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생가외
김영수의 지인논세(知人論世)
후생가외(後生可畏)
고사성어로서 오랜 된 사례는 무려 3천 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사(故事, Old Story)’라는 단어 그대로 오래된 일이자 오래된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고사성어가 죽은 언어는 결토 아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고 또 달리 쓸 수 있다. ‘우이독경(牛耳讀經)’이라는 사자성어를 예로 들어본다. ‘우이독경’은 ‘쇠귀에 경 읽기’라는 우리 속담을 한자로 바꾼 우리식 사자성어이다. 중국에서 같은 뜻을 가진 사자성어로는 ‘소 앞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다’는 ‘대우탄금(對牛彈琴)’이 있다.
이 두 사자성어는 무식한 자에게 고상한 말씀을 해봐야 못 알아듣는다는, 상대를 무시하는 경멸조의 비유이다. 또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얻을 게 없다는 비유이기도 하다. ‘대우탄금’에는 이런 우화가 전한다.
전국시대 공명의(公明儀)란 음악가가 있었다. 그는 작곡과 연주 모두에 뛰어났고, 일곱 줄의 칠현금(七絃琴)을 특별히 잘 연주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연주를 즐기며 그를 아꼈다. 그는 부지런히 일하는 소에게도 자신의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소는 연주에는 아랑곳 않고 풀만 뜯었다. 공명의는 소가 연주를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연주한 ‘청각(淸角)’이라는 곡조가 쇠귀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모기나 등에의 소리, 젖을 먹고 있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흉내 냈더니 소가 반응 보이면서 귀를 새운 채 거문고 연주를 들었다.
위 우화는 소에게는 소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들려주어야지 반응을 보이지 아무리 고상한 음악이라도 소용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이독경’도 마찬가지다. 소에게 ‘공자왈, 맹자왈’ 훌륭한 말씀을 읊어봐야 못 알아듣는다. 이 두 사자성어를 현대식으로 해석하자면 이렇다. 많이 배운 것을 뽐내려고 고상하고 어려운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즉 심오한 경전을 읊고 고상한 음악을 연주하는 자들을 비꼬는 표현들이다. 잘난 척하는 자들에 대한 야유라 할 수 있다.
순자의 말씀 중에 ‘청출어람(靑出於藍)’이 있다. ‘푸른색의 풀인 쪽에서 나온 푸른색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선배(스승)보다 뛰어난 후배(제자)를 가리킬 때 많이 인용한다. 그래서 공자는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까지 했다. ‘나중에 태어난 후배들이 무섭다’는 뜻이다. 같은 뜻으로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낸다’는 격언도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 특히 정치판의 젊은(?) 정치인들을 보노라면 ‘후생가외’를 달리 해석해야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노인비하는 기본이고 여성비하, 장애인비하를 서슴없이 입에 올린다. 욕설과 외설은 물론 뻔히 보이는 비열한 수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두렵다.
공자께서는 후배들의 뛰어난 실력이 두렵다고 했지만, 우리 정치판의 후배들은 그 천박한 언행 때문에 두렵다. ‘후생가외’가 달리 해석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늙고 낡은 수법을 거리낌 없이 쓸 뿐만 아니라, 그 언행이 천박하고 심지어 사악하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더 하다. 이들이 정말 두렵다. 우리의 미래를 이런 ‘후생’들에게 맡겨야 할지 정말 ‘가외’이다.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흐르려는 것은 아닌지 겁이 많이 난다. 참고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해둔다. 젊은 정치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라면 곰곰이 새겨보았으면 한다.
“나중에 태어난 후배(젊은이)들이 두렵다. 뒤에 오는 이들이 어찌 지금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40, 50이 되도록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논어》, <자한> 편)
공자는 또 나이 40이면 불혹(不惑)이라 했다. ‘나쁜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50이면 ‘천명(天命)을 알아야 한다’고도 했다. 세상사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나이가 50이다. 부디 공자의 말씀대로 실력 있고 사람다운 젊은이(후배)를 두려운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공자는 이런 무시무시한 말씀도 남겼다.
“나이 40이 되어 남의 미움을 받으면 그건 끝장이다.”(<양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