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이 토막나 저자에 전시된 양설부
간신들의 최후 2 - 기록에 남은 최초의 탐관오리 간신 양설부의 최후
춘추시대 대국 진나라의 명문가 서자로 태어난 양설부는 말 그대로 탐욕의 화신이었다. 집안의 후광을 업고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로부터도 뇌물을 서슴없이 챙겼으며, 뇌물의 정도에 따라 법도 무시했다.
한번은 양설부가 두 형제의 소송을 처리하게 된 것이다. 형 옹자는 양설부의 성격을 파악하여 잽싸게 딸과 뇌물을 바치며 결탁했다. 양설부는 불문곡직(不問曲直) 옹자 편을 들었다. 허망하게 땅을 빼앗긴 형후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해 동생 옹자를 죽이고, 내친 김에 양설부까지 죽여 버렸다. 탐욕의 화신 간신 양설부는 이렇게 어이없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양설부의 최후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양설부가 죽자 그 때까지 그가 저지른 간행이 속속 드러났다. 이로써 사건이 더 복잡해졌다. 진나라의 실권자 한선자는 양설부의 형인 양설힐을 불러 어떻게 사건을 처리했으면 좋겠냐고 의견을 물었다. 양설힐은 이런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 세 사람은 모두 당연히 죽을죄에 해당합니다. 형을 죽인 형후는 사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두 사람은 그 시신을 다시 잘라 저자거리에 내걸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양설부와 옹자의 시신은 토막이 나서 저자거리에 전시되었다.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본격적인 탐관형 간신 양설부는 이렇게 죽어 시신이 토막 나고 나아가 저자거리에 내걸리는 치욕스러운 두 번의 최후를 맞이했다. 무엇보다 시신을 파헤쳐 토막내어 백성들에게 전시하도록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 다름 아닌 형인 양설힐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만드는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역사 기록은 이런 양설부의 간행을 ‘탐묵(貪墨)’이란 두 글자로 평가했다. ‘탐묵’이란 훗날 탐관에 대한 형벌의 하나이자 탐관오리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가 되었다. 최초의 탐관형 간신 양설부가 이 죄목으로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훗날 공자(孔子)는 이 사건을 두고 한선자의 일처리를 칭찬하는 한편 “양설부는 ‘뇌물이면 뇌물’, ‘속임수면 속임수’, ‘탐욕이면 탐욕’ 이 ‘삼악(三惡)’을 한 몸에 지닌 자로 죽음으로도 모자란다”고 평가했다. 이런 점에서 양설부는 공소시효 없는 역사법정의 기둥에 못 박힌 최초의 탐관오리이자 간신이기도 했다. 역사의 경고와 경계가 이처럼 냉혹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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