대로는 다르게 흘렀다. 상연은 살아온 삶의 궤적만큼이나 내부 온도가 다른 사람이다. 누가 봐도 예쁘고 똑똑해서 부잣집 막내딸로 보이지만, 오빠의 죽음 이후 산산조각 난 가정처럼 내면은 깨어진 유리 조각 같다.
친구인척 하면서 주인공의 행복을 방해하는 캐릭터 같아 밉살스러울 때도 있지만, 상연을 미워할 수 없다. 결핍을 이해하거나 동조해서가 아니다. 모호한 말이지만 착한 사람이라서 그렇다. 은중의 관점에서 나쁜 년이건 맞는데, 은중처럼 상연을 미워할 수 없다. 은중도 상연이 착한 걸 알고 있다. '"네가 얼마나 빛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면 스스로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은중의 말은 진심을 넘어 진실이다. 그녀들의 남자인 상학도, 상연의 엄마 윤현숙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그저 애틋하다. 살아온 모든 존재들처럼.
한 번쯤 있을법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완벽하게 감정 이입이 되어 슬픔을 주체할 수 없는 장면이 꼭 하나쯤 가슴에 남을 것이다. 가장 친한 사람, 혹은 가장 믿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다면, 내 이야기 같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것이다. 지금도 진행 중인 감정일 수도 있다. 사랑하지만 밉기도 하고, 얄밉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있거나 신경 쓰이는 누군가, 싫다고 생각하지만 미운 존재가 내 옆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감정이란 낮보다 밤을 닮아서 다 보이지 않는다. 명확하지 않아서 설명하기 어렵다. 모호해서 알아차리기 힘들고, 알고 난 후에도 정답인지 알 수 없다. 일어난 사건은 사실이라서 사건에 깃든 감정도 선명해야 할 텐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게 사람 마음이다. 나는 그랬다. 은중과 상연의 이중성이 이해되는 걸 넘어 사랑스러웠다. 착한 사람들의 최선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 차이일까.
은중은 상학의 표현처럼 중심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지켰지만, 상연은 스스로를 내던지곤 했다. 지킨 자와 버린 자의 사랑은 온도가 달랐다. 상연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상학이 상연에게 편지를 보낼까 봐 매일 달리기를 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은중의 선택에선 자신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은중의 영화 기획을 빼앗은 상연에게선 시기와 질투, 성공의 욕망보다 체념과 포기가 전해졌다. 서로 다른 선택에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어려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스쳤다.
은중과 상연은 다르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상연과 은중이라서 좋았다. 은중에게 상연이 있고, 상연에게 은중이 있어서 좋았다. 은중에게 상학이 아니라서 더 좋았다.
이제 드라마는 남주와 여주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여주와 여주의 구도. 그녀들이 사랑하는 남자는 조연일 뿐이다. 남녀의 사랑 구도가 많은 지분을 차지하긴 했지만, 큰 주제에서는 벗어났다. 여주와 여주 사이가 훨씬 촘촘했다. '은중과 상연'은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는 삼각구도에서도 탈피했다. 신선한 낯섦이 마음에 들었다.
안락사에 대해 생각해 봤다.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내 몸이 감옥이 되고 고통이 될 때, 삶의 끝을 내가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 알고 태어난 것도 아닌데 죽음마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잔인하다. 건강하게 늙어서 편안하게 죽을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지만 상연처럼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숨조차 쉬기 어렵다면, 죽음에 대한 선택을 본인에게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스위스까지 날아가지 않으면 좋겠다. 그 선택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픔이 아니라면 괜찮지 않을까. 상연의 선택이 은중에서 슬픔과 아픔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