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왕조 열 명의 황제를 섬기다

세 명의 ‘오뚜기’

by 김영수

네 왕조 열 명의 황제를 섬기다

세 명의 ‘불도옹(不倒翁)’


우리 인체 기관은 대부분 두 개가 한 짝이다. 하지만 입은 하나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입조심에 관한 격언이나 속담이 많았다. ‘구화지문(口禍之門)’은 바로 입조심을 강조한 성어로서 ‘입은 재앙이 들어오는 문’이란 뜻이다. 즉, 재앙이 입으로부터 나오고 입으로부터 들어가기 때문에 입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이 성어의 출전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설시(舌詩)>라는 시이다. 이 시는 풍도(馮道, 882~954)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입은 곧 재앙의 문이요, 혀는 곧 몸을 자르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처신하는 곳마다 몸이 편하다.


풍도는 오대(五代) 시기의 관리로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에 이르기까지 열 명의 군주를 섬기며 20여 년 동안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이 때문에 ‘불도옹(不倒翁, 오뚜기)’, ‘장락로(長樂老)’ 등과 같은 별명이 따랐다. 풍도는 무려 네 왕조 10명(또는 11명)이 제왕을 모셨지만 그때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벼슬자리를 지켰다. 그 비결에 대해 역대로 많은 논평들이 따랐는데,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풍도에 대해서는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歐陽修)가 편찬을 주도한 《신오대사》 ‘풍도열전’의 기록이 기본적인 자료인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렇게 전해 온다. 예의염치는 나라의 네 가지 큰 기틀이라고. 이 네 가지에 힘을 쓰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이다. 좋구나! 관생이 말 한 번 잘 했다! 예의란 사람을 다스리는 큰 법이고, 염치란 사람을 세우는 큰 마디다. 청렴하지 않으면 못 가지는 것이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면 못하는 짓이 없다. 사람이 이와 같으면 어디에서든 화를 부르고 패망한다. 하물며 대신이 되어 못 가지는 것이 없고 못 하는 짓이 없다면 천하는 큰 난리에 빠지고 국가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풍도의 《장락노서(長樂老敍)》를 읽어보니 그 스스로 영광스럽게 말하고 있으나 이야말로 염치없는 자라 할 것이니 천하와 국가가 이로써 알 만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문장가 구양수가 사서에서 풍도를 염치없는 자라는 평가를 내리고, 고위 공직자가 염치가 없으니 천하와 국가는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오대 시기의 대 혼란의 책임을 주로 풍도에게 지우고 있다. 그런데 구양수는 같은 역사서에서 풍도에 대해 위와는 전혀 다른 기록을 함께 남기고 있다.


“풍도란 사람은 스스로 뼈를 깎듯이 근검절약했다. 진과 양이 황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을 때 풍도는 군영에 있었는데 풀로 엮은 막사에 침상도 놓지 않고 짚더미 위에서 그냥 잤다. 또 자신의 녹봉을 모두 털어 부하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었다. 마음이 이처럼 편안했다. 장수들이 미녀를 약탈해서 그에게 보내자 풍도는 이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 별실에 두었다가 그 집을 찾아 돌려보냈다. 부친상을 당해 경성(景城)에 있을 때 가뭄이 들었는데 가진 것을 모두 마을에 내놓았으며 들에서 직접 밭 갈고 몸소 나무를 졌다. 땅이 황폐해져 농사를 짓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밤에 찾아가 몰래 일을 해주기도 했다. 그 사람이 알고 나중에 인사를 하자 풍도는 별 것 아니라며 겸손해 했다. 상이 끝나자 다시 한림학사로 불려왔다.”


한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단히 예민한 문제다. 풍도는 왕조체제의 관리였다. 여러 왕조가 교체되는 상황이 그의 잘못은 결코 아니다. 이 와중에 관리의 처신은 대단히 어렵다. 모든 것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면 냉혹한 역사의 평가에서 비켜나겠지만 적어도 백성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처신은 도피에 가깝다. 풍도는 자신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정권을 인수하고 넘기는 다리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백성들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는 약 30년 동안 늘 이 역할을 강요받았고 이 때문에 ‘항복 전문가’가 다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유례가 없는 4대 10군(또는 5대 11군)을 경험한 희귀한 인물이 된 것이다.

