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평생 지켜야 할 이름표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소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단 한 번도 우등상을 놓쳐본 적 없는 성실함의 기록, 그리고 ‘서울대학교 졸업생’이라는 자부심 섞인 꼬리표였다.
어느 날, 나는 사립초등학교에서 공립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평교사가 아닌 ‘교감’이라는 직책으로 간 것이 화근이었을까. 나는 옮겨가자마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서울대 나왔다면서 왜 초등 교사를 하고 있어?” “사립학교에만 있었다며?”
당시 교육계는 2년제 대학 출신이 주류였고, 4년제 대학 출신인 우리는 정책 변화 속에 영입된 새로운 물결이었다. 하지만 그 물결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사립 출신이라는 색안경에, 고학력자에 대한 시샘까지 더해진 따가운 눈총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자.’
당시 승진 제도가 점수제에서 자격시험제로 바뀌던 격변기였다. 사립에서는 설립자의 임명으로 교감이 되었지만, 공립에서는 국가가 인정하는 자격증이 필요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공립 교사들 사이에서 나는 다시 시험대에 섰다.
심지어 이미 교감이 되었으니 나더러 공부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협박 아닌 호소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서열이 중요한 그들에게 나의 존재는 위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호소를 등 뒤로 한 채 최우수의 자리를 지켰다. ‘거저 얻은 교감’이라는 경시의 눈초리를 내 성적으로 잠재워야 했기 때문이다.
교장 자격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나의 밤은 더 깊어졌다. 건강을 걱정해 그만 자라는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온 집안에 고요한 숨소리가 번지면 나는 도둑처럼 일어나 등불을 켰다. 그것은 단순한 출세욕이 아니었다. 내가 걸어온 평생의 학업과 내 모교의 이름 앞에 당당해지려는 치열한 자기 증명이었다.
사립 출신이라고 은근히 따돌리던 시선에 대거리하는 대신, 나는 밤마다 나 자신과 싸웠다. 그것이 나를 나로 있게 한 교육의 힘이었다.
수석 합격 소식이 전해지던 날, 교무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나를 향하던 따가운 시선도, 보이지 않는 벽도 성적표 한 장 앞에 소리 없이 녹아내렸다. 놀랍게도 나를 색안경 끼고 보던 직원들이 제일 먼저 다가와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다. 수줍게 웃으며 건네는 꽃다발을 보며, 나는 그제야 밤마다 홀로 켰던 등불의 외로움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자부심과 나만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밤잠 설치며 쌓아 올린 시간들. 그것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투지’가 아니라, 편견의 담장을 허물고 모두와 함께 웃기 위한 나만의 **‘징검다리’**였음을 이제 다시 생각한다.
글 한 조각씩을 세상에 펼쳐내며 긴 세월 집안 구석구석, 이 서랍 저 서랍에 쌓인 잡동사니들을 뒤적인다. 버릴 것은 버리고, 다시 먼지 털어가며 반듯하게 자리를 잡아 정리하는 기분이다.
그런데 왜일까. 그 정갈한 몸놀림의 틈새로 자꾸만 눈물이 번진다. 이 정리가 끝나면 이제 정말 떠나야 할 일만 남은 것 같은 애처로움 때문일까. 아니면, 그토록 치열하게 등불을 켰던 그 젊은 날의 나를 이제야 비로소 온전히 안아주었기 때문일까.
눈물로 닦아낸 이 기억들이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내일을 건너는 든든한 징검다리가 되기를, 나는 무음의 노래를 부르며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