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 보려고 하지만 눈꺼풀이 무겁다. 힘겹게 눈을 떴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다.
함께 자고 있던 폰을 흔들어 깨웠다. 새벽 세시라고 한다.
더 자야 할 시간이지만 잠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일까.
영화에서 볼 때 늘 부러운 장면이 있다. 아기가 잠자리에 들 때, 엄마는 아가 옆에 누워 그림책을 읽어 준다. 아가는 별나라 얘기를 듣다가 별빛 속으로 스르르 잠이 든다.
좀 더 큰 아이에게는 “잘 자” 하며 볼에 입맞춤 하고 살며시 전등 스위치를 끄고 나온다. 그 손에는 온기가 느껴진다. 부럽다는 표현은 알맞지 않은 것 같다. 아쉬움 ? 미안함? 그런 표현이 더 알맞을 지도 모른다.
내 증손자들은 그렇게 자라고 있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뜨끔해진다. 그리고
어미가 사다 꽂아놓은 책 한 권 꺼내 들고 스스로 잠을 청하는 내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마 나는 내가 먼저 잠들었을 것이다. 낮 동안 일터에서 소진한 체력 때문이었다고 스스로 변명해 보지만 마음은 무겁다.
어제 딸이 불러내어 점심을 같이 먹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며칠 뒤에, 코 수술을 한다고 했다. 콧속에 있지 않아야 할 살덩이가 있어 숨쉬기가 늘 불편했단다, 말끝에 언제부터 그랬느냐고 내가 물었다.
"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
내 가슴 속에 무엇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울컥 “어휴!” 한마디가 토해 나왔다.
한숨인지 신음이었는지 모르겠다. 긴 세월 쌓인 딸의 불편 앞에 나는 죄인이 되었다.
나는 보이는 것만 보면서 자식을 키웠구나. 보이지 않는 그들의 아픔이나 불편을 알지 못했고, 가쁜 숨소리를 듣지 못했구나. 긴 세월 불편했던 딸의 숨결이 응축되어 내 가슴을 쿵 하고 친 것이다. 토해 나온 그 한마디가 매서운 회초리가 되어 평온했던 내 마음을 쭉 찢었다. 자식들을 잘 키우기 위한 길이라는 명분을 걸고, 동분서주 뛰며 살아왔던 내 삶이었는데, 정작 내 아이들은 그 삶 속에서 고통과 시린 마음도 함께 키워 온 것일까. 엄마가 일하지 않는 찬구들을 부러워 하며 지내온 세월 탓에,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아픔은 안으로 감추며 사는 여린 마음이 되었을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려보지만, 마음은 무겁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서 '그 동분서주는 너 자신의 삶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반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다.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생활에서는 우등생이었는지는 몰라도 어미로서 나는 낙제생인 것 같다.
깃털 이불 속에 누워 있어도 마음은 자꾸만 시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