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사기성어대사전

아방궁

by 김영수

《사마천사기성어대사전(司馬遷史記成語大辭典)》(2,816쪽)


세계 최초로 司馬遷과 史記의 말씀(언어)을 오늘에 되살린 획기적인 사전


아방궁(阿房宮)


- 아방궁

- 권6 <진시황본기>


‘아방궁’은 오랜 세월 권력자의 지나치게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집(시설)의 대명사처럼 여겨졌고, 지금도 이런 인식은 여전하다. 아방궁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지 10년 째 재위 35년인 기원전 212년 함양 도성에 궁전 등을 새로 건설하면서 지은 궁의 이름이다. 관련 기록을 보면 이렇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보았다.


이 때 진시황은 함양은 사람은 많은데 선왕의 궁전이 너무 좁다고 여기고는 “짐이 듣기로는 주나라 문왕은 풍(豊)에 도읍하고 무왕은 호(鎬)에 도읍하였다고 하니, 풍과 호 두 지역 사이가 제왕의 도읍지로 제격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위수(渭水) 남쪽 상림원(上林苑)에 궁전을 지었다.

먼저 아방(阿房)에 전전(前殿)을 지었는데, 동서 넓이가 500보 남북 길이가 5장으로 위쪽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쪽에는 5장 높이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사방으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궁전 아래부터 남산까지 통하게 했으며, 남산 봉우리에 궐루를 세워 표지로 삼았다. 또 구름다리를 만들어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에까지 이르게 하여, 북극성(北極星)과 각도성(閣道星)이 은하수를 건너 영실성(營室星)에 이르는 모양을 상징했다.

아방궁이 완성되지 않았으나, 완성된 뒤에 좋은 이름을 지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아방에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아방궁이라 불렀다. 궁형과 도형(徒刑)을 받은 죄수 70만여 명을 나누어 아방궁을 짓게 하거나 여산(驪山, 진시황릉)을 조성하게 했다. 북산에서 석재를 캐내고 촉(蜀)과 형(荊) 지방에서 목재를 운반하여 모두 이곳으로 모이게 했다. 관중에는 궁전 300채를 지었으며, 함곡관 동쪽에는 400여 채의 궁전을 지었다.

그리고는 동해 바닷가 구산(朐山)에 비석을 세우고 진나라 국경의 동쪽 문으로 삼았다. 동시에 3만 가구를 여읍(驪邑)으로 옮기고, 5만 가구를 운양(雲陽)으로 옮겨 10년간 세금과 요역을 면제해 주었다.


관련하여 통일 제국의 도성 함양과 함양성의 역사적 의의 및 고고발굴 상황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진나라는 효공 12년인 기원전 350년 상앙의 2차 변법과 함께 함양(咸陽)으로 도읍을 옮겨 기원전 206년 망할 때까지 함양을 도성으로 삼았다. 함양은 여덟 군주 145년 동안 진나라의 중심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이 동안에 함양에서는 갖가지 큰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말 그대로 숨 막히도록 정신없이 사건이 잇따랐다. 상앙(商鞅)의 ‘변법(變法)’ 개혁, 인상여(藺相如)의 ‘완벽귀조(完璧歸趙)’, 형가(荊軻)의 진시황(당시 진왕) 암살기도, ‘분서갱유(焚書坑儒)’, 조고(趙高)의 ‘지록위마(指鹿爲馬)’ 등과 같은 극적인 사건이 계속되었다. 특히 진시황은 함양을 지휘본부로 삼아 6국을 멸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함양은 중국 최초의 통일된 봉건제국의 도성이 되었다. 이와 함께 함양을 중심으로 완비된 중앙집권적 봉건제도가 제정되어 후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함양성은 위수(渭水) 북쪽, 북산(北山)의 남쪽에 세워져 산과 물이 모두 양(陽)을 갖춘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함양(咸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소양왕(昭襄王) 때 성시의 규모가 남쪽으로 확대되어 장대궁(章臺宮)과 흥락궁(興樂宮)이 위수 남쪽 가에 섰다. 진시황은 천하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시키고 북릉에다 나름대로의 특색을 갖춘 6국의 궁궐을 그대로 본뜬 ‘6국 궁궐’을 짓고, 아름다운 난지궁(蘭池宮)도 세웠다. 위수 남쪽 주변 지금의 서안시 범위 안에다가는 화려하고 당당한 신궁(信宮)·감천궁(甘泉宮)·아방궁(阿房宮)을 세웠다. 이렇게 위수 양편을 아우른 함양성은 궁전 건축이 숲처럼 들어선 것 같은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항우가 입관하여 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궁궐에 불을 지름으로써 함양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함양성은 중국 고대사에 있어서 가장 찬란하면서도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역사적인 도성이 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오늘날 역사의 자취 속에서 그 옛날 함양성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위수 남쪽 가 흥락·장대·감천·신궁은 모두 한나라 장안성 범위 안에 든다. 어쩌면 후세인의 발길이 진나라 때의 기와와 벽돌을 밟고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나라 이래 위수의 물길이 끊임없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위수 북쪽 가에 위치한 함양성 유적은 대대적으로 물길에 씻겨나갔고, 이로써 인류의 문화유산이 영원히 사라졌다.

그러나 과거사를 복원하려는 고고 공작자들의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진 함양성의 건축터와 문화유물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우양촌(牛羊村)에서 희가도(姬家道) 북원(北塬)에 이르는 구역에서 장방형 궁궐터를 발견했으며, 그 중 세 군데의 건축터를 발굴했다. 복원을 해본 결과 그 웅장한 규모로 미루어 함양궁의 주요 건축으로 추정하고 있다. 궁성 서북에서는 건축 유지 열아홉 군데가 발견되었고, 백가취(柏家嘴) 일대에서는 흙을 다진 터 여섯 군데를 발견했다. 아울러 ‘난지궁(蘭池宮)’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와당이 나오는 난지궁의 자리가 실제로 확인되었다. 장릉(長陵)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는 우물 70여 군데와 흙으로 구워 만든 지하 배수관이 나왔는데, 이 토기에는 ‘함양(咸陽)’, ‘함리(咸里)’, ‘함정(咸亭)’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동기와 철기를 묻은 저장 구덩이에서는 진시황 25년(기원전 222)과 진 2세 원년(기원전 209)에 반포한 동판조서(銅板詔書)가 발견되기도 했다. 섭가구(聶家溝)에서 호가구(胡家溝) 사이에서는 벽돌과 기와·동·철을 제작하는 작업장 터가 발견되었고, 그 서쪽 약 4km 범위 안에서는 대량의 소형 진나라 무덤이 흩어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서안시 삼교진(三橋鎭) 서남 아방궁 범위에서는 20여 곳의 건축터가 발견되어 기록에서 말하는 “동서 넓이가 500보 남북 길이가 5장으로 위쪽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쪽에는 5장 높이의 깃발을 꽂을 수 있고” “다섯 걸음에 누 하나, 열 걸음에 각 하나”라는 굉장한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실물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도면. 진의 천하통일 과정은 여러 차례에 걸친 천도와도 상당한 관계가 있다. 지도는 진의 천도 과정을 나타낸 노선도이다.

도면. 지금 아방궁의 흔적은 흙 담장만 남아 있을 뿐이다.

도면. 진시황릉 능원에서 확인된 배수시설이다.


키워드: 궁궐, 함양, 아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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