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잃은 낙엽들이 하나 둘 내려앉더니 산이 온통 갈색으로 변해 가고 있다.
산책길이 아닌 숲숙을 헤집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쉼터에 앉아 있는 데, 툭 소리가 나며 알 밤 한 톨이 내 발 앞에 떨어졌다.
알밤과 함께 아버지의 목소리도 따라 왔다.
나무 하러 간 산길에서 주운 첫 밤알을 '이건 아버지 드려야지' 하고 챙기고, 두 번째 알밤, 그 다음 알밤도 ‘나 아닌 다른 이의 몫'으로 남겨두었다는 산골 효자의 이야기. 산속에 숨어 살던 도깨비가 그 정경을 보고, 기특한 마음씨에 감복하여 무슨 소원이든지 이루어지는 도깨비 방망이를 선물했다는 옛날이야기다.
아버지가 들려 주시던 그 옛날 얘기가 어린 내 마음속에 '욕심보다 더 귀한 것은, 나누는 마음'이라는 씨앗을 심어주었다.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며, 몇 푼 주고 사면 될 걸 노인이 구차하게 무얼 저리 줍느냐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들려오는 그들 마음에 대고 나도 소리없이 이렇게 답한다.
‘나는 밤알을 줍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가르침을 줍고, 그리움을 줍고, 생명의 도리를 줍는다’.
낙엽 속에 묻혀 썩어 없어질 밤톨이 내 손을 통해 아이들의 입으로 들어가, 달콤한 간식이 되는 것, 그것이 밤나무가 한 계절 고생하며 바랐던 진짜 꿈이 아닐까.
알밤 한 톨이 떨어지며 들리던 툭 소리가, 마음 속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서러움을 끄집어 냈다. 내 아버지는, 서글픈 뒷모습만 남기며 북한 남노당 당원에게 끌려 가셨다. 그때 나는 열다섯 소녀였다.
끌려가신 아버지의 마지막 뒷모습이, 낙엽 지는 저 산길 어디쯤엔가 아직도 서 계신 것 같아, 나는 자꾸만 허리를 굽혀 밤을 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