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네 돈처럼 : 소설이 필요한 이유
홈파티를 읽었을 때, '내가 이미 읽은 소설집인가?' 했다. 분명 읽은 기억이 있었다. '숲 속 작은 집'을 읽으며 김애란의 새 소설임을 알았다. 홈파티는 여러 작가의 소설 모음집에서 미리 맛본 작품이었나 보다.
김애란을 좋아한다. 젊은 여성 작가들과는 살짝 다르다. 언젠가부터 페미니즘을 바탕으로 피어난 한국 여성 작가들의 소설이 비슷비슷해져서 기억에 남지 않는다. 생각해보지 못한 예리함은 좋았다. 그러나 '82년생 김지영'을 소화해 내기에 내가 낡아 있었다. 소외를 다루는 소설들 속에서 또 다른 '경험적 소외'를 발견해야 했다. 82년생 김지영만큼의 경험조차 우리 세대에겐 '정서적 사치'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내 편인데 뭘 더 바라지? 그 정도가 어디야?'라는 생각이 공감을 막았다. 소설가의 의도는 그렇지 않을 텐데, 내가 몸소 겪은 세상은 '그 정도 수준'도 안되었으니까.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 찌질하다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도 똑같아야 하는 건 저주다. '내가 시잡살이 했으니 너도 당해야 한다 '는 건 최악이다. '내가 헝그리 정신으로 살아왔으니 너희도.. '라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내가 겪은 저주를 반성 없이 물려주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각자의 삶에 반성이 있어야 변화하고 발전하듯 사회도 마찬가지다. 깨닫지 못하고 문제를 되풀이하는 인생은 최악. 내 삶은 내 몫이라 그렇다 쳐도 사회 구성원이자 어른으로 찌질하기는 싫다.
변화가 필요하므로 페미니즘 소설들이 가진 의미나 가치에 동의는 한다. 그래서 특히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응원해 왔다. 꼭 페미니즘 소설이나 여성 작가에 대한 응원만은 아니다. '보이나 보지 못하고, 들었으나 생각해보지 못해서 놓친 것들'이 한참 지나서야 미안해지는 사회라서, 나도 모르게 뻔뻔해지는 '무뎌짐'의 감각을 경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소설가만큼 예리하지 못해서 미처 알아채지 못해 놓고 '딴 소리'를 하거나 '남 탓'을 하는 어른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늘 소설을 읽게 만들었다. 공공장소에서 뻔뻔하게 행동하는 '꼰대 노인'은 남들은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른다. 그런 노인으로 늙고 싶지 않아서 보다 섬세한 인식과 통찰이 루틴처럼 필요했다. 글로 읽고 생각만 하는 생활이 변화까지 닿지는 못하더라도, 이 마저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김애란의 소설은 '안전 점검표' 같다. 죽비를 맞은 것처럼 확 깨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잊은 것은 없는지, 당연하게 지나친 것은 없는지 정기적으로 확인하게 만드는 '리스트'로 충분한 역할을 해 준다. 이번에도 그랬다. 모든 것을 수치화할 수 있어서 확실한 손익계산표가 익숙한 요즘이라 잊어버리기 쉬운 시선과 관점을 소환해 주었다.
'정서적 사치'를 경험해 보지 못해서 공감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쉽게 하면서 '겪어보지 못해서 알지 못하는 어려움'도 가볍게 여겼다. 이를 테면 '전세 사기' 같은.
태어나서 살아온 사회가 자본주의고, 철들자마자 과해진 신자유주의 시대를 마주 해와서일까. 생활 속속들이 깃든 '돈 계산법'이 익숙해서 사람 냄새보다 돈 냄새가 편해서일까. 자본주의 계산법으로 하지 말아야 할 영역도 같은 방식으로 어림해면서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잃어버리는 것도, 잊히는 것도 많아져 버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부나 나눔을 삶의 일부로 생각하고 살았는데, 기부 단체도 의심스럽단 생각에 잘하지 않게 된다. 세상 구석구석이 돈의 논리로 돌아가는 건 마찬가지라서 오히려 저들의 뻔뻔함에 속았다고 판단했다. 조금은 속아도 될 텐데, 자본주의 계산법으로는 멍청한 거니까.
사람 사이의 일도 그렇다. 모든 일에는 계산이 따른다. 사랑하는 만큼 돈의 힘을 보여주는 게 맞고, 소중하면 돈을 쓰는 게 옳다. '사랑'도 계산 가능한 영역이 되었다. 상대가 소중한 만큼 정확한 계산법이 따른다. 이만큼 소중하니까 이만큼 돈을 쓰고 있는 것.
'네 이웃을 네 돈과 같이'라는 신형철 교수님의 비평은 찰떡같다. 네 이웃뿐이랴. 알고 보면 가족도 연인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본주의 시스템의 기본은 이미 모든 '관계'를 점령했다. 한 다리 건넌 이웃 까지라면 그나마 다행 아닌가. 남녀 간에도, 사랑으로 한 가족을 이루는 결혼에도, 부모와 자식 간의 의리에도 돈은 빠지지 않는다. 우리 이미 속속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돈이 빠진 사랑을 사랑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소설은 자연스럽게 흐른다. 물이 흐르듯, 어쩌면 돈이 흐르듯.
돈이 자존심이 되고 교양이 되는 사회 (홈파티), 여행지 숙소에서 놓아두는 팁에서 조차 계산해야 하는 마음 (숲 속 작은 집), 삶을 부동산으로 증명하는 시대 (좋은 이웃, 빗방울처럼), 그런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상태 (레몬 케이크, 안녕이라 그랬어)를 소설가는 섬세하게 도닥인다.
'혹시 까먹은 건 아니야' 라며 툭툭 무심하게 치다가 '이런 생각은 안 해 봤을까? 그런 생각 안 들었니?' 알아차리게 만들고 '이런 건 필요하지 않을까?' 말을 건네듯 쓰다듬어 준다. 소설 '안녕이라 그랬어'의 다양한 안녕법 표현처럼 '안녕?' 인사를 하고 '안녕하니?' 묻고는 '안녕해야지' 응원해 준다.
김애란 작가가 필요한 이유다. 계산법에 치중해서 메말라 버려 안 보이던 시선이 덕분에 촉촉해졌다. 건조증으로 말라버린 눈에 인공눈물 한 방울 넣고 안심하는 순간처럼, 바삭 말라버린 심장에 소설이 녹아들었다. 처음엔 그랬다. '뭐 이렇게까지 세상을 예민하게 통찰해야 해?' 건조해질 대로 건조한 가슴은 소설을 밀어냈다.
시간이 필요했다. 잃어버린 눈물을 대신해 눈을 적셔주는 인공눈물처럼 습기가 돌 때까지.
명확하게 보기 위해선 촉촉해야 한다. 뻑뻑한 눈으로는 어렵다. 나이 들수록 말라가는 눈에 습기는 필수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은 필요한 순간에 알맞게 찾은, 잃어버린 눈물이었다. 마침, 자연스럽게 스몄다.
소설 읽다가 찍어보고 싶었던 책 한 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