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게 될 즈음부터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왔다. 부를 가진 사람, 간판이 좋은 사람 들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한사코 도리질을 했다.
“나는, 사탕 장사를 하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할 거야.”
고집스레 내뱉었던 그 말대로, 졸업 이듬해 그런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의 집 문간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주변의 편치않은 시선이 느껴졌다. 잘난 체하더니 저렇게밖에 못사느냐는 눈총 같았다.
대문 앞에 서서, 출근하는 남편에게 잘 다녀오라고 손짓하는 달콤한 풍경은 꿈이었다.
곁방살이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차가운 현실 앞에, 사탕 놀이의 단맛은 그 맛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갓난아기를 친정어머니에게 부탁하고 곧장 맞벌이에 나섰다.
내 집 마련이라는 거대한 목표 아래, 신혼 생활은 전쟁 같은 몇 해였다.
몇 년 만에 겨우 평화와 안락이 찾아왔다.
마당에 그네도 놓고 조그만 연못도 만들었다. 세 아이들은 강아지와 함께 뜰 안에서 마음껏 뛰놀았다. 마루에서는 딸 아이의 피아노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사탕장수 같던 내 남편이 그 사탕을 다른 사람에게도 팔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것이다,
천지가 쨍하고 찢어지면서 내가 선택한 사탕장수는 허상이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부서져 나간 자리에 새롭고 세찬 언어가 하나 떠올랐다.
“내가 죽어서 네가 산다면...” 어느 유행가 가사 속에 있는 구절이었던가.
나는 세 아이들을 보며 다짐했다.
“내가 죽어서 너희들이 산다면...”
‘내가 죽자’
말 못하는 아가들이었지만, 어미의 따듯한 눈길과 손길이 고팠을 내 아이들이다. 결손가정이라는 아픔까지 얹어 줄 수는 없었다.
못본 체 하고, 못들은 체 하고, 참아내다 아파하면서 내 영혼은 죽어가고 있었다.
인고의 긴 세월이었다.
지금은 그 두 번째 언어마저 시효가 지났다.
내 아이들은 이제 거목이 되어 오히려 나를 지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