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학동들은 여름에도 솜 방석 모자를 쓰고 다녔다.
네모난 솜 방석을 반 접어서 한쪽을 꿰매면 고깔모자가 된다. 그리고 가운데 목 부분에서 끈으로 묶으면 벗어지지 않기도 하고, 어깨 부분까지 덮이게 된다.
비행기 폭격이 있을 때, 파편을 막아주기 위한 방공모자였다.
무겁고 갑갑한 것이었지만 교칙이니까, 모든 아이들이 교모처럼 쓰고 다녔다.
색깔은 모두 검정이나 진남색으로 만들어야 했다. 각자 집에서 만들어 쓰는 것이기 때문에 만든 천이나 모양은 제각각이었다. 그 모자를 즈킹 이라고 했다.
즈킹은 일본말로 頭巾두건 머리 수건이라는 뜻이다
젊은 엄마들은 그 솜방석 모자가 옷이라도 되는 것처럼 멋을 부려 만들었다. 어떤 아이는, 그 당시 세르라 불리던 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것을 쓰기도 했고, 또 어떤 아이는 직선만으로 만들지 않고, 얼굴과 머리 모양에 맞게 곡선을 살려 만들어진 것을 쓰기도 했다. 심지어 꽃모양이 누벼진 모자를 쓴 아이도 있었다.
내가 쓰고 다닌 모자는 거친 무명천으로 된 것인데, 유난히 다른 아이들 것보다 두꺼웠다. 한 번도 폭격을 겪지 않았던 터라, 아이들은 그것이 방탄모자라는 성질은 모르고, 옷의 일종인양 예쁜 즈킹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 뻐기는 모습이 밉기도 했지만, 은근히 속으로는 부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볼품없는 내 모자가 부끄럽기도 했었다.
눈치껏 기회를 엿봐가며, 나는 그 솜방석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여섯 남매 중 내가 막내다. 우리 엄마는 다른 아이들의 엄마처럼 젊지도 신여성도 아니었다.
하지만 과묵하고 지혜로우셨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셨으나, 한글은 물론 웬만한 한자도 읽으실 줄 아는 분이셨다.
우리 남매들은 어른이 되어서 어머니를 추억할 때면 늘 이렇게 말한다. “우리 어머니는 제대로 배우기만 하셨다면 분명 대학 총장감이셨을 것”이라고.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서 알게 되었다. 그때 내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솜방석 모자가 사실은 특등품이었다는 것을!
파편을 막아야 하는 방공모에 비단 천이 무슨 소용이며, 꽃무늬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두꺼울수록 본래 기능은 훌륭한 것이었다.
남보다 더 두꺼웠던 내 모자를 떠올리며, 이제야 그 속에 담긴 어머니 사랑과 지혜의 두께를 느낀다.