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노동 인권
영화 3학년 2학기
서울교사노조 연수가 있다며 같이 신청하자는 언니 말에, 신청을 해두고 보니 22일 수요일이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다 보니 퇴근해서 집안일하고, 강아지랑 산책하고 운동하면 금방 가는 일상조차 벅차서 가는 길이 피곤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근했다가 인근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다시 서울로 나가는 일이 점점 고되게 느껴진다. 서울특별시민은 모르는 경기도민의 슬픔이란^^;;
도착해서 언니들과 간단한 간식과 차를 마셨더니 피로가 풀렸지만, 언니들은 내가 졸거라 예상했다. 언니들과 뮤지컬을 보면서도 졸고, 강의를 들으면서도 졸았으니까. 졸았는데도 왜 네가 더 많은 걸 알고 기억하냐며 웃은 날이 자주 있었다. 나도 내가 그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노동인권전문관의 강의 시간에는 졸았다. 꼭 필요한 강의지만 영화 전에 30분 동안 빠르게 진행되어기
서울교사노조 연수가 있다며 같이 신청하자는 언니 말에, 신청을 해두고 보니 22일 수요일이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다 보니 퇴근해서 집안일하고, 강아지랑 산책하고 운동하면 금방 가는 일상조차 벅차서 가는 길이 피곤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근했다가 인근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다시 서울로 나가는 일이 점점 고되게 느껴진다. 서울특별시민은 모르는 경기도민의 슬픔이란^^;;
도착해서 언니들과 간단한 간식과 차를 마셨더니 피로가 풀렸지만, 언니들은 내가 졸거라 예상했다. 언니들과 뮤지컬을 보면서도 졸고, 강의를 들으면서도 졸았으니까. 졸았는데도 왜 네가 더 많은 걸 알고 기억하냐며 웃은 날이 자주 있었다. 나도 내가 그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노동인권전문관의 강의 시간에는 졸았다. 꼭 필요한 강의지만 영화 전에 30분 동안 빠르게 진행되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장가 같은 설명을 들으며 졸아서 그랬을까? 개운해진 컨디션으로 영화를 관람했다.
참 좋은 영화다.
초등학생들과 지내다 보니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해야 하는 특성화고 아이들의 삶에 대해 전혀 몰랐다. 실습을 핑계로 야근을 강요하며 최저 시급도 안 되는 수당을 준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강 건너 남의 일이었다. 내 아이가 대학을 가고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을 때, '근로계약서'는 쓰고 일하냐고 물은 정도가 최선이었다. 언젠가 실습생이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사망한 사건을 들었을 때 마음이 아픈 정도였고 그나마도 잊었다. 대한민국 부모들의 평균이라 우기고 싶은 '대학 입시'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세상을 모르는 청춘들이 사회에 발붙이는 과정이 얼마나 가혹한지 살피지 않고 살아왔다.
영화를 본다고 해서 갑자기 태도가 않겠으나, 청소년 노동 실태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단 생각을 강하게 심어준 영화다. 영화는 잔잔했다. 노동 실태에 대한 고발성 다큐와는 달랐다. 화려한 외모의 배우가 아닌, 평범해 보이는 배우들은 우리 같았다. 고스란히 우리 모습이었다. 무리하지 않으며 덤덤하게 전하는 이야기였음에도 자꾸 긴장했다. 용접을 하고, 철근을 잘라내는 공장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본 경험이 없어서 그랬나 보다. 아이가 다칠까 봐 몸에 힘이 들어갔다.
불꽃을 내며 기계가 돌아가고, 뼈조차 절단 할 것 같은 단단한 칼날이 아이의 여린 살을 가를 까봐 보는 내내 신경이 곤두섰다. 카메라의 시선도 영화처럼 덤덤했는데 관객들은 자꾸 탄성을 질렀다. 아이가 다칠까 봐 걱정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스토리는 예상한 대로 흐르면서도 거리를 두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주인공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다쳤지만 크게 다치지 않았고 사후 처리가 잔인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적당한 시기에 노무사가 등장해서 변화가 느껴졌으니까.
중1 때 아빠가 돌아가신 창우네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엄마와 삼 형제가 사는 방 두 칸의 빌라는 답답하다. 고2 동생과 함께 쓰는 방은 혼자 쓰기에도 좁아 보인다. 그런데 참 따듯하다. 엄마를 대신해서 막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씻기고 머리를 말려주는 큰 형 창우는 실습비를 받아 막내가 먹고 싶다는 허니콤보 치킨을 두 마리나 사 온다. 학원을 다니지 못해서 인강을 듣는 동생의 블루투스 이어폰이 고장 난 것을 알고 새로 사다 준다.
동생도 마찬가지다. 고된 노동에 엉망이 된 팔에 파스를 붙이고 곤히 잠든 형의 이불을 덮어준다. 어쩌면 다친 형의 팔이 보기 싫어서 가리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걱정할까 봐 다쳤다고 말하지 말라는 약속도 잘 지켜준다. 사느라 쪼들린 엄마는 전셋집을 옮기며 보증금이 올라서 창우에게 부담을 주지만, 중심을 잃지 않으며 밝게 생활한다. 좁은 집구석이지만 잘 들어오는 햇살처럼 따스한 가족이 있어서 창우에게 별일 없을 것 같아 안심이 된다.
힘든 노동 현실에 가정사까지 우울하면 힘이 빠질 텐데, 가족의 따듯한 울타리가 있어서 다행이다. 아빠 몫까지 해야 하는 엄마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애써 힘을 내는 창우의 선택은 기특하다. 반면, 일찍 철이 들어버려 웬만한 일은 참아내며 감당하는 창우의 무게가 아프기도 하다.
영화는 F와 T의 균형감을 잃지 않는다. 과하지 않으면서 보여줄 건 다 보여주고, 할 말은 다 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미세한 감성의 울림이 있다. 사람의 온도를 놓치지 않았고, 잔잔한 재미도 잘 버무렸다. 안쓰럽고 미안해서 눈물이 핑 돌다가도 청소년의 웃음에 따라 웃게 된다.
일하면서 전문대라도 가서 대학생이 되고 싶은 창우도, 실습생의 열악한 처우에 현실을 직시하고 박차고 나가는 창우의 친구도, 현실 때문에 참으며 중소기업에 뿌리내리는 실습생도,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원들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구멍은 있다. 역할의 최선이 오히려 부작용을 불러오고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을 보호해야 할 이유다. 약자에 대한 정책과 제도가 꼭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