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이제 지옥문이 열리겠습니다
일 년 중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장 바쁜 시즌이 되었다.
그 이름하여 연.말.연.시.
한해를 지나면서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때이기도 하지만,
일할 때도 바빴지만, 일을 안 해도 바쁜 날.
어느 가게를 가던 사람들이 미어터지기 바쁜 날.
올해 뭐 하나 제대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2025년이 되어 간다.
한국 스벅은 보통 12월을 즈음해서 크리스마스 메뉴가 나오는 거 같긴 하던데,
미국 스벅에서는 연말연시를 가장 실감하게 되는 날은 아마, 펌킨 스파이스 라테가 나오는 8월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 10월도 9월도 아닌 8월이다!
그마저도 한해 한해 어째 점점 론칭 시기가 빨라지는 것 같은 건 그냥 기분 탓이려나?
한정메뉴가 물론 연말을 겨냥해 나오는 건 아니라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시기적절한 때에 맞춰 신메뉴를 출시를 한다.
예를 들면, 버터스카치의 경우는 2월에 나오고 새 리프레셔나 프라푸치노의 경우엔 여름에 론칭을 많이 한다.
이렇게 계절감으로 메뉴를 론칭하는데, 펌킨 스파이스는 언제 메뉴냐 하면 바로……
추. 수. 감. 사. 절.
땡스 기빙데이를 겨냥해 나온 음료이다.
나는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다.
물론 케바케라고 펌킨 스파이스가 너어무! 좋아서 환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겠지.
한국 사람 중에서도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왜, 어째서!
8월에 론칭을 하느냐고!!
내가 사는 곳은 대략 12월까지 반팔 입고 다닐 수 있는 남부 쪽에 가깝다.
요즘엔 추운 날도 꽤 되어서 코트도 꺼내 입긴 하지만 8월이라면 진짜 땡볕 쨍쨍 내려쬐는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곳이란 말이다.
그런데, 펌킨 스파이스.
사실 저거 집에서도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메뉴인데,
사람들, 특히 미국의 백인 애들은 아주 환장을 한다.
사진 찍은 것이 없어서 재료는 다 기억 안 나지만, 대충 호박 퓌레맛에 시나몬, 넛맥, 카다멈의 향이 섞인 달달한 연유맛이다.
음? 뭔가 이상하다고?
맞다. 연유맛이다.
호박맛이 아닌 향신료 섞인 연유맛.
재료에도 쓰여 있다. condensed milk라고.
한마디로 연유에 색 넣고 향신료향 나는 음료로 사람들은 아! 이제 가을이 왔구나! 하고 환장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벅 매장들은 이날을 경계로 1월까지 공습경보가 시작된다.
코비드 이전에는 그래도 연말 전에 미리미리 인원 보충이 조금이라도 들어왔다면 이후에는 그런 거 짤 없었다.
정말, 최소한의 인원으로 연말연초까지 너덜너덜한 전투를 치르는 최전방의 군인이 되어야만 했다.
사이렌 오더가 시작된 이후에는 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다 이제는 딜리버리 서비스까지 시작되었네?
특히 cs파트가 하는 일을 설명하자면,
1. 프런트에서 오더 받기
2. 오븐이나 베이커리 메뉴 데우고 봉투에 담아주기
(그나마 오더 스티커 나오고 편해졌고, 정말 바쁜 아침 7시에서 9시 사이에는 오븐 담당을 따로 배정한다)
3. 사이렌 오더 나오면 픽업 플레이스에 메뉴 가져다 놓기
4. 딜리버리 나오면 가방에 포장해 놓기
5. 바에서 우유나 재료, 컵 같은 것 떨어지지 않게 채워 넣기
6. 얼음 채우고 쓰레기통 비우기
……대체 몇 인분 일을 하라는 거야?
그런데 펌킨 스파이스를 시작으로 홀리데이 시즌에 돌입한다?
진짜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에 30분마다 절로 욕 나온다.
그나마 저건 드라이브 스루 매장이 없는 매장의 경우지만 드라이브 스루가 있으면 그쪽 오더를 받아줘야 할 때도 있다.
펌킨 스파이스가 나오고 이제 본격적인 연말 시즌에 돌입하면 매일 각개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보통 크리스마스 시즌의 메뉴가 추수감사절 전후에 론칭이 되었는데, 얼마 전 보니까 10월 말에 론칭을 하더라고.
