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결단, 백두산의 숨결

by 할미꽃

연변에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동아리에서 구 만주 일대 역사 탐방을 가는데 같이 가자는 제안이었다. 여행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서울 친구 둘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연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행단과 함께 연변 일대를 누비며 수만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역사의 흔적을 살폈다. 송화강 가에서 셔터를 누르고, 지명조차 희미한 옛 만주족의 마을을 둘러보았다. 말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시절, 떼 지어 달리던 기마군단의 길을 걸으며 그들의 열악했던 삶을 짐작해 보기도 했다. 수십 마리 말이 한꺼번에 목을 축였을 호수 같은 웅덩이 앞에선 거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몽고정에도 들렀다. 송나라에서 원나라로 왕조는 바뀌어 이름조차 '몽고정'이 되었건만, 주인은 바뀌어도 우물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의연한 우물을 뒤로하고 일송정에 올랐다. 노래 가사로만 듣던 그곳에서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굽이쳐 돌아가는 혜란강을 바라보았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 <선구자>를 불렀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목이 메어 차마 다 부르지 못할 것 같은 노래가 육십 대 여인들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혜란강 물결마다 우리 선조들의 눈물과 기개가 서려 있는 듯해 가슴이 뜨거워졌다.

단체 여행을 마친 후, 우리 넷은 따로 백두산에 오르기로 했다. 연변 친구의 주선으로 지프차 한 대를 대절했다. 차비가 고작 5위안이라는 말에 놀랐던 것도 잠시, 우려대로 차는 도중에 고장이 났다. 수리공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내 마음은 타들어 갔다. ‘혹시 백두산 문턱에도 못 가보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건 아닐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장백산 입구는 소도시처럼 붐볐다. 하지만 백두산 정상으로 가는 전용 차 운전사는 고개를 저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위험하니 오늘은 운행하지 않는다는 통보였다. 그 순간, 내 가슴 속으로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민족의 영산이라 배워온 백두산. 2,744미터의 그 거대한 정기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대로 돌아설 수는 없었다. 친구들은 포기하고 내려가자고 했다. 3대 1. 숫자의 형세는 기울었으나 나는 승복할 수 없었다. 얼굴에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나는 적군을 향해 돌진하는 용사처럼 운전사에게 다가갔다. 서툰 중국어로 멀리서 왔으니 제발 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막무가내인 그들에게 나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애원 대신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정해진 요금의 세 배를 주겠노라고 크게 한 방 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서슬 퍼런 어조로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텐가! 기어이 가야 하네!” 그것은 동의를 구하는 제안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명령 같은 힘이었다.

결국 운전사들이 움직였다. 가고야 말겠다는 내 의지 앞에서는 눈 덮인 비탈길도 무섭지 않았다. 차는 정상 20~30미터를 앞두고 멈춰 섰다. 가슴 높이까지 쌓인 눈밭 사이로 사람 하나 겨우 지날 좁은 길이 나 있었다.



추위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천지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그 눈길을 단숨에 기어올랐다. 마지막 바위산을 악착같이 타고 올라 마침내 정상에 섰다.

하지만 눈앞은 온통 희뿌연 안개뿐이었다. 세 번 올라야 한 번 볼까 말까 한다는 천지. 나 또한 행운을 비껴가는 사람 중 하나가 되는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그때였다. 천지를 휘감고 있던 안개 구름이 빙빙 돌며 마법처럼 사라지더니, 푸른 천지가 그 장엄한 얼굴을 쑥 내밀었다.

“천지다!”

벅찬 감흥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구름은 다시 몰려와 천지를 덮어버렸지만, 그 짧은 찰나는 내 뇌리 속에 박혀 영원이 되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지금, 아흔의 나이가 되어서야 당시 동행했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그때 자네가 내렸던 그 결단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장관을 보았노라고, 정말 고마웠노라고.

아흔둘의 오늘,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인생이란 눈보라 앞에서도 "가겠다"고 외치는 그 한 번의 결단으로 풍경이 바뀐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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