946년 요(遼)의 실권자 야율덕광(耶律德光)이 군대를 이끌고 개봉(開封)을 공격했다. 후진의 출제(出帝) 석중귀(石重貴)는 항복하고 후진은 멸망했다. 백관은 관복이 아닌 소복을 하고 교외로 나가 야율덕광을 영접했다. 풍도는 오랫동안 후진의 재상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야율덕광은 재상 노릇을 잘못해서 후진이 망한 것이라며 풍도를 나무랐다. 이때의 분위기는 서늘했다. 만에 하나 풍도가 입을 잘못 놀리는 날에는 바로 죽임이다. 다행히 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 하지 않고 야율덕광의 훈계를 들었다. 다음은 이후 오간 두 사람의 대화다.


덕광: 당신은 왜 백관을 이끌고 나를 맞이하러 왔나?

풍도: 저에게는 성도 군대도 없거늘 어찌 안 올 수 있겠습니까?(이 말은 비교적 솔직하다.)

덕광: (조롱하듯) 왜 그렇게 늙었는가?

풍도: 재주도 덕도 없는 못난 늙은이일 뿐입니다.


풍도는 상대방의 기분에 맞추려고 적절한 시기에 자조어린 말투로 대답했던 것이고, 덕광은 실소를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었다. 분위기는 그제야 풀렸다. 이에 덕광은 “천하가 큰 혼란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해야 백성들 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풍도는 상대를 자극하는 이른바 격장법(激將法)으로 덕광을 치켜세웠다. “지금은 부처가 나온다 해도 구할 수 없고, 오로지 황제(야율덕광을 가리킨다)만이 구할 수 있습니다.”

과연 풍도의 격장법은 주효하여 그 때부터 덕광은 성 밖으로 군대를 보내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던 일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신오대사》에서 “사람들은 모두 거란(요국)이 중국 사람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풍도가 말을 잘 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고 한 것이다.


이 대목만 보아도 풍도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욕을 먹고 조롱을 당해도 전혀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방에 위기가 잠복해 있고 험한 일이 줄줄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풍도처럼 대응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불도옹’이란 별칭을 가진 풍도의 처신은 충성과 배신이란 가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정치사에도 풍도 못지않은 ‘불도옹’이 있다. 바로 한덕수란 자이다. 박정희 정권 때 공직을 시작한 이래 전두환 – 노태후 – 김영삼 정권에서 고위 공직을 거쳤고, 김대중 정권 때는 장관급을 맡았고 노무현 정권 때는 마침내 ‘일인지하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에 올랐다. 이명박 정권 때는 주미대사를 맡았고, 윤석열 정권 때 또 한 번 국무총리를 맡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한덕수는 윤석열의 내란에 연루되어 징역 23년에 처해지는 인생 말년 최악의 수모(?)를 겪고 있다.

풍도는 무려 열 명의 권력자를 모시면서도 자기통제와 균형감각으로 무탈하게 20년 넘게 재상 자리를 지켰다. 재물을 탐하지도 않았고, 권력욕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염치없다는 비판은 들었지만 근검절약했고, 무엇보다 말을 조심했다. 반면 우리의 ‘불도옹’은 기름장어라는 별명처럼 약아빠진 언행과 공사를 구별할 줄 모르는 처신에다 막판에는 권력에까지 욕심을 부리다 신세를 망쳤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늘그막을 보라는 말이 있다. 2026년 1월 25일,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온 몸을 바친 또 한 사람의 진정한 ‘불도옹’ 이해찬 전 민주당대표(국무총리)가 객지에서 세상을 떠났다.(그는 일곱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해서 ‘불도옹’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씁쓸하고 서글프고 비통한 심경으로 인간의 삶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모두 변절하지 않고 꿋꿋하고 올바르게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불도옹’이 되었으면 한다.(2026년 1월 25일 1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