그나마 펌킨은 메뉴가 그것만 있으니 다행이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은 그에 맞춰 엄청난 수의 리미티드 메뉴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캐러멜 브륄레, 체슈넛 프랄린, 슈가쿠키, 진저브레드, 애플크리스피(이건 땡스기빙이네)
상시 있는 페페민트 모카나 페퍼민트 화이트 모카….
이 모든 시럽들이 바 옆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항상 홀리데이 메뉴 론칭할 때면 가게는 대청소 모드로 돌입해서 어떻게든 좁은 공간에 저 시럽들을 올려놓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만 했다.
그리고 오래전에 오픈한 매장들은 진짜 두 사람이 번갈아 지나가야 할 정도로 협소한 곳들이 많아서 저 시럽들이나 새로운 기기들 올려놓을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빡빡한 매장인데,
연말이 되면 선물하겠다고(그리고 때를 맞춰 시즌 한정 상품인 컵이나 각종 굿즈들) 안 오던 사람들까지 모여 밀려드니,
응. 연말연시 시즌은 그냥 죽은 거다.
음료만 주문하는 것도 아닌 크리스마스까지는 사업하시는 사람들도 몰려와서 기프트 카드를 10장에서 많게는 100장도 사가시는 손님을 보기도 하였다.
요령만 알면 어려운 건 아니지만, 이걸 모르는 새내기들에겐 카오스 그 자체라 이거 꼬이게 되면 그동안 결제되었던 거 다 취소시키거나 영수증 뽑아서 카드 번호 일일이 대조해 보던가 헬게이트 열린다.
더불어 뭐가 뭔지 정신없이 지나는 동안 앞에서는 보이지 않겠지만,
뒷 공간은 정말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설거지는 산 같이 쌓여 있지,
바닥에 휘핑크림과 각종 우유, 부스러기, 설탕, 시럽들은 쩍쩍 달라붙어 있지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어서 우유 가져다 날라야지(말이 우유지 2갤런짜리 2개씩도 아니고 한 번에 4개씩은 옮기지 않으면 욕먹는다)
틈틈이 베이커리 아이템 냉동실에서 꺼내야 하지.
cs만 힘든 게 아니라 사실 바도 정신없긴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손님들이 바 앞에서 자신의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쉴 새 없이 오더 쏟아내는 스티커 앞에서 한 번에 두세 개 음료는 한 번에 제조해야 하는 바 파트너들 역시,
소원은 하나다.
저 스티커 좀 그만 뱉어내게 해 주세요!!
정말 이 시기만 되면 끊임없이 토해내고 토해낸다.
음료 만들면서 다음 할 거 생각하고
앞에서 손님들은 자기 거 빨리 달라 재촉하고,
이거 내가 주문한 거랑 다르다고 다시 만들어달라 항의하고……
그럴 때마다 주문 순서 밀리고 꼬이고.
콜드바는 특성상 블렌더를 써야 하는데,
넣고 갈고 담으면 끝일 거 같지?
아니다.
넣고 갈고 담고 휩 올리고 블렌더 씻고 실린더 씻고 쉐이킹 하고….
여기도 정신없긴 마찬가지.
잘못해서 뚜껑이라도 제대로 안 닫았다?
대참사 일어난다.
온 카운터 위에 흥건하게 젖어들어가는 음료를 보며 있는 수건 다 꺼내다가 닦아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음료는 다시 만들어야 한다.
정말 끊임없이 움직여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제일 좋았던 걸 꼽으라면,
시간 정말, 잘 간다.
그거 하나?
아, 그리고 팁이 쏟아지는 시기기도 해서 꽤 짭짤하기도 한 시즌이긴 하다.
딱 고거.
그래서 난 항상 이 시즌만 되면 꾸역꾸역 40분 운전하고 집에 돌아오면 정말, 밥이고 뭐고 그대로 허물 벗고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딸이 돌아올 때까지 잔다.
자고 또 잔다.
안 그러면 체력이 버텨내질 못하니깐.
그래서 뭐냐고?
1월까지 스벅은 말 그대로 지옥문이 훤히 열려 있는 시즌이라는 거지.
한마디로 아침에 좀비처럼 출근해서 퇴근할 때쯤이면 하얗게 불타올라 재만 남고 바람에 스러지는 나날인 계절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 일하고 있는 파트너들에게 묵념을 보내며,
나는 아듀!
난 그 헬게이트에서 살아남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